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화
추길과 혜연이 힘을 합쳐 제민을 부축해 마차 밖으로 데리고 나오자 채 마마가 마차 뒤에 반쯤 쭈그려 제민을 업었다.
그렇게 제민을 집 안으로 들이고 나서야 온씨는 머리는 산발에 핏자국이 가득한 끔찍한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일행은 수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고, 온씨가 지내고 있는 처소로 돌아오자 채 마마가 돌아서서 온씨에게 물었다.
“마님. 이 소저를 어느 방으로 데려갈까요?”
“음…….”
온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답했다.
“일단 서쪽 곁채로 데려가게.”
채 마마는 얼른 여종 둘을 데려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은 옷을 준비하고 다른 한 명은 물을 끓였다.
온씨는 정원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엽연채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저 소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엽연채는 생각을 하더니 제민과 유씨 가문 일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정을 알게 된 온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휴, 세상이 정말 미쳐 돌아가는구나.”
이때, 채 마마가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유씨 가문과 관계된 일이라고요? 아가씨가 이 소녀를 데려오셨는데… 밉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자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모으며 대꾸했다.
“작년 정양절에 내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한 후 이 소녀가 날 한참 동안 찾았대요. 그런데 이번엔 지금 이 소녀가 어려움에 처해 있잖아요. 내 앞에 쓰러져 있고 누군가에게 계속 해코지를 당할 게 빤히 보이는데 어떻게 못 본 척할 수 있겠어요?”
추길과 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이 냉정함과 무관심으로 뒤덮여 있어서는 안 되었다. 엽연채가 제민을 돕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군자는 행함이 있고 행하지 않음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일은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엽연채는 이 제민이라는 소녀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자신의 전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무기력하게 운명에 지배당하며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만약 자신이 오늘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녀의 말로는 전생의 자신과 같았을 것이다.
엽연채는 이젠 더는 겁먹고 움츠러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하면 그만이다.
“아니, 잠깐.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온씨가 핵심을 짚어 냈다.
“그런 일을 어떻게 내가 모르는 것이냐?”
엽연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온씨는 아직 이 일을 모르고 있었다. 당황한 그녀는 하하 웃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말실수를 한 거예요. 실은 제가 교외에서 넘어졌던 그때…….”
그러나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넘어졌다니? 작년에 공주 마마의 별장에서 지냈던 때를 말하는 것이냐? 실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던 게야?”
마침내 그날의 진상을 듣게 된 온씨는 낯빛이 새파래졌다.
“아, 그게… 맞아요. 사실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어요…….”
더는 숨길 수 없게 됐으니 엽연채는 온씨의 팔짱을 끼고 흔들며 그녀의 기분을 맞추려고 이렇게 무마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벌써 일 년도 넘은 일인걸요!”
추길과 혜연은 자책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사죄했다.
“저희가… 아가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온씨는 화가 나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딸이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었다니, 그런데 어머니인 자신에게 그 사실을 꼭꼭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저 배고파요!”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추길과 혜연은 멍해 있다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두 사람도 배가 고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혼례식이 끝나면 원래 주연을 베푸는데, 그 전에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아직까지 배를 곯고 있었던 것이다.
“굶어라. 넌 무슨 일이든 나에게 숨기는구나.”
온씨는 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요.”
온씨는 허기에 얼굴이 하얗게 뜬 엽연채를 보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그녀의 이마를 콱 쥐어박으며 말했다.
“너도 참…….”
그러고는 채 마마를 쳐다봤다.
“집에 고기가 좀 있지 않은가? 어서 가서 내오게!”
채 마마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이때, 염교가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한쪽에 놓인 원탁 위에 올려놓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큰아씨. 어서 마님께 잘 보일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그래, 그럼…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려야겠다!”
엽연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온씨 뒤로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온씨는 그제야 살짝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겨우 이 정도 주무른 거로는 턱도 없다.”
“그럼 제가 여기서 며칠 지내면서 매일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릴게요.”
“그래도 되겠니? 네 시어머니가…….”
이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온씨는 말동무할 사람이라곤 채 마마와 여종 두 명이 다여서 너무 무료했던 차였다.
그뿐 아니라 요즘 매일같이 딸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딸이 먼저 곁에 있겠다고 하니 당연히 기뻤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엽연채가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면 시어머니가 언짢게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어머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즘 제가 매일 집에 돌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실 걸요.”
엽연채는 피식 웃고 말았으나 그래도 온씨는 염려를 표했다.
“일단 돌아가서 잘 말씀드리고 오렴.”
