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2화
정오가 되자 채 마마는 음식을 한 상 차려 놓았다. 식사를 한 뒤 온씨와 엽균은 마차를 타고 능성으로 향했다.
온씨가 떠난 후, 엽연채는 하릴없이 여유를 만끽하며 사나흘을 보냈고, 이따금 서쪽 화원을 거닐기도 했다.
오늘 엽연채는 화원에 가서 커다란 죽순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왔는데, 마침 추길이 두 손에 쟁반을 들고 곁채에서 나오고 있었다. 쟁반엔 닭죽 한 그릇과 교자 한 접시가 올려져 있었는데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데 겨우 이만큼만 먹어요.”
추길이 음식을 들고 걸어왔다.
“감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목이라도 매면 어떡해요?”
추길은 짜증이 났고 제민이 사리분별을 못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연채는 죽순을 품에 안고 작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그날 객줏집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추길이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두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엽연채는 죽순을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추길도 얼른 부뚜막에 쟁반을 내려놓은 뒤 엽연채를 따라갔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사람은 그리 쉽게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제민은 강인한 사람이야.”
엽연채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리 덧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민은 아직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기다린다고요? 뭘요?”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캐묻는데, 혜연이 뜰 입구로 들어왔다. 그녀는 예쁜 서찰 한 장을 손에 들고 걸어오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고했다.
“아가씨께 서찰이 왔습니다.”
엽연채는 붉은색 바탕에 금박 무늬를 넣고 검은 대나무를 그려 넣은 서찰을 건네받았다.
“누가 보낸 겁니까?”
추길이 다가와 물었다.
“이곳에 서찰을 보낼 수 있는 분이면 마님이 아닐까요?”
엽연채는 서찰을 열어 보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구나.”
“왔다니요?”
추길은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듣지 못했다.
엽연채는 들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뫼셔라!”
추길과 혜연은 어리둥절했고 추길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먼저 그 소저를 나오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럴 필요 없다.”
엽연채가 딱 자르자 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수화문을 지나 대문에 도착해 문을 열어 보니 사동 하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혜연은 냉담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들어오시죠.”
“고마워요.”
그 사동은 헤헤 웃으며 오른쪽으로 비켜섰다.
“나리, 이쪽으로 오세요!”
혜연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보니 온화하게 생긴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옅은 대나무 문양과 깔끔한 검은색 테두리가 들어간 은회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은관銀冠을 쓰고 있어 진중하고 고상해 보였다.
혜연은 이 사내가 바로 며칠 전 유씨 가문 여식을 아내로 맞이한 신랑 초빙풍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안으로 드시지요.”
혜연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고 공손하게 몸을 낮추며 안으로 들어가라는 자세를 취했다.
초빙풍은 문으로 들어선 뒤 혜연을 따라갔다. 오른쪽으로 돌아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 보니 도좌倒座(사합원에서 본채와 마주 보는 남향 방)가 죽 늘어선 바깥뜰이 나왔다.
수화문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뜰이 그들을 맞이했다. 동쪽 곁채 앞에는 등받이가 달린 주홍빛 긴 나무 걸상이 자리했고,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거기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소녀는 흰색 바탕에 진홍색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비단 웃옷을 입고 있었는데, 걸상에 가려져 어떤 치마를 입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작고 오밀조밀한 붉은 꽃무늬가 들어간 반투명한 둥글부채를 들고 살살 흔들고 있었고 그녀 앞엔 연녹색 비갑比甲을 입은 여종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초빙풍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앞으로 다가가 소녀에게 공수하고 읍했다.
“주 부인. 요 며칠 동안 저 대신 제민을 돌보아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인사를 마친 초빙풍이 위를 쳐다보자 낭하에 있는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소녀의 머리에 달린 정교하고 아름다운 금색 술은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뿜고 있었고, 그 광채가 드리운 보드라운 피부는 하얗고 투명하면서도 분홍빛이 돌며 윤기가 흘렀다.
그녀가 초빙풍을 향해 눈웃음을 치자 매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이 아리따운 눈웃음에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네.”
엽연채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초빙풍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이 주 부인도 그 남편인 주 공자처럼 아니꼽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제민을 데려가려고 이리 왔습니다.”
이 말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가만히 곁에 있는 여종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연녹색 비갑을 입은 그 여종이 곧장 걸어 내려가 맞은편에 있는 서쪽 곁채로 가서 문을 열어젖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민 소저! 소저! 유씨 가문 사위가 찾아왔어요.”
