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화
유곡요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 유씨 가문을 위해 희생했는데… 그걸로는 아직 부족하나 보죠?”
그렇다. 이미 가문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다. 그런데 어째서 또 이런 억울함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유 대부인도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는 유곡요가 가난한 집안의 사내에게 시집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유 재상의 결정이었기에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 대부인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강가는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는데 적어도 시집에서 감히 며느리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장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더 수준 높은 집안에 시집갔을 때만 겪게 되는 억울함을 겪어야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참을 수밖에 없다!”
유 대부인이 딸을 다독였다.
“게다가 그 여인은 대를 이을 아이도 낳지 못한다.”
“부군의 마음이 전부 그 농가 소녀에게 향해 있단 말이에요.”
그리 말하는 유곡요는 불쑥 혐오감이 치솟아 몹시 괴로웠다.
“부군은 원래부터 그 농가 소녀와 정을 나눈 사이였어요. 그런데 이제 와 그 농가 소녀를 첩실로 삼으려고 하니 미안해서 달려갔던 거예요.”
유 대부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지지 못할수록 더욱더 탐내는 것이 사내들의 저열한 근성이다. 일단은 네 부군의 뜻에 따라주려무나. 몇 년 지나고 나면 그 여인도 나이가 들어 미색을 잃을 텐데, 그때 가서도 네 부군이 그 여인을 지켜 주겠느냐. 총애를 잃게 될 거고 대를 이을 아들도 없을 테니, 네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게다.”
“마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여매는 쭈뼛거리며 유곡요를 힐끔 쳐다봤다.
유곡요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한단 말인가? 5년? 아니면 10년? 자신이 왜 이런 일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옥황상제에게 시집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분명 자신이 그에게 강가한 것이고, 그가 신분이 높은 자신에게 장가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최고의 명문가 규수였다. 본래라면 원하는 누구에게든 시집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와 혼인을 해 이렇게 된 것이었다.
자신은 가진 건 쥐뿔도 없는 하찮은 전여에게 시집갔을 뿐이고, 그는 이편의 친정에서 밀어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왜 자신이 이런 억울함을 견디며 굽혀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에 이보다 더 황당무계한 일이 있을까?
이건 체면을 땅에 집어 던지고선 마구 짓밟는 일 아닌가? 유곡요는 죽어도 이런 일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요아야, 네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거 이 어미도 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미 물러설 길이 없다.”
유 대부인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처첩을 거느리지 않는 사내가 어디 있겠느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익숙해질 게다. 잘 꾸려 나가 보거라. 행복한 삶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거란다.”
유곡요는 표정이 굳어졌고 이어 이를 지르물었다. 어머니의 말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리게 저를 몰았다. 대체 자신이 왜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님. 아씨의 부군께서 오셨습니다.”
모녀는 깜짝 놀랐고 유 대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안으로 들라 하거라.”
잠시 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훤칠한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초빙풍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더니 유 대부인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장모님을 뵙니다.”
유 대부인의 시선은 살짝 위로 향하더니 눈앞에 있는 젊은 사내에게 꽂혔다. 그는 온화하고 기품이 느껴지며 재능이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고, 대나무 문양이 들어간 흰색 도포를 입고 있어 준수한 외모와 고결한 분위기가 한층 더 돋보였다.
그러자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던 그녀의 분노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여인 문제만 빼면 사위는 다른 부분에선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 일어나게!”
유 대부인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장모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초빙풍은 다시 읍하며 말했다.
“부인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습니다.”
유 대부인은 노여움이 한층 가셨다. 보아하니 그의 마음속에 그래도 딸의 자리가 조금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 여인을 쫓아내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래. 그럼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 보거라.”
유 대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초빙풍은 또 읍하더니 그제야 유곡요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인, 억울한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우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유곡요는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초빙풍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내디디며 밖으로 나갔다.
부부는 수화문에서 마차에 올랐고 천천히 유씨 가문을 나왔다.
마차 안은 비좁았고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초빙풍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넋을 놓고 있었다.
방금 전 그의 부드러운 표정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았던 유곡요는 그의 멍한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또 가슴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여인을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며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감정을 억누르려고 할수록 되레 더욱더 괴로울 뿐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가 자신의 혼인 상대가 이 사내일 거라고 알려 줬을 때, 자신은 그에게 꽤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처첩을 거느리고 사는 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자신이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이고 강가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여인과 수많은 첩실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농가 소녀만은 안 돼.’
유곡요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고 탐탁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강과 바다를 뒤엎을 듯 세찬 파도가 일어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 * *
이날은 아침부터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그러다가 이슬비로 변하더니 쉼 없이 부슬부슬 내렸다.
