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69화 (369/858)

제369화

어느덧 마차는 맞은편에 위치한 객줏집 문 앞에 멈춰 섰다. 엽연채는 마차에서 내린 후 혜연, 추길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혜연이 세 번째 방 앞에 서서 문을 열자 엽연채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갈한 방 안엔 가좌상이 하나 자리했고, 한 소녀가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소녀는 피가 묻은 옷조차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의원을 불러오너라.”

“예. 그러잖아도 방금 막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초부에서 나오시는 아가씨와 마주쳤던 겁니다. 그래서 우선 아가씨와 추길이를 이곳으로 안내했고요.”

혜연은 엽연채에게 그리 답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엽연채가 침상 곁으로 걸어가 보니 제민은 얼굴을 안쪽으로 향하게 한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슴은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지만 호흡은 미약했다.

그녀가 깨어 있다는 걸 안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괜찮아요? 어디를 다친 거죠?”

“왜… 절 도와주는 거예요?”

제민은 가냘픈 목소리로 동문서답했다.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요.”

초빙풍이 무엇을 원해 그녀를 집안에 가둬 뒀을지 엽연채는 대략 짐작이 갔다. 하지만 제민은 굴복하지 않았고 그의 막강한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을 들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은 없었다.

“하, 마음에 들 게 뭐가 있어요.”

제민은 자조의 웃음을 지었다.

“우리 같은 농촌 사람들은 다 이래요. 전 누구보다도 나약한 사람이에요…….”

엽연채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해 줄게요.”

그때 제민의 자조 섞인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제가 어렸을 때 언니가 정혼자에게 버림을 받았어요. 그러자 언니는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우물에 몸을 던졌죠. 그때 전 너무 슬퍼서 엉엉 대성통곡을 했고요.

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서는 이럴 필요가 있었냐고 원망했어요. 쓰레기 같은 사내가 떠났으니 큰 행운인 거라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언니를 탓했어요. 이제서야 이해하게 됐네요. 언니는… 정말 죽고 싶었겠죠. 미안, 정말 미안해…….”

그녀는 마지막 말을 뱉고는 오열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죽은 그녀의 언니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엽연채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엽연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달래지도 않았다. 그저 한쪽에 앉아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 * *

초부.

‘희囍’ 자 문양의 전지와 붉은색 조각품이 가득한 신방 안에는 붉은 초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색 촛농이 초를 따라 아래로 똑똑 떨어졌다.

유곡요는 신방의 발보상에 앉아 있었고 초빙풍은 그녀가 쓰고 있는 붉은 덮개를 바라봤다. 유곡요는 잔뜩 굳은 얼굴로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붉은 덮개를 걷어 올리자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오늘 무슨 뜻으로 그랬던 겁니까? 그 농가 소녀가 왜 그런 건데요? 그 사람이 공자에게 뭔데요?”

그녀의 질문에 초빙풍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곡요… 소저.”

이때, 유 재상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초빙풍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빙풍, 잠깐 밖으로 나가 있거라.”

“예, 할아버님.”

초빙풍은 그에게 예를 올린 후 밖으로 나갔고 멀리 가지는 않고 문밖에 섰다.

“할아버지!”

유곡요는 유 재상을 보더니 결국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처리해 주셔야 돼요.”

“요아야, 대체 뭘 신경 쓰는 것이냐?”

유 재상은 옷소매를 살짝 뿌리치며 뒷짐을 지더니 몸을 기울이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중후하고 부드러웠다.

“설령 그 농가 소녀가 빙풍의 정혼자였다고 한들 뭐 어떻느냐? 그건 다 과거의 일이다. 지금 그 애와 혼인한 사람은 너다.”

하지만 유곡요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저희 가문을 얻으려고 그 농가 소녀를 버린 거잖아요? 그리했다는 건 부귀를 탐하는 비열하고 천한 사람이라는 이야기 아닌가요? 전 그런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 그런데 유 재상은 뜻밖에도 ‘허’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네가 한 말이 얼마나 우스운 줄 아느냐? 그 애가 부귀를 탐하지 않고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냐! 그 애가 그런 성품을 갖췄다면 널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겠느냐?”

그 말에 유곡요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너도 그 애가 목적을 갖고 널 아내로 맞이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니. 벼락출세와 뒷배경을 원해서 말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내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건 너무 우습지 않느냐? 빙풍 이야기는 할 것 없고 너 자신부터 보렴. 너 또한 목적을 가지고 그 애에게 강가했다.”

유곡요는 그 말에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네가 무엇을 위해 그 애에게 시집온 건지 잊지 말거라!”

무엇을 위한 건지는 사실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유씨 집안에 아들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입맛대로 움직이기 쉬운 가난한 집안의 서생과 혼인한 것이다.

그리고 초빙풍이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한 건 부귀와 뒷배경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협력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유곡요가 고귀한 출신의 사내에게 시집을 간다면 그 사내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유씨 가문에 양자로 주려 하겠는가? 어불성설이었다.

