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75화 (375/858)

제375화

“무슨 의도로 그런 겁니까?”

유곡요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초빙풍의 부드럽고 점잖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혼례식에서 분명 그 소녀가 부군께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부군이 직접 그 소녀에게 달려간 겁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 여인이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걸 달갑게 여기는 겁니까? 혹시…….”

유곡요는 혼례식 당일의 상황이 다시 떠오르자 오한이 느껴졌다.

“혹시… 부군께서 그 소녀를 가둬 놨던 겁니까? 혼례식 당일에 그 소녀는 정말로 부군과 깨끗이 인연을 끊으려고 왔던 겁니까?”

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확신이 들었지만, 그가 부인하며 적당히 변명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초빙풍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부인, 전 평생 부인에게 잘할 겁니다. 하지만 민이는… 부인과 저의 혼사에는 원래부터 그 아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곡요는 멍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원래부터… 포함되어 있었다니요?”

초빙풍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민이는 제 정혼녀였어요. 소저를 알기 전부터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아이를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님께서 저와 혼사에 대해 상의하실 때, 그 아이를 제가 거두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순간 유곡요의 머릿속에선 ‘쾅’ 하고 굉음이 울렸고 갑자기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이런 일에 동의를 하셨단 말인가!

“그럴 리가요! 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안 믿어요!”

유곡요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돌아서서 성큼성큼 가 버렸다.

“아가씨…….”

여매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초빙풍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 삶은 늘 순탄하지 않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도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갔다.

“나리,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사동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방금 막 귀가했는데 또 밖으로 나가려 한단 말인가?

“유씨 가문으로 가자.”

초빙풍은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편, 유곡요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수화문을 나선 뒤 곧장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유씨 가문으로 가자고 일렀다.

이각쯤 지나 유곡요는 유씨 가문에 도착했다. 유곡요가 측문으로 들어서자 여종과 어멈들이 잇달아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예를 올리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유곡요는 단아한 얼굴을 완전히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일으키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종과 어멈들은 화가 잔뜩 나 싸늘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이틀 전 그녀와 초빙풍이 함께 돌아왔을 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행복에 흠뻑 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수화문을 나선 유곡요는 곧장 유 재상의 서재로 향했다. 한데 서재 문 앞에 도착하자 시동 하나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아씨, 오셨습니까? 하지만 지금 나리께서 다른 대인들과 조정의 정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중요한 일이시면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썩 비키거라!”

유곡요는 써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평소 그녀는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았고 이런 상황에서는 늘 예의 바르게 자리를 뜨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 시동을 홱 밀쳐 버렸다.

시동은 평소 단정하고 얌전하던 아가씨가 갑자기 자신을 밀치며 다짜고짜 안으로 들이닥치려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씨! 아씨!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시동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가 유곡요를 따라잡았을 때 이미 그녀는 서재 안에 들어선 후였다.

널찍한 서재 안, 유 재상은 녹나무로 만든 긴 책상 앞에 앉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아래엔 나이대가 다양한 사내들 네다섯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씨 집안의 문객이자 유 재상의 참모들이었다.

“그쪽에서 박주를 쳐부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옥안관 쪽은…….”

머리에 파란색 두건을 쓰고 있는 검은 옷의 노인이 이리 말하고 있는데, 이때 ‘쿵’ 소리가 났다. 동시에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부인이 안으로 들이닥치자 유 재상과 참모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두건을 쓴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유 재상의 인자한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요아야.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린 지금 조정의 정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나가거라!”

“싫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늘 반드시 제게 분명히 해명해 주셔야 합니다.”

유곡요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 재상의 낯빛이 몹시 가매졌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손녀가 안으로 들이닥쳐 소란을 피우다니. 이는 그의 체면뿐만 아니라 유씨 가문 체면까지 깎는, 대단히 버릇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란을 피웠는데 쫓아내 버리면 되레 옹색하게 보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심복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는 했다.

유 재상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 손녀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그가 참모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얼른 공수하고는 말없이 물러갔다.

“할아버지,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저희 혼사에 그 농가 소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유곡요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전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건 이 할아비가 승낙한 일이다!”

유 재상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초빙풍이 제시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왜 승낙하셨습니까?”

유곡요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몰아댔다.

“주도권은 저희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저희에게 부탁을 해야 맞는 거잖아요! 세상에 다른 사내는 없습니까? 그 사람이 정혼녀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사내를 찾아보면 됐잖아요!

