제378화
정오가 지나자 마침내 비가 멈추었다.
유월 말이라 한창 날씨가 더웠는데 비가 한바탕 시원하게 내리고 나니 다시 날씨가 화창해지며 풋풋하고 싱그러운 흙냄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비가 내린 후 다시 쏟아지는 햇살보다 더 맑고 싱그러운 건 없었다.
엽연채는 요즘 무더위 때문에 한동안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모처럼 비가 내려 날씨가 시원해졌으니 그녀는 제민을 데리고 거리 구경을 하러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제민도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과거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쉴 새 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도성 안의 동가東街는 아주 시끌벅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뒤꿈치를 밟을 정도로 인파로 북적거렸다. 당연히 주변 역시 노점을 펴고 물건을 파는 소상인들과 작은 상점들로 가득했다.
제민은 뒷짐을 지고 거리를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아, 그게…….”
제민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점을 펼 자리를 보고 있었어…….”
전에 그녀가 거리에서 노점을 펼 땐 정해진 자리가 없었기에 거리에 나오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노점을 펼 적당한 자리를 찾곤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온종일 노점을 펼 자리가 있나 없나 둘러볼 필요 없이 그저 평범하게 거리에 나오는 날이 오기를 항상 꿈꿨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노점을 펼 자리를 찾지 않아도 되게 됐는데, 마음이 공허하기만 했다.
“아가씨, 아가씨. 저쪽에 군밤이 있어요.”
추길이 앞에서 뛰어오며 흥분한 얼굴로 외치자 제민이 의아해했다.
“밤이 벌써 나왔다고? 보통 팔월에서 구월은 되어야 시장에 나오는데.”
추길이 엽연채를 잡아당겼고 잠시 후 일행은 군밤을 파는 노점상 앞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이백 문文으로 군밤을 사서 봉투 네 개에 나눴고 네 사람은 각자 한 봉투씩 들고 걸어가며 밤을 먹었다.
“연채야! 연채야!”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마차 한 대가 천천히 그녀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옻칠을 한 평범하고 작은 마차였다.
이때 마차에 달린 검은 천이 걷히더니 희고 보드라운 조그만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은 눈을 반짝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엽연채를 향해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연채!”
다름 아닌 양왕비 조앵기였다!
“어라, 앵기잖아! 어디 가는 거야?”
엽연채도 그녀를 보더니 기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응, 놀러 가!”
조앵기는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봐!”
“그래, 또 봐!”
엽연채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고 조앵기를 태운 마차는 ‘덜덜덜’ 소리를 내며 그곳을 떠났다.
“누구야?”
제민은 궁금해하며 묻더니 군밤 하나를 던져 입 속에 넣었다.
“양왕비인 조앵기야.”
“양왕비? 그 양왕에게 미움받고 너희 귀족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한다는 양왕비?”
제민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되묻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맞아. 잘 알고 있네?”
“우리 같은 백성들은 딱히 놀거리가 없잖아! 평소 노점에서 장사할 때 옆에 있는 노점 상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거든. 안 나눈 이야기가 없어. 너희 엽씨 가문 일도… 꼬박 일 년 동안 이야기했지.”
제민은 여기까지 뱉고 괜한 말을 했나 싶어 머쓱해졌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탓하려면 소란을 피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엽씨 가문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는가? 작년 삼사월부터 소란이 끊이지 않다가 올해 삼사월이 되어서야 조용해진 셈이었다.
제민이 말머리를 돌렸다.
“양왕비 조앵기 말이야. 백성들도 자주 언급하는 사람이야. 평민 출신인데 나약하고 무능해서 양왕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고 사람들이 비웃더라고.
게다가 성격이 까칠해 뒤에선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있으면 아랫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한대. 그래서 양왕비를 모시는 시녀들을 주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하더라.”
그 말에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민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양왕비는 외출을 잘 안 한다고 하던데.”
“가끔은 나올 수도 있지 뭐.”
“아까 마차가 좀 이상하지 않아? 명색이 양왕비인데 외출을 한다 해도 양왕부의 마차를 타야지!”
제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방금 전 그 마차는 확실히 양왕부의 마차는 아니었다. 초라한 마차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엽연채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운을 뗐다.
“설마… 납치당한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네 사람은 전부 표정이 확 굳어졌다. 심히 걱정스러운 지능을 가진 조앵기라면…….
엽연채는 낯빛이 확 변했다.
“어, 어서 쫓아가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민은 이미 쏜살같이 달려 나갔고 엽연채와 추길, 혜연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다행히 워낙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라 빨리 지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도 그러한 판국에 마차야 말해 무엇 할까.
제민은 농가 출신답게 체력이 좋아 금세 앞으로 달려가 마차 앞을 가로막아 섰다.
“으악!”
마부는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마차를 가로막자 깜짝 놀라 왁 비명을 지르고는 얼른 말고삐를 잡아 말을 멈춰 세웠다.