이런 이치를 다시 상기하자 유곡요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어서 합방하거라!”

유 재상은 그 말을 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유곡요는 굳은 표정으로 침상에 앉아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 결정은 이미 몇 년 전에 내려진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가난한 집안의 자제와 혼인을 하면 어떤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때, 초빙풍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침상 위에 앉았다.

“미안해요. 오늘 소저가 수모를 겪게 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제대로 못 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유곡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적어도 그는 온갖 방법을 써서 교활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부부는 함께 합환주를 마신 후 잠자리에 들었다.

* * *

객줏집.

침상에서 울고 또 울던 제민에게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엽연채는 그녀가 졸도했음을 알았다.

잠시 후, 혜연이 돌아왔고 약상자를 메고 있는 나이 든 의원이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추길은 얼른 아치형 다리가 달린 둥근 걸상을 가져와 침상 곁에 놓았고 의원은 걸상에 앉더니 제민의 맥을 짚었다.

잠시 후, 의원이 손을 거두자 엽연채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의원은 희끗희끗한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맥을 잘못한 게 아니라면 이 소녀에게… 장기간 불마탕佛麻湯을 먹인 것 같습니다.”

엽연채는 혜연과 시선을 주고받다가 의원에게 물었다.

“불마탕이 뭡니까?”

물론 속으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사람의 손발에 힘이 빠지게 하는 약입니다. 복용 중과 복용 후에 일정 기간 동안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약물이죠.”

엽연채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의원이 다시 살펴보니 제민의 몸 여러 군데에 구타당한 흔적이 보였고 왼쪽 팔뚝과 허벅지엔 칼로 베인 상처도 있었다. 다행히 깊게 베이지는 않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의원은 상처를 동여매고 약을 처방해 준 후 그곳을 떠났다.

의원이 떠나자마자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가씨, 이제 어쩌실 거예요? 이 사람을 어디에 두실 거예요?”

엽연채도 미간을 구기더니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작년 정양절 후에 저희가 저 소저의 집에 가지 않았나요? 그때 도성 서쪽에서 살고 있었잖아요. 저 소저를 그곳으로 보내죠!”

혜연이 먼저 말문을 열고 이리 제안했다.

“그건 안 된다! 유씨 가문은 세력이 막강하니 분명 다시 제민을 잡아갈 거다. 게다가 더 이상 그 집에 세 들어 살지도 않을 거야.”

엽연채의 반대에 추길이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아니면 밖에다 셋집을 하나 구하는 건 어떨까요?”

“일단 제민을 어머니가 지내는 곳에 데려다 두자꾸나.”

그러나 엽연채는 이리 말했고, 혜연도 동조했다.

“그렇게 하시죠. 아무래도 집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요.”

엽연채는 다시 혜연을 밖으로 보내 어멈 둘에게 돈을 주고 제민을 아래층으로 옮기는 걸 거들게 했다. 그렇게 제민을 마차에 실은 다음 일행은 추씨 가문 저택으로 갔다.

추씨 가문 사람들이 떠나자 집안이 갑자기 확 썰렁해져 온씨는 아주 적적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매일 구럭을 한가득 뜨고 자수도 많이 놓았지만 해 놓고 보니 ‘뭐 하려고 이렇게 많이 짰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딸을 자주 불러 곁에 있게 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 다른 수가 없었다.

이때, 염교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큰아씨께서 오셨는데 거들 일이 있으니 채 마마를 수화문으로 보내 달라고 하십니다.”

“연채가 왔는데 채 마마를 보내 달라고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채 마마, 어서 따르게. 함께 연채를 보러 가세.”

온씨는 기뻐하며 들고 있던 구럭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걸어갔다. 채 마마도 얼른 침실에서 나와 온씨의 뒤를 따랐다.

수화문에 도착하자 엽연채가 보였고, 추길과 혜연도 이미 마차 밖에 서 있었다.

“어머니.”

엽연채는 온씨를 보자마자 다가가 팔짱을 꼈다.

“녀석, 왔는데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이곳에 서서 뭐 하는 게냐?”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의 이마를 콕 찍었다.

모녀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혜연은 채 마마를 끌고 마차 뒤쪽으로 걸어가 발을 걷어 올렸다. 온몸에 핏자국이 얼룩진 한 소녀가 안에 누워 있으니 채 마마는 당연히 기겁했다.

“이… 이 소녀는 누굽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어서 안으로 옮겨야겠어요!”

그녀는 온몸에 피 얼룩이 묻어있는 제민을 보고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소녀라니?”

소리를 들은 온씨가 어리둥절해하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우선 제민을 부축해서 마차 밖으로 꺼내요!”

엽연채가 말했다.

“팔뚝과 허벅지에 칼로 베인 상처가 있어요. 이미 동여매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