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주묘서는 유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화가 나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 빌어먹을 종자는 곧 그곳에서 죽을 거예요! 그 여인은 제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일부러 말썽을 부려 제 혼삿길을 막은 거예요!
저번에 할머니가 그 여인을 싸고도셨잖아요? 저희가 이 일을 할머니께 알려 드리면 할머니가 뭐라고 하시는지 한번 봐야겠어요!”
그녀가 그리 말하며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진씨는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하더니 얼른 호통을 치며 그녀를 제지했다.
“멈추거라! 가면 안 된다!”
“왜요?”
주묘서는 울분에 차 있었다.
“아직도 네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것이냐?”
진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되물었다.
“지난번에 네 할머니가 했던 말을 잊었나 보구나.”
매씨를 떠올리자 주묘서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왼쪽 얼굴에서 또다시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할머니는 딸과 부귀를 맞바꿔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뿐인가. 기운이 다했으면 그런 줄 알면 되며 사람은 기개를 잃으면 안 된다는 말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엽연채는 그야말로 정의의 투사처럼 행동했으니, 할머니는 엽연채를 나무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점을 깨달은 주묘서는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기개는 무슨. 그 여인은 얼간이고 꼴통이에요! 집안에 화근을 만들고 절 해치려는 여인이란 말이에요.”
“어쨌든 지금 그 계집애를 친정으로 보내 버렸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옷가지를 챙기다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공거로 향했다. 매씨에게 인사하고 떠나기 위해서였다.
공거로 들어가 보니 매씨는 귤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우거진 나무 그늘은 그녀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줬고, 옆에 있는 대리석 탁자 위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엽연채는 다가서서 매씨에게 예를 올렸다.
“할머님. 제가 오늘 외출을 하려고 합니다. 친정에 가서 며칠 지내다 오려고요.”
“가 보거라.”
매씨는 그저 무덤덤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금 날카로운 눈빛으로 위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참, 어제 유씨 가문 쪽에서 무얼 했던 것이냐?”
“한 여인이 부당한 일을 당하기에 제가 나서서 막았습니다.”
엽연채는 그리 답하며 매씨를 쳐다봤다.
“그 유씨 가문 늙은이는 영악한 사람이다.”
매씨는 그저 이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됐으니 이제 가 보거라.”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예, 할머님.”
* * *
장명가에 위치한 추씨 가문 저택.
온씨는 수를 놓고 있고 채 마마는 실을 나누고 있었다. 눈치 빠른 채 마마가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큰아씨께서 오셨네요.”
온씨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정말로 엽연채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았다.
엽연채는 이미 온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온씨는 추길과 혜연 손에 들려 있는 보따리를 쳐다보더니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보따리를 싸서 왔구나!”
“시어머니께서 저보고 이곳에 와서 한동안 지내라고 하셨어요.”
엽연채가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하자 온씨는 버들잎 모양의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쉬워했다.
“이것 참 공교롭게 됐구나. 이 어미는 점심 식사를 한 뒤 외출할 거란다. 네 오라버니와 함께 능성凌城에 갈 거라서 말이다.”
“능성은 갑자기 왜요?”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엽균과 함께 외출이라니. 그리고 능성은 또 왜 가는 것인가? 능성은 도성 바로 옆에 위치한 제2의 수도지만, 딱히 자신들과 연고는 없는 곳이었다.
“능성에 골절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아주 용한 의원이 왔다더구나. 그래서 네 오라버니를 데리고 가 보려는 거다.”
온씨의 대꾸에 엽연채는 입을 살짝 오므렸다. 두 달 동안 엽균의 다리 부상은 거의 치료가 되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걸을 때마다 절뚝거려 걷는 모습이 아주 흉했다.
온씨가 말로는 다리가 부러져도 싸다고 했지만, 어떤 어머니가 정말로 자기 자식이 평생 동안 그러고 사는 꼴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나도 완치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면 뭐라도 해 봐야지. 적어도 저리 흉하게 절뚝거릴 필요는 없잖니.”
말을 잇는 온씨는 어느새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너도 알다시피 그런 명의는 왕진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가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단다.”
“아…….”
엽연채의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아직 상처투성인 제민을 혼자 이곳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더 많은 일이 그녀에게 닥쳐올 테니 도저히 내팽개치고 갈 수 없었다.
“넌 여기 남아서 그 제민이라는 소녀를 돌봐 주거라!”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와 네 오라버니는 그곳에서 며칠만 묵고 올 거야.”
엽연채가 계산을 해 보니 도성에서 능성까지는 대략 두 시진이면 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기대에 부푼 온씨의 모습을 보더니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어머니는 온종일 집 안에 있어 적적하고 답답해했으니 밖에 나가 돌아다닐 필요가 있었다. 또 엽균과도 잘 지내게 해야 했다.
사실 엽연채는 아직까지도 엽균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쨌든 간에 엽균은 그녀의 아들이었고, 그녀는 원래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아들과 함께 지내기를 갈망했다.