“네, 알겠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식사를 한 뒤 제민을 보러 갔다. 제민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채 마마와 혜연이 몸도 닦아 주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상태라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추길, 혜연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 * *
엽연채가 정국백부로 돌아와 보니 이미 저녁 무렵이 되어 있었다.
크고 화려한 마차는 서쪽 측문으로 들어서더니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어린 여종이 그곳에 서 있었는데, 마차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셋째 마님. 주인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추길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작은 걸상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그 여종을 노려봤다. 엽연채는 추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더니 어린 여종을 쳐다보며 말했다.
“알겠다. 지금 바로 가마.”
“예.”
어린 여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쏜살같이 달려갔다.
“가자!”
세 사람은 천천히 일상원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씨가 탑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엽연채를 보더니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님.”
엽연채는 앞으로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이제서야 돌아온 것이냐?”
“혼례식이 끝난 후에 어머니가 계신 곳에 들러 잠깐 있다가 왔습니다.”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묻는데도 엽연채는 더없이 무덤덤했다. 진씨는 들고 있는 찻잔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매씨가 엽연채 뒤에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꾹꾹 참으며 차갑게 말을 받았다.
“듣자하니 네 큰이모가 정성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네 어머니만 계신다고 하더구나. 어머니 혼자서 지내시는 게냐?”
“채 마마 등과 함께 지내시고 계십니다.”
“셋째도 갔는데 너 혼자 집에…….”
말을 하던 진씨는 순간 멈칫했다. 만약 엽연채는 집에 있어 봤자 쓸쓸할 뿐이고 딱히 할 일도 없다고 말하게 되면 마치 자신과 주묘서가 그녀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진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네 어머니가 밖에서 혼자 지내시는 게 녹록치 않을 게다. 시간이 있으면 자주 찾아뵈어 함께 있어 드리거라.”
“감사합니다. 어머님.”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냉소를 지었다.
“그럼 내일 거기로 가서 한동안 지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리하거라!”
진씨는 잠시도 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피곤할 텐데 그만 돌아가 보거라.”
“예.”
엽연채가 밖으로 나가자 소청과 서차간에 달려 있는 은사 주렴이 그녀의 몸에 부딪혀 계속 흔들렸다.
진씨의 낯빛은 금세 어두워지더니 콧방귀를 뀌며 욕했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 하루 종일 말썽만 부리고 가만있지를 않는구나.”
이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렴이 또다시 흔들렸다.
“어머니. 뭐라고 하셨어요?”
들어온 사람은 주묘서였다. 주묘서는 오른쪽에 놓인 권의에 앉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전에 보니 그 여인이 여기서 나가던데 왜 갑자기 부른 거예요?”
주묘서가 말하는 그 여인이란 당연히 엽연채였다.
진씨 모녀와 엽연채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젠 엽연채 본인을 보는 건 고사하고 엽연채 이야기만 해도 두 사람은 속이 뒤틀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유씨 가문 혼례식에 참석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씨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래서요?”
주묘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원래 유씨 가문 혼례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유 재상은 문신의 우두머리이니 분명 많은 명문가 귀공자들이 찾아와 축하할 것 아닌가.
하지만 자신들과 엽연채의 갈등이 점점 더 깊어진 탓에 참석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그 전에 이런 연회에 아주 많이 참석했건만 거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발목을 잡았다.
전에도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했는데, 집안의 처지가 이리 묘하게 변해 버린 지금 거둬들일 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하여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얌전히 있었던 것이다.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또 유씨 가문에서 말썽을 피웠다는구나.”
비록 유씨 가문 혼례식에 가지는 않았지만 진씨는 계속 그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 놨기에 유씨 가문에서 벌어진 큰 소동을 이미 전해 들은 뒤였다.
들어 보니 유곡요가 가난한 집안의 진사에게 시집을 갔는데, 혼례 의식을 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신랑의 숨겨진 정혼녀가 튀어나와 아주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다고 했다. 유씨 집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혼사를 치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엽연채가 뜻밖의 말을 꺼내 유곡요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원래 초빙풍은 그 여인이 집 안으로 난입한 거라고 말했는데, 엽연채가 초빙풍이 그 여인을 가둔 거라고 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는 공공연히 초빙풍의 체면을 깎은 행동이 아니겠는가.
엽연채의 몇 마디 때문에 유곡요와 초빙풍은 말다툼도 벌였다고 한다. 결국 유 재상이 직접 와서 상황을 무마하고 나서야 신랑 신부는 이어서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진씨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 가슴이 쿵쿵하고 빠르게 뛰었고 엽연채는 물론이고 그녀의 조상들에게도 욕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꼴통 짓을 일삼는 빌어먹을 계집애였다.
만약 유씨 가문이 주씨 가문에 원한을 품으면 어찌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