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엽연채 일행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추길은 대문을 닫고 다시 엽연채와 혜연의 뒤를 쫓아가 함께 수화문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초수유량抄手游廊(좌우로 동쪽 곁채와 서쪽 곁채를 따라 본채까지 이어지는 긴 낭하)으로 올라섰고 엽연채는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지우산을 접은 다음 유랑을 따라 걸어갔다.
“유 소저가 무슨 일로 아가씨를 찾으신 거예요?”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이리 대꾸했다.
“이해하고 동조해 줄 자기편을 찾아왔던 게지!”
그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지금 유곡요의 주변 사람들은 전부 유곡요에게 제민을 집안으로 들이라면서 그녀의 의견에 반대하고 있으니, 유곡요는 자기편에 서 줄 사람을 찾으러 이곳에 왔던 것이다.
유곡요는 이해와 동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엽연채가 제민을 밖으로 내쫓아 주길 바랐다. 그것이 바로 유곡요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었다.
유곡요도 가련한 사람이기는 했다. 하지만 엽연채가 마음이 모진 게 아니라 그녀가 말했듯이 그녀는 이미 유곡요와 제민을 도와줬다.
그날 혼례식에서 엽연채가 했던 말은 제민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면서 유곡요도 초빙풍의 민낯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해 줬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유 재상이 찾아왔고 유곡요는 자신의 일생을 유 재상에게 내맡겼다. 유 재상을 믿고 계속 혼례식을 치르는 선택을 한 것이다.
엽연채는 똑같은 방법으로 유곡요와 제민을 도왔는데 결과적으로 제민은 스스로를 구하고 그곳에서 걸어 나오는 선택을 했고, 반면 유곡요는 두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선택을 했다.
인생에선 매 순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길은 일단 선택하고 나면 아무리 굴곡지고 험난해도 걸어가야만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법이었다.
“아가씨께서 이혼을 언급하셨는데 유 소저가 그걸 고려할까요?”
“그걸 누가 알겠어.”
추길의 말에 혜연이 대신 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안 하실 거야. 이혼의 대가가 너무 크니까. 유 소저는 마님이 아니잖아. 마님께는 장성한 아들딸이 있었잖아. 그리고 그때 셋째 도련님도 장원 급제를 하셨어. 의지할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마님께서도 이혼할 결심을 하셨던 거지.
그런데 유 소저는 어떨 것 같니? 이혼을 하게 되면 유 재상 대인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데, 유씨 가문에서 소저를 다시 받아 주겠어? 유 소저는 유씨 가문 대소저와 지체 높은 적녀의 자리를 잃게 될 거야.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거지.”
엽연채는 초수유량을 따라 걸어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곡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제민이 하는 모든 행동도 마찬가지로 제민을 빈털터리로 만들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들 각자의 선택이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와 여종 둘이 긴 회랑을 지나 소청 문 앞으로 걸어가니 밥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어머, 맛있는 냄새가 나요!”
추길은 코를 벌름거리며 소청으로 들어갔다.
엽연채가 보니 제민이 원탁에 앉아 있었고 원탁 위엔 음식 재료가 가득했다. 커다란 접시 세 개에 부추 계란 소, 배추 돼지고기 소, 소고기 냉이 소가 담겨 있었고 옆에 있는 접시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교자 만두피가 반쯤 놓여 있었다.
제민과 여종 한 명은 교자를 빚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 부인, 돌아왔군요.”
제민은 손으로는 여전히 교자를 빚으며 고개를 들어 인사를 했다.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주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그냥 내 이름을 불러 줘. 어머니와 고모도 날 연채라고 불러.”
“좋아. 그럼 연채라고 부를게.”
제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 며칠 동안 돌봐 줘서 정말 고마워.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일단 음식이라도 만들어 봤어.”
“그러잖아도 교자를 먹은 지 오래돼서 먹고 싶었는데! 나도 같이 만들게!”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추길, 혜연과 함께 주방으로 가서 손을 씻었고 잠시 후 소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자리에 앉더니 만두피를 집어 교자를 빚기 시작했다.
제민은 엽연채의 손에서 빚어지는 교자들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정말이지 너무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여기서 며칠만 더 지낼게. 은화를 가져오면 떠날 거야.”
제민의 말에 엽연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직 남아 있는 은화가 있어?”
“조금. 도성 서쪽에서 살 때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어. 그래서 은화를 꼭꼭 숨겨 놨지. 집에 있는 큰 나무 밑에 묻어 놨는데 대여섯 냥 정도 될 거야! 한데 그 집 주인이 이미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세 줬거든. 그래서 은화를 가져오려면 애 좀 써야 될 거야.”
“은화를 챙긴다고 해도, 앞으론 어떡할 건데?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엽연채가 장래를 거론하자 제민은 멍한 얼굴로 답했다.
“고향엔 이미 가족이 없어. 게다가… 논밭도 전부 팔았고.”
당시 초빙풍이 더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 해서 그 스승에게 사례를 하기 위해 모든 논밭과 심지어 택지마저 전부 팔아 버렸다.
