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64화 (364/858)

제364화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쫓아가려고 소청에서 나왔다. 하지만 주묘화는 이미 잰걸음으로 정원을 지나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추길은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휴, 둘째 아가씨는 매일같이 마님과 첫째 아가씨에게 괴롭힘을 당하네요.”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능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어떻게 살지는 스스로 선택하는 거다.”

추길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엽연채 뒤로 걸어가 그녀의 얹은머리를 완성해 준 뒤, 진주로 장식된 금잠을 쓱 꽂아 치장을 마쳤다.

녹지는 궁명헌을 나온 지 얼마 안 돼 저 멀리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주묘화를 발견했다. 이에 콧방귀를 뀌며 그녀를 업신여겼다.

‘그래야지. 큰아가씨도 안 가는데 비천한 서녀가 어딜 가겠다는 거야?’

유 재상 가문의 혼례이니 그곳에 오가는 사람들은 전부 세도가일 것이다. 주묘화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를 지녔으니 정말로 어떤 눈이 삔 귀공자가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해서 그녀를 정실부인으로 맞으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됐다가 나중에 주묘서가 주묘화보다 좋은 곳에 시집가지 못한다면 주묘서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아무튼 주묘서가 시집가기 전에 주묘화는 혼담을 꺼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주묘서가 출가를 한다 해도 주묘화는 주묘서보다 좋은 곳에 시집가는 건 기대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 * *

진시辰時(오전 7~9시)의 절반이 지났을 무렵, 엽연채는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

황궁 근처의 정륭가에 위치한 유씨 가문 저택은 태자부 맞은편에 자리해 있었다.

혜연은 마차의 발을 걷어 올려 금칠을 한 태자부의 편액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엽연채가 그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태자부를 지나 조금 더 가자 웅장한 저택의 높다란 흰색 담장이 보였다. 유리 유약을 발라서 구운 오지기와는 눈이 부시게 화려했고, 주황빛을 띠는 붉은색 대문 위에는 장식용 못이 가득 박혀 있고 수환이 붙어 있었다.

높다란 담장 너머론 우뚝 솟은 정자와 누각들이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때, 양쪽으로 ‘희囍’ 자가 쓰여 있는 진홍색 등롱이 걸린 붉은색 대문이 활짝 열렸다. 사람 두 명을 합친 높이의 돌사자에는 무늬가 있는 진홍색 비단이 묶여 있었다.

경인은 마차를 몰아 정문에 도착했고, 그가 초대장을 내밀자 양쪽에 서 있던 붉은 옷차림의 하인들이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인 하나가 그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선 후 오른쪽에 위치한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에는 이미 귀하고 화려해 보이는 커다란 마차가 여럿 세워져 있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은 전부 귀부인과 규수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마차에서 내리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벌써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치맛자락을 하늘거리며 걸어갔는데, 그들의 얼굴은 꽃이 활짝 핀 것처럼 곱고 아리따웠으며 그들의 머리 장신구는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화려했다.

혜연이 작은 걸상을 내려놓자 해당화가 수놓여 있고 진주 장식이 달린 흰색 신이 걸상을 디뎠다. 오밀조밀한 꽃문양이 들어간 비단 치맛자락이 스르륵 움직이며, 곧이어 엽연채가 부축을 받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추길이 다가서며 말했다.

“이곳이 재상 대인의 저택이군요. 과연 대제의 백관들의 우두머리답게 마구간마저도 이렇게 크네요.”

“그렇네.”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가자꾸나.”

세 사람이 마구간을 나와 보니 날개를 펼친 독수리와 강산을 굽어보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가림벽이 보였다. 그 가림벽을 돌아 들어가니 정원으로 통하는 널찍한 통로가 나왔다.

엽연채는 들어가자마자 멈칫했다. 통로 앞쪽에 귀해 보이는 검은색 망포를 입은 한 사내가 정면에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태자였다.

태자도 엽연채를 본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지난 이월에 묘기화 일로 엽연채가 자신에게 부탁을 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 두 사람은 함께 사슴 고기를 구워 먹었고, 그녀는 알딸딸하게 술에 취해 자신의 품에 안겨 서재로 갔었다. 당시 그녀를 가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누군가의 방해로 그러지 못했다.

그 후, 태자는 황제에게 처소에 감금되는 벌을 받아 지난달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묘기화 사건을 비롯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교훈을 얻은 태자는 정사情事에 있어 어느 정도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더는 함부로 누군가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엽연채에 대해서도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나니 좀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또 눈앞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에 태자부에 몇 번 왔을 때 봤던 붉은 치마를 입은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비교해 보니 오늘 차림은 아주 단정하고 수수해 보였다.