“그럼 가 보세요! 몇 명 더 데려가시면 되죠, 뭐. 그리고 다리만 고치지 말고 간 김에 좀 놀다가 오세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넌 집 안에 얌전히 있거라!”
온씨는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짓더니 한 송이 꽃처럼 활짝 웃었다.
“참, 제민은 어쩌고 있어요?”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 있단다!”
온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 채 마마가 그 아이를 돌봤는데 한밤중에 깨어나더니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오늘 아침에 음식을 보냈는데 그것도 먹지 않았고.”
“제가 가서 볼게요.”
엽연채는 방에서 나와 서쪽 곁채로 갔다. 회랑을 지나 세 번째 곁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담한 체구의 소녀가 침상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추길과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고 엽연채는 그런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문을 닫고 추길, 혜연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떻더냐?”
온씨는 손을 멈추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엽연채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으로만 물었다.
엽연채는 말없이 그녀 맞은편에 놓인 수돈에 앉았고 추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신 답했다.
“다 죽어 가는 모습이었어요. 설마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겠죠?”
“그러지는 않을 게다.”
온씨의 말에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며 재차 염려를 표했다.
“하지만… 제가 볼 땐 그다지 낙관적인 모습은 아니었어요.”
그러자 온씨는 ‘흥’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을 게다. 그 애는 죽지 않을 거야.”
추길과 혜연은 이해가 가지 않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큰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염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큰도련님이라는 말에 엽연채의 마음속은 금세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개과천선했다지만 엽균이 전에 저지른 잘못이 어디 한둘인가. 엽연채는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에게 느끼는 혐오감은 이미 조건반사가 되어 버렸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훤칠한 사내가 마당의 입구로 들어섰다. 흐릿한 ‘만萬’ 자 문양이 들어간 둥근 깃이 달린 남회색 의복을 입은 그는 절뚝거리며 비틀걸음으로 걸어왔다.
과거의 엽균은 영기英氣가 깃든 화려한 외모에 키가 크고 미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어, 한량이긴 했지만 웃음이 많은 멋스러운 공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바짝 야위어 얼굴이 칼로 깎은 듯 뾰족하며 움푹 들어가 있었다. 여전히 잘생기긴 했지만 기가 쪽 빨린 것처럼 생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온씨가 말했던 것처럼 걷는 자세가 너무 기우뚱대 보기에 영 좋지 못했다.
“어머니.”
엽균은 엽연채도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연채야.”
“네.”
엽연채는 냉담하게 인사를 받았다.
남매는 전에 날 선 대결을 벌였기에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되니 아주 어색할 따름이었다.
온씨는 남매 사이의 분위기가 어색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걸 느끼고는 하는 수 없이 중간에서 수습에 나섰다.
“오늘 너희 남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단다.”
“도련님, 어서 앉으세요.”
채 마마도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더니 한쪽으로 걸어가 아치형 다리가 달린 둥근 배나무 걸상을 가져왔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여러 색깔의 실을 집어 들어 꼼꼼하게 실을 고르기만 했다.
이 모습에 추길과 혜연은 서로 눈을 맞췄다. 추길은 엽균을 보니 여전히 기분이 언짢아 알은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혜연은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 엽연채를 대신해 엽균에게 안부를 물었다.
“도련님, 다리는 어떠세요?”
엽균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걸을 때 좀 아픈 것뿐이지 다른 건 괜찮다.”
사실 조금도 괜찮지 않았지만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다리가 어쩌다가 부러지게 된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자격으로 불평을 하겠는가.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고 나니 그는 한층 어색해져 다른 말거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는 온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온씨의 손엔 자수틀이 들려 있고 하늘색 천이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 위에 구름 문양을 수놓고 있었다.
온씨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그의 실없는 질문에도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수를 놓고 있잖니.”
엽균의 준수한 얼굴이 난처함에 물들었다. 다시 보니 과연 바늘과 실을 들고 있는 온씨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어 엽균의 시선은 자연히 엽연채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는 하얗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실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엽균의 표정이 굳었다. 전에 그도 은정랑을 도와 실을 나눠 주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작 친어머니인 온씨에게는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어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엽균이 다른 쪽에 놓인 실을 집어 들었다.
“할 줄 아니?”
온씨는 깜짝 놀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엽균을 쳐다봤고 조금 감동한 눈빛을 보였다. 사내들은 일반적으로 바늘이나 실에 절대 손대지 않는데, 지금 아들이 자신을 위해 실을 나눠 준다고 하니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그가 전에 분명 은정랑을 도와 이 일을 해 봤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속에서 더욱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온씨는 이 일을 모르는 눈치니 꾹 참고 티를 내지 않았다. 어찌 됐든 지금 온씨가 기뻐하고, 엽균 또한 진심으로 그리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엽균은 감동받은 온씨의 표정을 보더니 더욱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실을 나눴다.
“전 주방에 좀 가 볼게요. 채 마마가 저희를 위해 어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을지 봐야겠어요.”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온씨는 옅은 한숨을 쉬었으나 남매끼리 친하게 지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들딸이 함께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