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화
추길과 혜연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기다려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엽연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빨리 나오셨네요.”
추길와 혜연이 한입으로 의아해하자 엽연채는 웃으며 이리 대꾸했다.
“나와 유 소저는 그저 인사나 나눈 사이다. 그러니 딱히 주고받을 말이 뭐가 있겠니. 가자꾸나. 이제 신랑 댁으로 가야지.”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갔다. 근처에 연못이 보였는데, 마침 여름이라 연잎들이 수면을 뒤덮고 있고 분하粉荷가 활짝 피어 있었다.
“이렇게 빨리 신랑 쪽으로 가신다고요? 유 소저가 출가하는 모습은 안 보실 거예요?”
추길이 물었다.
대제의 도성에서는 혼례식 때 신부 쪽에서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신부가 출가하면 손님들도 그 행렬을 따라 신랑 집으로 가서 연회를 즐겼다.
“손님들이 너무 많잖니. 방금 전에 너희들도 봤듯이 마구간이 하도 붐벼 마차를 더 세울 공간도 없더라. 잠시 후에 유 소저가 출가하면 적어도 하객 절반은 신랑 집으로 갈 거야. 그리고 이리 붐비니 어차피 신랑 신부가 천지 신령과 웃어른께 절을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없을 게다. 그러니 먼저 가 있는 게 낫지.”
“하긴 그렇겠네요.”
혜연이 웃으며 동조했다.
엽영교 같은 지친至親이면 당연히 출가하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했겠지만, 유곡요와는 그냥 안면만 있는 사이라 엽연채도 본인이 편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엽연채와 두 여종은 왔던 길을 따라 마구간으로 다시 돌아왔고 마차에 오른 후 이곳을 떠났다.
“귀하디귀한 유 소저를 아내로 맞이한 운 좋은 가문은 어디일까요?”
“아직도 모르는 거야?”
추길의 궁금증에 혜연이 웃으며 반문했다.
“듣자하니 유 소저가 시집가는 가문은 세도가가 아니라 이번 과거 시험에서 진사로 합격한 사람이래.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이갑에 든 전여랬어. 셋째 도련님과 진 공자의 동료인데 집무실은 다르다고 하고.”
이야기를 듣던 추길이 미간을 찌푸렸다.
“출신도 좋지 않고 전여에 불과하다고? 도성에 널린 게 명문가의 귀공자들인데 왜 하필 그런 사람을 고른 거야?”
“넌 도성 안에 떠도는 남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다니는 걸 제일 좋아하면서 이런 것도 몰라?”
혜연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유 소저는 오라버니와 남동생이 없잖아. 유 소저 대에는 아가씨와 자매 몇 명뿐이야.”
“맞다! 이제 생각난다. 유 재상 대인은 아들이 총 다섯 명인데, 손자는 하나도 못 봤다고 했어.”
추길은 놀라더니 이어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도성의 멀쩡한 귀공자들을 마다하고 가난한 집안 출신인 진사를 찾은 거구나. 데릴사위로 들이려는 거지?”
“아니야.”
혜연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시집을 가긴 가는데, 그 사이에서 본 둘째 아들의 성을 유씨로 하고 유씨 가문 양자로 들이기로 했다고 한 것 같아.”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
집안에 사내가 없으면 대가 끊어졌다고 하여 형제의 아이나 가문의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딸이 있는 사람들은 데릴사위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릴사위를 들이면 난처한 일이 아주 많았다. 여인 쪽 집에서 살면 여러 가지로 억눌리고 체면이 서지 않는 경우를 많이 겪게 되었고, 사내들은 그런 걸 참지 못했다. 결국엔 갈등이 커지고 난감한 일이 자주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절충안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딸을 자신들보다 낮은 가문으로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딸이 아들을 낳으면 첫째 아들은 시집의 성을 따르게 하고 둘째 아들은 친정의 양자로 보내어 친정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여인 집안 쪽에선 사위가 출세할 수 있도록 밀어 줬고, 나중에 사위가 출세하게 되면 양자로 보낸 아이를 도와주었다. 그 아이도 그의 혈육 아닌가. 그러니 이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방편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추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떤 권문세가가 시험에 합격한 사람 중에 적당한 사람을 사윗감으로 골랐는데, 그 사람에게 집도 사 줬다고 들었어. 어떤 가문인지를 제대로 못 들었는데 유씨 가문이었구나!”
“집은 어디에 있대?”
혜연이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건 아가씨에게 여쭤봐야지.”
추길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청첩장에 영안가榮安街라고 쓰여 있더구나.”
추길과 혜연은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영안가는 정륭가처럼 황성 코앞에 있는 곳은 아니지만 고관과 귀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땅값이 아주 비쌌다.
그뿐만 아니라 영안가에 있는 저택은 전부 사진四進식이나 그 이상이라 은화 몇만 냥 가지고는 한 채도 살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장식이나 수리 등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구입에 십만 냥은 들었으리라. 그러니 유씨 가문은 아주 큰 출혈을 감수한 것이었다.
“아가씨, 영안가에 도착했습니다. 초씨 성을 가진 주인이 사는 일곱 번째 저택이 맞습니까?”
