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7화
제민은 화려한 혼례복을 입은 유곡요를 쳐다봤다. 그녀는 눈부시게 화려한,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고 얼굴엔 곱게 화장을 한 상태였다.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범접할 수 없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선녀처럼 보였다.
제민은 유곡요를 보자 정신이 좀 얼떨떨해졌다.
“소저가 신부인가요?”
“너, 넌…….”
유곡요는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 뿐, 그녀가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아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그동안 즐거운 일, 언짢은 일 등 겪은 일이 너무 많았기에 작년에 적성대에서 벌였던 바둑 대결은 전혀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 일은 그저 평범한 나날의, 개중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어서 저 여인을 밖으로 끌어내거라!”
방금 전 집사 어멈이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때, 제민이 갑자기 초빙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전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들 그녀가 사람을 베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뜻밖에 다른 손을 내밀었고 그 작은 손엔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우리의 정혼 옥패를 돌려줘요!”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정혼 옥패? 신랑과 저 소녀가 설마 정혼을 했단 말인가? 그럼 초빙풍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로 갈아탄 진세미(희곡 「찰미안鍘美案」에서 장원 급제 후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마가 되는 등장인물)란 말인가?’
손님들은 갑자기 이런 쪽으로 상상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초빙풍은 가난한 가문 출신의 진사이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망발이냐, 정신 나간 여인 같으니라고! 다들 뭣 하느냐! 어서 저 여인을 데리고 나가.”
집사 어멈이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싸늘한 목소리에 주위에 있던 네다섯 명의 어멈들이 마침내 앞으로 달려 나와 제민의 손에 들린 칼을 홱 낚아챘고, 그중 키가 크고 뚱뚱한 한 어멈이 제민의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따귀를 맞아서 얼굴이 홱 옆으로 돌아간 제민은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며칠 동안 굶은 상태인 데다 조금 전 여기까지 오면서 생긴 상처 때문에 머리가 무거워지더니 결국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발버둥을 치며 몸을 일으키려는 제민에게 어멈 하나가 다가가 그녀를 끌어내려고 했다.
“멈추거라!”
유곡요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민을 가리키며 초빙풍을 쳐다봤다.
“말씀하세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민은 가까스로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옥패를 돌려줘요! 그럼 우린 끝이에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초빙풍은 속으로 흠칫했고 준수한 얼굴은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옥패를 가져가고 싶으면 조용히 옥패나 가져가면 되지, 왜 기어코 정혼 옥패라고 강조하냐는 말이다!’
“무슨 옥패? 우리 나리를 모함하지 말거라.”
이때, 사동 차림의 한 사내가 뛰어나와 초빙풍의 앞을 막아서더니 몸을 돌려 유곡요에게 이리 고했다.
“마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자는 그저 사람을 속여 먹으려는 사기꾼입니다!”
그 말에 유곡요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녀는 몇 마디 말로 적당히 둘러대는 게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가씨, 생각났습니다!”
갑자기 뒤에 있던 여매가 말했다.
“작년 적성대요!”
‘적성대? 적성대라니 무슨. 잠깐…….’
유곡요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생각이 난 것이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그 여인이었구나!’
“적성대라니요?”
손님들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알아요.”
누군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보였다. 바로 왕종유였다.
“작년에 한 농가 소녀가 정도 여승이 지병이 도진 틈을 타 그분과 바둑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속임수를 써서 이겼죠. 이에 유 소저가 정도 여승의 제자로서 이 농가 소녀의 대결 신청에 응했고, 결국 적성대에서 단번에 이 소녀를 이겨 정도 여승의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아… 작년에 분명 그런 일이 있었어. 아주 떠들썩했지.”
몇몇 젊은 귀공자와 규수들이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어떤 사람이 이 천박한 것이 이길 거라며 내기를 했다가 무려 은화 일만 냥가량을 잃었다지. 쯧쯧, 어떤 얼간이가 그랬을까?”
“결국 이 농가 소녀가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게 증명됐죠! 정도 여승이 병을 심하게 앓아 두통이 심한 틈을 타 이겼으면서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죠. 하지만 그럼 뭐 합니까. 결국 유 소저에게 한방에 제압당했는데요.”
“맞습니다. 저자는 사기꾼이에요!”
사동은 그 말에 얼른 맞장구를 쳤고 바닥에 쓰러져 혼절하기 일보 직전인 제민을 쳐다보며 사납게 닦아세웠다.
“갑자기 남의 집에 쳐들어와 우리 나리를 모함하다니! 누가 보낸 것이냐?”
그 말에 사람들은 순간 멍해졌다. 누군가가 일부러 신랑을 모함하려 한다는 말인가?
가난한 집안 아들이 갑자기 재상의 손녀를 아내로 맞게 됐으니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것은 당연했다. 조범수만 해도 질투심이 활활 타올라 초빙풍이 떠들썩한 추문에 휘말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지금 정말로 그가 그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 사동도 지금 누군가가 초빙풍을 계략에 빠뜨리려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닙니다.”