여종이 자신을 ‘유씨 가문 사위’라고 말하자 초빙풍의 온화한 얼굴은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가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표정이 좀 굳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추길이 서쪽 곁채로 들어간 후 그쪽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동쪽 곁채의 낭하에서 엽연채는 여전히 몸을 기울이고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론 둥글부채를 살살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론 푸른 매실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초빙풍을 자리에 앉히거나 차를 내올 뜻은 전혀 없어 보였다.
초빙풍은 널찍한 정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서 대놓고 무시를 당하자 불쾌하고 난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때, 서쪽 곁채에서 마침내 기척이 들리더니 추길이 간소한 옷차림의 소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소녀의 얼굴에 있던 멍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지만 보라색 자국이 여전히 조금 남아 있었다. 새하얗고 청아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멍이 보이니 조금 섬뜩했고, 창백한 낯빛 때문에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더욱 까맣게 도드라져 보였다.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선연한 그녀의 눈은 전에는 늘 웃음기가 어려 있었고 수많은 별이 그녀의 눈에 담긴 듯 반짝반짝 빛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긴 해도 얼음처럼 차디차 보였고 못에 가득 고인 물처럼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초빙풍은 그녀가 처량한 모습으로 여종의 부축을 받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찌릿했다.
“민아…….”
그는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동쪽 낭하에 있는 엽연채에게 읍하고 말했다.
“주 부인,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민이와 단둘이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엽연채는 ‘픽’ 비웃으며 둥글부채로 입술을 톡 치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제민 소저가 초부에서 그리 오래 있었는데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부족했나요? 그건… 쯧, 됐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고 낭하를 내려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제민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추길을 살짝 밀더니 초빙풍 앞에 서서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선연한 두 눈으로 냉담하게 초빙풍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기에 사람들 앞에서 못하는 거예요? 오라버니가 유씨 가문 사위가 된 건 떳떳한 일이 아니던가요? 떳떳하지 못한 일이 더 있나요?”
제민이 차갑고 갈라진 음성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초빙풍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초빙풍은 온몸을 떨었고 마음이 쓰렸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제민이 이렇게 대범하게 나오자 엽연채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듣기로 했다.
“왜 또 말을 안 하는 거예요?”
제민은 침묵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낯빛이 더욱 하얘졌다.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어째서인지 웃음이 났다.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그럼 옥패를 돌려줘요. 그리고 유씨 가문으로 돌아가 계속 그 댁 사위로 살아요!
전 오라버니의 아내가 아니고 그저 언약만 했던 정혼녀에 불과하니 정혼 증표를 돌려줘요. 그럼 우리 관계는 그걸로 끝이에요. 오라버니가 장가를 가든 제가 시집을 가든 서로 상관하지 않는 거죠! 어서 줘요!”
제민은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가늘고 길었지만 피부는 거칠었다. 바둑을 두기 때문에 손가락이 가늘고 길며 민첩하게 움직였지만, 동시에 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살갗이 깔깔하고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과거 이 두 손으로 사람들과 바둑 내기를 했고, 이 두 손으로 밤낮없이 밖에 나가 노점을 펼치고 물건을 날랐다. 이 모든 건 돈을 벌어 초빙풍의 스승에게 줄 사례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초빙풍은 자신이 전시에 급제하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고 안락한 삶을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젠 그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이 손으로 인연을 끝내려고 했다.
“민아. 너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니?”
초빙풍의 목소리는 냉담하면서도 안타까움이 조금 묻어 있었다.
“날 정말로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정말로 널 버리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건데요?”
결국 참다못한 제민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고 닭똥 같은 눈물이 눈가를 따라 하염없이 뚝뚝 떨어졌다.
초빙풍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제민은 본디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대단히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눈가를 닦았을 뿐, 다시 바쁜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눈물은 흘려 봤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도리어 스스로 나약하고 만만한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할 뿐이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선혈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상처와 약점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초빙풍은 이렇게 상처받은 그녀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민아. 왜 날 이해하지 못하는 거니? 이 모든 건 다 너를 위해서고 우리의 앞날을 위한 거란다! 왜 한 걸음 물러서지 않는 거니? 잘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민은 눈물이 고인 두 눈을 번쩍 뜨고 초빙풍을 쳐다봤다. 사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묻고 싶었고 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