밖에서 경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초씨가 사는 집이다.”
엽연채가 답하며 마차의 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추길도 창문으로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길에는 저택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데 모두 담장이 높고 검푸른 기와가 깔려 있으며 주황빛이 도는 붉은색 대문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초부楚府’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는 한 저택이 보였다.
대문은 주홍빛을 띠는 붉은색이었는데 장식용 못이 하나도 박혀 있지 않았다. 관직과 작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한 사람만이 대문 위에 장식용 못을 붙일 수 있었다. 따라서 장식용 못이 많을수록 관직이 높거나 공적이 많음을 의미했다.
마차는 안으로 들어선 후 마구간에서 멈춰 섰고,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자 한 어멈이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초부는 널찍한 유씨 가문과는 규모가 비교도 안 됐다. 풍경도 유씨 가문처럼 웅장하고 화려하지 못했다. 대신 소박하면서도 고아한 운치가 느껴졌고 작은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는 게 꽤 고즈넉한 모습이라 할 만했다. 화초도 아주 비싼 품종보다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월계화, 들국화, 홍초 등이라 순박한 느낌을 주었다.
엽연채가 어멈에게 안내를 받아 화원으로 들어가 보니 안은 이미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젊은 공자들은 근처에 있는 낭가 아래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처마가 높이 솟은 팔각정자 세 개가 서로 잇닿아 자리하고 있었다. 부인과 소저들은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적네요.”
추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잖아. 오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도 전부 신랑의 동료란다. 혼례식 날짜도 일부러 조정에서 휴가를 보내는 날로 고른 것 같아. 안 그랬으면 동료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했을 테니까.”
엽연채는 그리 대꾸하며 저쪽에 있는 팔각정자로 향했다. 가 보니 진 부인이 엽영교를 데리고 귀부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고모, 진… 부인.”
엽연채는 진 부인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좀 난감했다. 전에는 그냥 부인이라고 불렀는데 이젠 엽영교가 진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면서 관계가 달라진 것이다. 엽영교는 자신의 고모인데 진 부인은 고모의 시어머니이니 항렬이 한층 더 높아진 것이었다.
엽연채는 어떤 호칭을 써야 맞을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진 부인으로 부르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그리 불렀다.
“왔구나.”
진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채야!”
엽영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걸어갔다.
“고모, 온 지 오래됐어요?”
“아니야. 우리도 방금 도착했어.”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어서 가서 앉자.”
주위에 있던 귀부인과 규수들은 전부 엽연채를 쳐다봤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안쪽으로 걸어오자 정자 안의 여인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묻혀 초라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정자 안에 있던 한 귀부인이 말했다.
“아유. 어느 가문의 젊은 부인인가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네요.”
그러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전 주씨 가문 사람이고 제 부군은 셋째 공자입니다.”
“주씨 가문?”
자리에 있던 모든 귀부인과 규수들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어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요즘 가장 유명한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바로 주씨 가문이었다. 목숨을 버리러 간, 죽음을 자초한 공자 역시 그 못지않게 유명했다.
이렇게 관심이 쏠리면서 그 주 공자의 아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자연히 퍼졌다. 다들 그저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정말 그러했다.
귀부인들, 특히 일부 젊은 부인과 규수들은 엽연채에게 질투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내 주운환이 벌인 일을 떠올렸는지 그들의 눈빛엔 다시 동정심과 고소해하는 감정이 비쳤다.
“아유!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오랜만이에요!”
그때, 누군가 엽연채에게 알은체했다. 엽연채가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상운祥雲 문양과 상祥 문양이 들어간 갈색 옷을 입은, 각진 얼굴의 한 귀부인이 기둥 옆에 앉아 있었다. 왕 부인이었다.
왕 부인은 지난번 진 부인과의 말싸움에서 데인 터라 엽연채를 보더니 차갑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 옆의 왕종유가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은… 운수가 참 사납네요. 어렵사리 고난에서 벗어나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됐는데 결국……. 그래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지난번 진씨의 생일 축하연 때 왕종유도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와 진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드는 꼴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 주운환이 제 명을 단축하는 짓을 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해 엽연채를 비꼬는 것이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제가 왜 상심을 합니까?”
왕종유의 표정이 굳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도 있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자칫 목이 잘릴 대죄를 짓게 될지도 몰랐다. 왕종유는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콧방귀를 뀌었다.
‘괜찮은 척하긴. 어쨌든 주운환은 거기서 죽을 테니 주씨 가문이 몰락할 날도 곧 올 거다.’
한편, 진 부인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기도 하였고, 엽연채는 그녀의 인척이니 누군가가 엽연채에게 빈정대는 꼴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주운환의 상황이 녹록치 않은 건 사실이기에 뭐라 반박하기는 또 곤란했다. 적을 많이 만들었다가 나중에 정말로 주운환 쪽에 무슨 일이 생기면 괜한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연채야, 우리 저쪽에 가서 꽃구경하자.”
이때, 엽영교가 눈치껏 미소를 지으며 이리 운을 뗐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진 부인은 얼른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가자.”
엽영교는 엽연채를 당겨 자리에서 일어선 뒤 정자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