이때,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연채야!”
엽영교는 낯빛이 싹 변하더니 엽연채의 손을 잡아 그녀를 멈춰 세웠다. 지금 주씨 가문은 격랑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니 당연히 엽연채가 괜한 일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엽연채는 엽영교의 손을 뿌리치며 말을 이었다.
“신랑 신부가 천지 신령과 웃어른께 절을 올리기 전에 저는 밖에서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이 소녀가 앞쪽 뜰에서 뛰쳐나오려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어멈들이 이 소녀를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어요. 그러니 밖에서 쳐들어온 게 아니라 초부에 갇혀 있던 것입니다.”
‘초부에 갇혀 있었다고?’
손님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밖에서 난입한 것이라면 어멈들이 제민을 발견했을 때 그녀를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지 어찌 뜰로 밀어 넣으려고 했겠는가. 엽연채의 말대로 이 소녀는 이곳에 갇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유곡요는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렸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초빙풍을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자가 저 소녀를 집안에 가둔 겁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초빙풍은 얻어맞은 제민이 바닥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저와 제 소저는 동향인입니다. 제가 시험을 보러 도성으로 올라온다고 하니 기어코 저와 함께 가겠다며 도성에서 생계를 꾸리겠다고 했습니다. 전 그저 제 소저가 동향인이라 가여워서 잠시 집에서 머무르게 해 준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이 소녀가 정혼 옥패 이야기를 했습니다!”
엽연채가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정혼?’
유곡요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자신은 어엿한 재상의 손녀이자 대제 제일의 재녀이기에 본래라면 원하는 어떤 귀공자에게든 시집갈 수 있었다. 단지 오라버니나 남동생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집안의 진사에게 강가하는 건데, 거기에 이런 추잡한 일까지 벌어지다니, 황당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옥패…….”
제민은 숨을 몰아쉬며 분노와 원망이 섞인 눈빛으로 초빙풍을 노려봤다.
“무슨 옥패를 말하는 것이냐! 우리 나리는 결코 그런 걸 갖고 계시지 않는다! 좋은 마음으로 널 거둬 주셨는데 감히 나리께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게냐!
제 분수도 모르고 이곳에 와서 나리의 혼례식에 찬물을 끼얹다니. 정말이지 배은망덕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남의 호의를 개떡으로 알아도 유분수지!”
사동이 냉랭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제민은 방금 전 얻어맞은 터라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제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게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했다.
그녀와 초빙풍은 이웃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다. 초빙풍이 여덟 살 때 그의 부모는 산에 사냥을 하러 갔다가 이리에게 물려 죽었는데, 친척들이 그를 거두려고 하지 않아 그녀의 가족이 매일 그에게 밥을 해 주었고 매년 그에게 옷을 지어 줬다.
한편, 초빙풍은 좋은 머리를 타고나 글공부에 소질이 있었는데 공부를 할 돈이 없었다.
제민 또한 좋은 머리를 타고났는데, 특히 바둑 실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인근 읍으로 나가 사람들과 바둑 내기를 했고, 이겨서 딴 돈을 전부 초빙풍에게 가져다주어 공부하는 데 쓰게 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제민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의 임종 전 초빙풍은 할아버지에게 제민과 정혼할 거라고 약조했고, 꼭 시험에 합격한 다음 제민에게 봉관을 씌워 주고 하피를 입혀 줄 거라고 장담했다. 또 그녀를 봉호封號를 받은 귀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도 맹세했다.
이후, 학식이 일취월장한 초빙풍은 제민에게 내기는 고상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바둑 내기를 하지 않았고, 대신 그와 함께 도성에서 노점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며 그의 춘시 준비를 뒷바라지했다.
그는 호언장담한 대로 춘시에 합격했고 무려 4등인 전여가 되었다. 그런데 제민은 미처 축하도 하지 못하고 약 한 사발을 먹고 쓰러져 두 달 동안 줄곧 의식이 없었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이 세 들어 살던 도성 서쪽의 작은 집에 갇혀 있다가 이 저택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제민은 여종들의 입을 통해 그가 유씨 가문 여식을 아내로 맞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은 초빙풍과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견뎌 왔고 그가 가장 가난하고 초라할 때 그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바로 그날,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지난 18년 동안 자신은 그에게 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요 며칠 동안 제민은 혹시나 싶어 하인들이 들여온 물과 죽을 먹은 다음 그들이 떠나면 다시 토해 냈고, 가져온 것 중 손을 쓰기 어려운 과일만 조금 먹었다. 그러고 나서야 몸이 차츰 회복되어 기운을 되찾았다.
그렇게 버티다 오늘 있는 힘을 다해 소란을 피웠지만 결과적으로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민은 점점 의식이 흐릿해졌고 이젠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