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74화 (374/858)

제374화

초빙풍은 차가운 얼굴로 수화문을 넘어서더니 곧장 대문으로 향했다. 뒤에서 따라가던 사동은 얼음 같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사동은 초빙풍과 유곡요가 정혼할 때 유 재상이 준 돈으로 초빙풍이 직접 사서 데리고 온 이였다.

“나리, 결정을 하셨으면 옥패를 방금 전 그 농가 소녀에게 돌려주시지요. 나리는 이미 마님을 아내로 맞이하셨으니 당연히…….”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딱 멈추었다. 초빙풍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동은 사색이 되었다.

“네가 뭘 안다고!”

초빙풍은 냉랭한 목소리로 그리 면박하고는 소매를 홱 뿌리치며 먼저 가 버렸다.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느끼는 무력감은 겪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그렇게 억울함을 참아 가며 한평생을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밑바닥 출신이고 죽마고우였다. 서로 의지하고 보듬으며 사랑을 나눴던 연인이었다.

과거 평등한 입장이었던 두 사람이지만, 이제 자신은 성공하여 지위가 높아진 데 반해 그녀는 여전히 저 아래에서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돌아갈 곳도 없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암담한 세상 속에서 힘들게 일하며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쪼들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호의호식하며 지내는데 그녀는 여전히 고생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 언젠가 그녀는 무너질 것이고 고생을 견디지 못해 자신에게 의탁하러 오리라.

지금 제민은 일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뿐인 게 분명했다. 본인을 거둬 준 엽연채가 있기에 믿는 구석이 있어 진정한 두려움을 모르는 것뿐.

엽연채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민은 감히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고 반드시 곁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러니 주운환이 패배하기만 하면 제민 역시 의지할 곳을 잃게 되어 제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 * *

초빙풍이 떠난 후, 제민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민 소저!”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어째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를 보세요. 혼례식 당일에 신랑이 사촌 여동생과 도망을 가는 바람에 신랑에게 버림받고 체면도 깎이고 말았어요. 아가씨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요! 그래도 즐겁고 소탈하게 살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제민은 눈물을 흘리며 대꾸했다.

“소저가 대범하게 그분을 놓아주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건…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을 당했는데 어찌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선뜻 그 사내의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추길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미간만 찡그릴 뿐이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제민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비록 지금 자신은 존엄을 잃고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적어도 초부에서 지내며 남에게 통제를 받고 휘둘리지 않아도 됐다. 그곳에선 목숨을 잃게 되면 가진 모든 존엄성 역시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제민이 허리를 펴다가 휘청거리자 혜연이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저. 몸이… 너무 뜨거워요!”

혜연은 제민을 부축해 주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민의 팔뚝을 만져 보니 펄펄 끓는 수준이었다.

“방금 전에 내가 소저를 부축해서 나올 때도 열이 나고 있었어. 하지만 초빙풍이 왔는데 만나지 않을 수는 없잖아?”

추길은 그리 말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생기는 열은 그리 쉽게 떨어지지 않아요. 떨어졌다고 해도 다시 열이 나기 쉽죠. 일단 돌아가서 쉬어요.”

엽연채는 이리 말하며 제민의 손을 잡고 곁채로 돌아갔다. 제민은 의식이 몽롱해졌고, 침상에 눕자 다시 정신을 잃었다.

요 며칠 동안 매일 오후 미시未時(오후 1~3시)면 의원이 집으로 와서 제민을 진맥했다. 그런데 지금 제민이 또 정신을 잃자 엽연채는 얼른 추길에게 의원을 모셔오라고 했다.

* * *

그 시각 초부.

본채의 유곡요는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문양이 삼면에 조각되어 있는 기다란 박달나무 탑상에 앉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매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검은색 옷을 입은 한 시동이 고개를 숙인 채 유곡요 앞에 서 있었다.

“나가 봐라!”