엽연채는 흰색 내의를 입은 채로 침실에서 나와 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바라봤다.
추길은 그녀 뒤에 서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아. 오늘 풍화루風和樓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됐네요.”
“못 갈 게 뭐 있어?”
엽연채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붉은 입술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면 되지. 아직 새로 산 우산을 펼쳐 보지도 못했잖아. 비가 와서 외출을 안 할 거면 우산은 사서 뭐 해. 어서 머리를 빗어 주렴. 준비하고 밖에 나가자꾸나.”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엽연채가 화장대 앞에 앉자 추길은 재빠르게 그녀의 머리를 빗어 묶어 주었고 채비를 마친 후 함께 문을 나섰다.
엽연채는 지우산紙雨傘(기름 먹인 종이우산)을 펼쳐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거리를 걸어 풍화루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다시 우산을 펼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가씨…….”
그때, 혜연이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엽연채를 불렀고 눈앞의 광경을 목격한 엽연채도 놀라서 어리둥절했다.
추씨 가문 대문 앞에 옻칠한 크고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아담하고 매끈한 몸매를 가진 붉은 옷의 여인이 복숭아꽃 문양이 들어간 지우산을 쓰고 이슬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엽연채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부인이었다. 그녀는 은사가 섞인 흰색 꽃문양이 들어간 붉은색 적삼과 덩굴 문양이 들어간 갈색 운금 마면군을 입고 있었다. 작고 갸름한 얼굴로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유곡요였다.
엽연채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 소저.”
혼사에 그런 착오가 생겼으니 초 부인이라고 부르기가 곤란했다. 괜히 상대의 심사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 싶었다.
유곡요는 냉담한 표정으로 엽연채에게 답례했다.
“주 부인.”
“소저. 이곳에는 어쩐 일로…….”
엽연채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사실 유곡요가 이곳에 온 목적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곤경에 처해 있는 유곡요의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힘들게 먼저 말을 꺼내지 않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제민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있나요?”
유곡요는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저가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알아봤다는 거 아닌가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고, 그녀의 무심한 말투는 유곡요의 노여움에 기름을 부었다.
유곡요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추궁했다.
“왜 제민을 도와주는 겁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엽연채는 무덤덤하게 대꾸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유곡요는 낯빛이 확 변했다. 그녀는 초빙풍이 기어코 제민을 첩실로 들이려고 하고 할아버지조차 제민을 집으로 들이는 데 동의했음이 재차 떠올랐다. 어머니도 제민을 집으로 들이라며 저를 타일렀다. 심지어 이제 엽연채마저도 제민을 돕고 있었다.
“왜 하나같이 전부 제민을 도우려는 거죠?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예요?”
엽연채는 유곡요가 냉소를 짓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소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다고요? 하하.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소저는 절 도와주지 않는 거예요?”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하는 유곡요의 모습은 고우면서도 애처로워 보였다.
“혼례식 때 제가 직접 소저에게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괜찮은 사이라고 생각해서 소저를 초대한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소저는 되레 제민을 돕는 겁니까? 그 사람이 절 업신여기도록 돕고 있잖아요!”
“전 결코 제민이 소저를 업신여기도록 도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민도 소저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적이 없고요.
크게 보면 제민과 소저는 같은 처지입니다. 초빙풍은 제민을 밀어붙여 초부로 들어오게 하려고 하고 유씨 가문도 아마 제민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저는 그걸 원치 않고 제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에 유곡요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 이미 소저를 도왔습니다. 미안해요. 이제 전 아무런 힘이 되어 드릴 수가 없네요.”
엽연채는 그리 덧붙이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유곡요가 엽연채의 팔뚝을 확 붙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는 지금 악인을 돕는 겁니다!”
“전 제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만 합니다.”
엽연채는 냉담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게다가 소저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제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지금껏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소저가 제일 잘 알 겁니다.
지금 소저의 처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굽니까? 초빙풍과 유씨 가문, 그리고 소저 본인입니다. 제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저의 선택이 무엇이든 간에 소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다른 이의 도움은 그저 미미할 뿐이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스스로 활로를 찾아야만 합니다.”
엽연채는 말을 마치고는 홱 돌아섰다.
유곡요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빗속에 서 있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활로? 눈앞에 펼쳐진 게 바로 내 활로예요!”
“정 못 살겠다 싶으면 이혼하세요!”
저 멀리 비안개 속에서 엽연채의 외침이 들려왔다. 유곡요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멍하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자신이 왜 이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왜 순결을 잃고도 지금 이런 너절한 신세가 되었느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