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73화 (373/858)

제373화

초빙풍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넌 나를 사랑하고 나도 널 사랑하는데 우린 계속 함께할 수 없는 게냐? 그저 집안에 한 사람이 더 늘었을 뿐이다! 전시가 끝난 후 유 재상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난 그분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그분께서도 널 들이는 데 동의하셨다.

게다가 우린 유씨 가문에서 지내지 않아도 된다. 처음엔 네가 고달플 수 있겠지만 내가 출세해서 권력과 힘을 갖게 되면 아무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할 거다. 네가 몇 년만 참으면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게야.”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다니 정말 용기가 가상하네요! 오라버니는 내가 동의하지 않을 거란 걸 뻔히 알고 있었죠. 아니면 왜 그런 파렴치한 방법을 썼겠어요? 나에게 약을 먹여 쓰러뜨린 다음 초부에 가둬요?”

제민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오라버니는 유씨 가문에 빌붙고 싶어 첩실 자리를 구걸해 내게 준 거잖아요! 내가 오라버니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이라도 해야 할까요?”

그 말에 초빙풍은 낯빛이 확 변했다.

“난 결코 네게 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혼사가 눈앞에 임박했으니 소동이 일어나는 게 싫어 그런 하책을 쓰고 만 것이다! 혼례가 끝나면 네게 설명하려고 했다…….

하인들이 널 다치게 한 건 결코 내 뜻이 아니었다. 아마 네가 너무 난리를 쳐서 어쩔 수 없이 네게 손을 댄 것 같다. 그 하인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단다.”

제민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오라버니.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예요? 마을과 읍에서 지낼 때는 오라버니가 막 수재로 합격했을 때죠. 그때 오라버니는 제가 바둑 내기를 해서 벌어들인 돈은 떳떳한 돈이 아니고 바둑 내기는 고상한 행동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 더 이상 바둑 내기를 하러 가지 않고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며 노점상을 했죠.

그런데 지금 오라버니는 혼약을 깨고 앞날을 위해 권세가에게 빌붙고 있어요. 이런 행동은 고상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초빙풍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유 재상이 내민 손을 잡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그런 건 버리지 않았는가? 그는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받았다.

“민아,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넌 어째서 아직도 이리 순진한 것이냐? 넌 아직도 가난이 두렵지 않은 게냐? 우리가 어렸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은 것이냐?

처음 도성에 왔을 때 감히 바둑 한 판 이기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건 잊은 게냐? 우린 그저 분수에 맞춰 조용히 노점을 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불가능했던 걸 잊어버린 게냐?

그게 바로 현실이고 권세다! 난 더 이상 남에게 굽히고 살고 싶지도, 감히 바둑 한 판 이기는 것조차 불가능한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그럼 노력하면 되잖아요!”

제민은 전에 그와 함께 겪었던 고생스러운 나날이 다시 떠오르자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응수했다.

“우리 함께 노력해요! 그리 많은 서책은 뭣 하러 읽은 거예요? 그리 고생해서 공명을 얻으면 뭐 해요?”

초빙풍도 콧등이 시큰거렸지만 결국 냉소를 흘렸다.

“노력만 하면 뭐 하느냐! 난 줄곧 스스로를 천부적 자질이 뛰어난 천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결국…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봐라. 장원 급제자는 열여덟 살이고 탐화는 스물네 살이다!

내가 진사로 합격하고 전여가 되었다고 해도 한림원에서는 내 존재를 드러낼 기회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기회가 없어서 한림원에 파묻혀 지내며 아무 성과도 없이 3년을 보낸다. 그러다 결국 타지에서 7품 소관으로 지내며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느냐? 넌 어째서 내 생각은 안 하는 게냐?”

그렇다. 그는 내내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해 왔다. 읍의 스승은 그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며 항상 그를 치켜세웠고, 글공부에 재능이 있는 인재라 분명 전시에 급제할 것이며 머지않아 고관에 임명될 거라고 격려했다.

초빙풍은 겸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스승과 동창들의 눈빛 때문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후 그는 시험을 보러 도성에 왔다. 그때는 힘들고 억울한 일을 아무리 많이 겪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모든 건 금방 지나갈 일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니까.

조금만 더 견디면 지나갈 것이고 가난은 그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시에 급제하는 날이 바로 자신이 빛을 보게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시에서 겨우 9등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초빙풍과 함께 시험을 보러 온 서생들은 모두 그에게 술을 권하며 그가 정말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축하해 줬지만,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회시에서 장원 급제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기쁠 수 있겠는가.