유곡요가 싸늘한 목소리로 이르자 시동은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돌아서서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 안은 순식간에 무겁고도 묘한 정적이 감돌았고, 여매는 좀 전보다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유곡요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매화 문양이 들어간 항탁 위에 놓인 청화 찻잔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나 손이 떨리는 바람에 찻잔과 찻잔 뚜껑이 서로 부딪히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곡요는 두 눈을 부릅뜨고 파르르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비통하고 억울하며 분노가 더욱 치밀 뿐이었다. 이런 괴롭고 아니꼬운 감정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코까지 북받쳐 올랐고 이마까지 치밀어 올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 콧날이 시큰거리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유곡요는 더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는지 손에 든 찻잔을 집어 던졌다. 큰 소리와 함께 찻잔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용서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황당하고 가당찮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유곡요는 귀를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아가씨…….”

유곡요가 눈물을 흘리자 여매도 콧날이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도 너무나 억울하다고 느꼈다.

혼례식이 있던 그날, 갑자기 웬 여인이 뛰어 들어와 혼례식에서 난동을 부린 탓에 유곡요는 이미 충분히 망신을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 재상에게 한 소리를 듣자 유곡요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초빙풍이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을 받아들였고 지난 일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초야를 치른 후 유곡요는 소녀에서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는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며 겸손하게 행동했다. 밤사이 부부가 애정을 나누고 나니 유곡요는 자신이 이미 그를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보니 그는 점잖고 고상하며 말에서도 품위가 느껴져 신혼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또 그 농가 소녀를 찾아갈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걸까? 아직도 그 농가 소녀를 잊지 못하는 걸까?”

유곡요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고 조그만 얼굴마저 일그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매도 자신의 상전만큼이나 답답했으나 그래도 좋게 무마하려 했다.

“어쩌면 오해가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오해? 그 소녀를 잊지 못한 게 아니라면 찾아갈 필요까지 있었겠느냐…….”

유곡요는 그리 말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내가 어찌 그 부분을 간과했을까. 그 농가 소녀와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면 왜 그 소녀를 집안에 가둬 두려고 했겠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유곡요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가씨……. 뭐, 뭐 하시려고요?”

여매는 낯빛이 확 변했다.

“분명하게 물어봐야겠다.”

유곡요는 그리 말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매는 기겁해 얼른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오해일 뿐이라면 어쩌시려고요. 분명 부부 간의 감정을 해칠 겁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유곡요는 머뭇거리며 더는 걸음을 떼지 못했고 수선화 문양이 들어간 손수건을 꽉 움켜쥐며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요 며칠 동안 느꼈던 달콤한 기분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그와 이렇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가자!”

유곡요는 그리 말하며 밖으로 걸어갔다.

바깥뜰에 있는 초빙풍의 서재에 도착하니 마침 밖에서 들어오는 초빙풍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낭하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왔군요.”

“네.”

제민의 일로 기분이 좋지 않던 초빙풍은 유곡요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복잡한 기분이 들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한때 이렇게 사는 꿈을 꿨었다.

마을에서 여러 해의 여름날을 보낼 때, 제민과 함께 초가집 앞에 쌓인 커다란 짚더미에 누워 있곤 했다.

그때 제민은 이런 말을 했었다.

“오라버니. 전 더 이상 비가 새는 이런 초가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꼭 엄청 큰 집을 사 줘야 돼요!”

“그래.”

자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생각했다.

“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큰 집이여야 돼요!”

“그래!”

“우리 마을 대부호의 집보다도 큰 집 말이에요!”

“알겠다!”

이제 마침내 자신은 아주 큰 집을 사게 되었다. 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기둥과 대들보는 채화彩畵로 장식되어 있으며, 마을 대부호의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집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서서 그를 맞이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곡요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꿈을 실현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 다 제민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걸 모른단 말인가! 자신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디 갔었어요?”

유곡요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곡요의 단아한 얼굴에는 싸늘함이 묻어 있고 눈빛에서도 차갑고 매서운 기운이 느껴지자 초빙풍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대꾸했다.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러 갔었습니다.”

유곡요는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그의 모습을 보자 노여움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그 농가 소녀를 만나는 걸 말하는 건가요?”

그녀는 결국 언성을 높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초빙풍의 준수한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절 미행한 겁니까?”

그러자 여매는 낯빛이 확 변했다. 아가씨의 부군이 오해를 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황이 좋지 않게 변했다.

여매가 황급히 해명했다.

“아가씨는 나리를 미행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그 여인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사람을 시켜 그 여인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 가 계신 나리의 모습을 보게 된 겁니다.”

마지막 말을 꺼내고 나니 여매는 분통이 터지고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