마부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얼굴은 주름투성이인 영감이었고 마차의 끌채엔 그와 마찬가지로 머리가 꽤 많이 센 할멈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웬 소녀가 나타나 자기들 길을 막자 낯빛이 확 변했다.
“뭐, 뭐 하는 것이냐?”
마차를 몰던 영감은 새파랗게 질린 채 말을 더듬었다.
“뭘 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민은 냉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제 친구를 태워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그 애를 내려 주세요!”
“이…….”
영감이 안색이 확 변해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뒤에서 오던 엽연채와 추길이 그들을 따라잡았다.
“연채야!”
엽연채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나자 조앵기는 기쁜 마음에 조그만 몸을 반쯤 창밖으로 내밀었다.
“앵기야, 어서 내려와.”
엽연채는 활짝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서. 나랑 놀러 가자.”
“오, 좋아!”
조앵기는 얼른 치마를 걷어 올리고 몸을 굽혀 마차 밖으로 나왔고, 엽연채는 손을 뻗어 그녀가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도록 부축해 줬다.
노부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조앵기는 이미 마차에서 내린 후였고, 제민은 비웃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감은 켕기는 바가 있으니 말고삐를 확 잡아당겨 쏜살같이 달아났다.
마차가 속도를 내자 거리의 행인들은 깜짝 놀라 잇달아 비명을 지르며 길 양쪽으로 비켜섰다.
엽연채는 조앵기를 잡아당기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쭉 훑어보고는 별 탈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길은 제민에게 달려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에게 말했다.
“방금 전 그 노부부가 인신매매범인 거야? 아니지?”
“저런 인신매매범들 많이 봤어.”
제민은 냉소를 지었다.
“저런 사람들은 인신매매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니야. 아마 집에서 며느리를 들이지 못했는데 마침 양왕비를 보고 집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걸 거야. 본인들의 며느리로 들이거나 아니면 반편이나 불구자가 아내로 삼도록 넘겨줬겠지.”
그 말에 추길은 소름이 확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조앵기를 쳐다봤다. 조앵기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태평히 미소나 짓고 있었다.
추길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하마터면 산간벽지로 팔려가 반편이나 불구자의 아내가 될 뻔했는데 웃고나 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저 마차는 어쩌다가 타게 된 거야?”
엽연채는 조앵기의 작은 손을 잡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오늘 태후 마마께서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내 생각이 나셨나 봐. 하는 수 없이 문안 인사를 드리러 궁으로 들어갔지.”
조앵기는 그리 말하며 희고 보드라운 얼굴에 살짝 인상을 썼다. 보아하니 이번 입궁이 즐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잠시 있다가 태후 마마께서 내보내시기에 마차를 타고 궁 밖으로 나왔는데, 대로에 도착하니까 마차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 움직이지 않더라고.
고치려고 시간은 걸리지, 날씨는 푹푹 찌지. 그 안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바람 좀 쐬려고 마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어. 소완이가 앞에 있는 마차와 말을 대여해 주는 상점에 가서 마차 한 대를 빌려온다고 갔는데, 잠시 후에 아까 그 마차가 오더라고.”
듣고 있던 엽연채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 할아버지 마음씨가 참 좋더라고. 날 집으로 데려다준다고 했어!”
조앵기는 그리 말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 사람들이 집으로 바로 데려다준다고 했어?”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물었다.
“아니, 그 할아버지가 일단 밖에서 좀 돌아다니며 도성 구경을 시켜준다고 했어.”
조앵기는 생기발랄하게 두 눈을 반짝였다. 이런 자유를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엽연채는 순간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조앵기는 어릴 때부터 양왕부라는 새장에 갇혀 자랐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몰랐고, 그 노부부의 인자하고 선량한 모습을 보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은 속은 거예요! 사실 그 부부는 사기꾼이란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당신을 데려가 팔아 버리려고 했어요!”
제민은 조앵기 쪽으로 걸어와 얼굴을 고약하게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조앵기의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 사람들은 당신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육칠십 대 영감의 아내로 팔아 버렸을 거예요. 아니면 온종일 콧물과 침이나 질질 흘리는 반편이의 아내로 팔아 버렸겠죠.”
제민은 그리 말하며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제민이 이렇게 험상궂은 얼굴로 겁주자 조앵기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누, 누구에게 판다고요?”
조앵기는 깜짝 놀라 어리둥절했고 제민은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다시 강조했다.
“영감이나 반편이 아니면 불구자에게 팔았겠죠! 흥!”
조앵기는 고개를 숙이고는 포도알같이 동그랗고 촉촉한 두 눈으로 제민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조그만 얼굴이 붉어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리되어도… 괜찮아요.”
제민은 발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그리되어도 괜찮다니?
엽연채도 어이가 없었다. 양왕이 얼마나 악랄하게 굴며 조앵기를 핍박했기에 차라리 팔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엽연채는 조앵기가 자주 외출할 수도 없고 화본을 읽을 자유조차 없다는 게 또 떠오르자 옅은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작은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가자. 놀러 가자고 했잖아.”
“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