그때 그는 술집 안에 앉아서 오고 가는 손님들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자신은 그저 수많은 손님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제야 자신도 그저 무수한 장삼이사張三李四(장씨의 셋째와 이씨의 넷째, 즉 평범한 사람들을 뜻함) 중 하나임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이번 과거 시험의 조연에 불과했다. 가장 눈부시고 제일 눈길을 끄는 사람도 아니며 가장 특출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빛나 보이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했다. 그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말이다. 전시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기만 하면 이번 과거 시험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시에서 전력을 다했다. 그 얇디얇은 답안지에 자신이 가진 모든 실력을 발휘했고 자신의 재능을 전부 드러냈다. 그럼에도 결국 고작 4등인 전여로 붙었을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결과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황제가 장원의 답안지를 읽어 주는 순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기가 막힐 정도로 대단한 글이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구나, 이런 발상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와 비교해 보면 자신이 쓴 글은 정말이지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제야 그는 천재란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장원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무력감이 초빙풍을 미치도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은 그저 수많은 범인凡人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대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슴속에 커다란 포부와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지만, 결국 평범한 진사들 중 하나가 되었고, 재능이 흘러넘치는 인재가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일갑과 이갑 안에 든 진사들 중 그의 출신이 가장 보잘것없었다. 재능은 이미 일갑에 든 진사들에게 밀렸는데, 여기에 출신과 가세마저 밀리면 어떻게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작년에 적성대에서 열린 바둑 대결에서 네가 졌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지? 그때 넌 바로 유곡요에게 졌었다. 네가 왜 졌는지 아느냐? 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히 이길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간에 넌 졌다! 유곡요에게 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난… 뜻밖에도 유씨 가문 눈에 들게 되었고 내가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바로 유곡요다! 유곡요가 이겼기 때문이지!”

초빙풍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 바둑 실력이 유곡요보다 뛰어나면 뭐 하느냐? 너에겐 영원히 빛을 볼 날이 없을 것이다!”

유곡요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걸 그녀는 그에게 줄 수 없었다.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면 뭐 합니까? 그래 봤자 결국 권세가에 빌붙고 싶다는 이야기잖아요.”

엽연채가 끼어들어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권세가에게 빌붙고 싶은 게 뭐 어때서 그럽니까?”

초빙풍은 두 눈을 부릅뜨고 싸늘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봤다.

“뭘 비웃고 싶은 거죠? 뭘 경멸하고 싶은 건데요? 당신은 후부의 적녀였고 명문가의 후손이라 적어도 호의호식하면서 자랐지 않습니까.

지금 주씨 가문이 몰락한 가문이라고 불린다 해도 생계를 걱정하지는 않아요.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시중도 받죠! 그런 당신이 어떻게 우리처럼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고결하고 고상한 성품도 권세를 쥐어야만 가질 자격이 생기는 겁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가질 자격이 없다고요!”

“가질 수 있는 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갖고만 싶다면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게 민이에게 뭘 가져다줬는데요? 가난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거였죠! 앞서 말했다시피 바둑 한 판조차 감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분한 마음을 참고 억울해할 수밖에요!”

엽연채에게 재차 반박하는 초빙풍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제민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한발 물러서고 내가 벼락출세만 하면 우린 금세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게다! 넌 돈을 제일 좋아하지 않느냐? 전에 항상 출세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제민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으나 이내 맑고 깨끗한 커다란 두 눈을 크게 뜨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요! 과거의 전 돈을 아주 좋아했어요. 돈만 보면 두 눈을 반짝였죠.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이젠 돈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참 모순적이지 않아요? 우리 두 사람 말이에요. 전에 오라버니는 스스로 가장 인품이 고결하다고 여기던 사람이었고 전 가장 속물적이고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잖아요! 늘 오라버니에게 꾸지람을 들었죠!

그런데 이젠 오라버니가 전에 했던 말이 모두 옳았다고 생각해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죠.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전 마침내 오라버니가 가장 바랐던 모습으로 살게 됐고 오라버니가 원했던 그런 모습으로 변했는데, 오라버니는… 절 버렸네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충격을 받은 초빙풍은 넋 나간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봤다. 한 사람은 눈물 때문에 눈앞이 아릿하게 번졌고 또 한 사람은 마음이 철석같이 굳어 버렸다.

“넌 평생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다! 가장 밑바닥에서 살며 영원히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게다.”

초빙풍은 그리 말하고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후회할 게다.”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은 그에게 고상한 분위기를 더해 줬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책 향기가 풍기는 학자 가문의 멋스러운 공자처럼 보였다. 반면 남겨진 제민은 여전히 거무스름한 의복에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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