당시 제민은 배수진을 친다는 결심을 했다. 초빙풍을 공부시켜 그가 과거 시험에서 수재秀才로 합격하면 현縣에 있는 서원에 보내려고 했다. 그녀는 모든 걸 그에게 걸었고 자신에겐 퇴로를 남겨 두지 않았다. 자신들에겐 퇴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그가 만약 과거 시험에 붙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까짓것 두 사람이 함께 노점을 펼치면 됐으니까, 팔다리 멀쩡하니 굶어 죽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시 자신들에게 퇴로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에게는 정말로 퇴로가 필요하지 않았다. 퇴로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민은 가슴에서 찌릿찌릿하는 통증이 느껴졌고 마음이 아파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원망과 증오가 즐겁고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과 뒤섞여 그녀를 덮쳐 왔다.
“그럼 도성을 떠나려는 거야?”
엽연채는 물으며 붉은 입술을 씰룩였다.
“그걸로 만족이 되겠어?”
“아니!”
제민은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어떻게 만족이 되겠는가. 자신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는 자신을 짓밟고 위로 올랐으면서 심지어 이젠 속박하고 해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 여기서 지내. 복수할 기회가 있을 거야.”
“무슨 기회?”
“음… 나중에 다시 알려 줄게.”
제민이 놀란 투로 묻자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만 말했다. 그러고는 제민에게 이곳에서 지낼 다른 이유도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게다가 지금 떠나면 초빙풍 성격상 널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거야. 혈혈단신 여인 혼자 있다가는 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야. 유씨 가문에서 너를 집안에 들이는 데 동의했다는 걸 잊지 마. 그러니 초빙풍이 널 상대할 때 유씨 가문에서 도와줄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돼.”
제민은 엽연채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내가 여기서 계속 지내면 너에게 더 폐를 끼치게 될 거야.”
“별거 아냐. 그게 뭐 대수라고.”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넌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해. 내 안목도 믿어야 하고.”
제민은 일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일단 여기서 지내! 정 마음이 불편하면 나한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줘. 게다가 며칠 후면 우리 어머니가 돌아오실 텐데 혼자서 여종들하고만 이곳에서 지내시면 많이 쓸쓸해하실 거야. 네가 나 대신 어머니와 함께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아.”
엽연채가 이리 덧붙이자 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그들은 이야기를 하며 교자를 빚었다. 잠시 후, 그들은 무려 커다란 접시를 세 개나 채울 양을 빚어냈다. 제민은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가서 직접 교자를 쪘다.
교자가 다 쪄지자 시간이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
제민과 여종은 교자가 담긴 커다란 접시 두 개를 들고 돌아와 작은 원탁 위에 올렸다.
“먹자!”
“응.”
엽연채는 추길과 혜연을 불러 자리에 앉혔다. 양이 워낙 많아 여종과 어멈에게도 나눠 준 다음, 네 사람은 원탁에 둘러앉아 교자를 맛보기 시작했다. 엽연채와 추길, 혜연은 신이 나서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민의 동작이 점점 느려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제민은 이미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눈시울도 조금 붉어져 있었다.
제민은 과거 초빙풍과 함께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집안은 너무도 가난해서 춘절을 쇨 때만 교자를 먹을 수 있었다. 나중에 자신이 바둑 내기를 하고 노점을 펼치고 나서야 적게나마 돈을 만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돈은 고이 챙겨 뒀다가 스승에게 사례금으로 주라고 초빙풍에게 건넸다. 이후, 그가 휴가를 내고 돌아올 때마다 저는 부추 계란 소와 소고기 소가 들어간 교자를 빚었다.
초빙풍은 특히 소고기를 좋아했는데 소고기는 너무 비싸 소고기 교자는 다섯 개만 빚었고 전부 그에게 주었다. 자신은 부추 계란 소가 들어간 교자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제민은 다 먹지 못할 소고기 교자들을 쳐다보더니 교자를 하나씩 옆에 있는 접시 위로 옮겼다. 지금 이렇듯 소고기 교자가 많이 있지만 그는 더 이상 교자를 먹으러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난… 배가 부르네. 천천히들 먹어.”
제민은 미소를 지은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추길은 그녀가 문밖으로 나가 회랑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염려했다.
“왜 저러는 거예요? 설마 또 그 쓰레기 같은 사내가 떠오른 걸까요? 미련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추길이 빈정거리는 눈빛을 보이자 엽연채는 그녀를 쏘아보며 따끔하게 말했다.
“넌 18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모르는구나? 지금 초빙풍이 어떻든 간에 함께한 18년이라는 세월 동안은 매 순간이 진심이었을 게다. 그리 깊었던 정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지우고 잊을 수 있겠니?”
제민이 초빙풍을 사랑하는 건 이미 그녀에게 습관이 되었고 인생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길을 걷다가 그가 좋아하는 걸 보거나 그가 갖고 싶어 했던 물건을 보면 저도 모르게 그것들을 모으려고 했다.
지금 초빙풍이 얼마나 쓰레기같이 굴든 간에 그간의 감정과 겪어 온 시간은 모두 실제로 존재했었다. 그러니 그가 쓰레기 같은 사내라고 해서 그 모든 걸 송두리째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설령 정말로 잊으려 한다 해도 시간이 충분히 지나야 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