그녀는 단아한 적삼에 은실로 촘촘히 짜인 연녹색 유소군流蘇裙을 입었고, 머리 장신구 또한 아주 소박했다. 그럼에도 아름답고 요염한 그녀의 자색을 가리지는 못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태자의 마음은 그녀를 본 순간 또다시 동요하기 시작했고 눈빛은 저도 모르게 이글이글 타올랐다. 머릿속엔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을 때 느꼈던 보드랍고 매끄러운 피부와 꽃향기가 떠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탓에 태자는 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엽연채 앞으로 다가갔다.

“주 부인.”

엽연채는 혐오감이 들었지만 얼른 그에게 예를 올렸다.

“오랜만에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소. 어서 일어나시오.”

태자는 몸을 숙이며 예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봤다. 그녀가 천천히 움직이는 사이 그윽한 꽃향기가 풍겨 오자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일렁거렸다.

엽연채는 예를 올린 후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는 그런 그녀를 보자 자신이 정선제에게 무슨 이유로 감금되는 벌을 받았는지 또다시 떠올랐다. 그는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얼른 변명의 말을 꺼냈다.

“지난번 부인이 내게 부탁했던 일은…….”

“고모의 일은 이미 해결됐습니다. 이제 좋은 분에게 시집가셨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태자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처소에 갇혀 있었다지만 당연히 그동안 계속 수하에게 보고를 받았다. 묘기화의 죽음과 소문 때문에 묘기화가 남색가라는 사실이 명확해졌고, 그에 엽영교가 비로소 발을 뺄 수 있었다는 소식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부인이 어쩌면 날… 좀 오해할 수도 있겠군.”

태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부인이 부탁했던 일을 해결해 주려고 했소. 그런데 조정에서 누군가가 날 모함하여 아바마마께서 금족령을 내리실 줄 누가 알았겠소. 정말로 묘… 그자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소.”

엽연채는 그저 그가 너무 역겨울 따름이라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꾸했다.

“소인은 전하를 믿사옵니다.”

태자는 빙긋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미소에 마음이 따듯해져 오는 것 같았다.

“부인이 우린 꽃차를 마신 지도 오래됐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초대할 테니 와서 또 차를 우려 주시오.”

엽연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예.”

추길은 엽연채가 다시 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에 반해 혜연은 낯빛이 새파래졌다. 엽연채가 양왕과 한편이 되어 고양이 한 마리를 풀어 태자를 함정에 빠뜨리고 끝내 그가 감금되도록 한 일이 재차 떠오른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가급적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좋았다.

“셋째 마님, 늦었습니다.”

초조해진 혜연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전하. 소인은 유 소저에게 혼례 축하 선물을 전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태자에게 예를 올렸고 그녀를 쳐다보는 태자의 눈빛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알겠소. 가 보시오.”

“예, 전하.”

엽연채는 혜연, 추길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태자는 아리따운 그녀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계의 딱딱한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이계는 묘기화 일도 겪었으니 태자가 자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엽연채가 평범한 여인이거나 미혼 또는 출신이 낮은 여인이면 태자부로 들일 수 있었다. 기껏해야 외모보다 성품을 중요시한다는 평판만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태자는 한사코 건드렸다가는 온몸에 구린내가 진동하게 될 그런 사람들만 건드렸다. 예를 들자면 묘기화나 주 부인이 그랬다. 주 부인은 유부녀인 데다가 신하의 아내였다. 욕망에 굴복해 손을 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또 큰일이 생기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태자는 오만한 성격이라 설득하기 쉽지 않았다. 이를 잘 아는 이계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전하, 어서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듯하옵니다. 내일 조회에서 병력 이동에 관한 일을 상의해야 하옵니다.”

그 말을 들은 태자는 엽연채를 보고 살짝 흔들렸던 마음에 두려움이 일었다. 주운환이 그곳에서 패하면 엽연채는 의지할 곳을 잃게 되지만, 그리되면 동시에 서남의 열두 개 주를 잃게 되며 대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현재 그들은 서남에서 후퇴하게 되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매일같이 상의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자의 마음속에 일던 잔잔한 파문이 가라앉았다. 풍씨 가문이 무너지면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병권을 잃게 되리라. 여기에 요리의 일까지 떠오를 때면 태자는 번번이 초조해지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 * *

한편, 엽연채는 긴 통로를 나와 화원, 그리고 정자가 가득 자리한 풍경을 마주했다. 곳곳에 석가산과 흐르는 물이 보였고, 구불구불한 회랑과 휘황찬란한 층집도 눈에 띄었다.

엽연채는 여종의 안내를 받아 마침내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 뜰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붉은 칠을 한 갖가지 궤가 정원에 쌓여 있었고 궤는 거의 다 열린 채였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전부 금은 장신구와 옥기玉器, 도자기병들로, 하나같이 보기 드물게 귀한 물건들이었다.

추길과 혜연은 그 모습을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바로 재상 손녀의 혼수품이었다. 역시나 보통 사람들의 혼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풍성했다.

낭하와 정원엔 규수와 귀부인들이 한가득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 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종이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안내했다.

“그래.”

엽연채는 대답을 하고서는 여종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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