어차피 전 강가하는 건데, 한미한 집안의 자제는 발에 차일 정도로 많잖아요.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일에 연관되지 않은 사람을 고르지 못한 겁니까!”

“그만하거라!”

유 재상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고 어진 얼굴엔 순간 서릿발이 섰다.

“그래 넌 강가했다. 그런데 네가 강가한다고 이리 쉽게 적합한 상대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재능, 나이, 용모, 키, 집안 배경, 부모 심지어 친척까지 꼼꼼하게 따지며 고르다 보면 몇 명이나 남겠느냐?

그리고 골랐다고 해도 그쪽에서 이런 혼인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넌 이미 나이도 많은데 몇 년을 더 늦출 수 있겠느냐?”

평범한 백성들 중에서 고른다면 당연히 선택지가 많았다. 하지만 오만한 유 재상이 어찌 평범한 이를 손녀사위로 달갑게 맞이하려고 하겠는가? 아무리 못해도 진사 출신은 되어야 그의 눈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진사로 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사실 유 재상은 주운환과 진지항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이미 아내가 있고, 진지항은 명문가의 적자이니 데릴사위와 비슷한 존재로 유씨 가문에 장가를 올 리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초빙풍을 고른 것이었다.

초빙풍은 이십 대 초반인데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고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형제조차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전여이니 주운환만큼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모도 출중하고 기품이 흘렀다.

건사해야 할 부모 형제가 없으니 유씨 가문이 그를 잘 키우면 나중에 초빙풍도 유씨 가문에 양자로 보낸 아이를 더욱 성심성의껏 도와줄 것이었다.

초빙풍은 그야말로 유씨 가문을 위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걸리는 점이라고 해 봐야 사소한 정혼녀 문제에 불과했다. 원래는 그 정혼녀를 쫓아 버릴 생각이었으나 초빙풍이 그녀에게 품은 정이 생각보다 깊었다. 유 재상은 사내가 처첩을 거느리고 사는 건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유 재상의 말을 들은 유곡요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고작 첩실에 불과한데 이리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느냐? 이리 꼴사납게 소란을 피워야겠느냐?”

유 재상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자애로운 분위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매서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전에 배웠던 『여덕女德』과 『여훈女訓』은 어디로 간 것이냐? 지금껏 익힌 규범은 어디로 갔느냐?”

그의 훈계를 듣고 있던 유곡요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 할아비가 어찌 네가 손해 보는 꼴을 보고 있겠느냐? 널 위해 이미 적절히 처리해 두었다.”

그리 말하며 유 재상도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 여인은 집안에 들어와 봤자 첩실이다. 빙풍도 이에 동의했고 그 여인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만드는 약을 먹여 대를 잇지 못하게 할 거라고 했다. 너와 우리 유씨 가문에 어떤 위협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나가 보거라!”

유곡요는 넋이 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유 재상이 말한 ‘적절한 처리’를 듣고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얼굴로 돌아서더니 한 걸음씩 내디디며 밖으로 나갔다.

서재가 위치한 뜰의 대문을 나서자 여매와 마흔 가까이 되어 보이는 한 귀부인이 보였다. 유곡요와 어느 정도 닮은 얼굴의 이 귀부인은 바로 유곡요의 어머니인 유 대부인이었다.

딸의 창백한 얼굴과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니 유 대부인은 가슴이 미어져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요아야……. 가자꾸나. 일단 돌아가자꾸나.”

그녀는 그리 말하며 유곡요를 끌고 그곳을 떠났다.

유곡요는 얼떨떨한 느낌이 들 뿐이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유 대부인에게 이끌려 자신의 출가 전 규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온 유곡요는 멍한 얼굴로 탑상에 앉았다.

유 대부인이 먼저 운을 뗐다.

“네게 억울한 일이 생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대부인의 말투에선 분노와 원망이 느껴졌다. 어느 누가 자기 딸이 이런 손해를 보는 걸 바라겠는가.

유씨 가문은 바로 윗대에 대를 이을 아들이 많은 편이었다. 유 재상에겐 적자와 서자를 합해 총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형제 다섯이 함께 호수로 유람을 가면서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모두 고주망태가 되었는데 그만 배에 불이 났던 것이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다섯 형제 중 둘은 불에 타 죽었고 셋은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정신이 들어 호수에 뛰어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익사하고 말았다.

유씨 가문은 이렇게 허무하게 대가 끊기게 되었고 남은 건 손녀 세 명뿐이었다. 그리하여 적장녀인 유곡요가 순식간에 가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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