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3화
은정랑은 동쪽 곁채의 창문을 통해 엽승덕이 떠나는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서서 허서를 쳐다봤다.
허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받치고 왼쪽 다리는 붕대로 감아 부목을 대고 있었다.
‘나는 끝났다! 모든 게 끝나 버렸어! 폐인이, 불구가 되어 버렸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공명이 거둬졌을 때도 분개하고 불만스럽고 괴로워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얌전히 칩거하며 잘 견디고 있기만 하면 고난에서 벗어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불구가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리됐으니 시험을 봐서 공명을 얻는 건 불가능해졌고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설령 태자에게 모사가 되어 준다고 해도 태자가 원치 않을 터였다.
한편, 은정랑은 침상 밑에서 대나무 잎이 조각된 커다란 붉은색 찬합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첫 번째 층에는 닭찜 한 접시와 야채 고기채 볶음, 밥 한 공기와 대추를 넣은 닭죽이 들어 있었다. 은정랑은 우선 닭찜과 밥을 다 먹은 뒤 허서에게 죽을 한 숟갈씩 떠 줬다.
“서야, 죽 좀 먹으렴.”
은정랑은 그릇을 들고 허서에게 닭죽을 떠먹여 줬다. 허서는 입을 벌려 죽만 받아먹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은정랑은 이렇게까지 넋이 나가 있는 허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이 느껴졌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이 집을 팔아 돈을 가지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집문서도 손에 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허서도 폐인이 되어 버렸다. 도망가는 건 고사하고 정말로 도망간다고 해도 폐인이 된 아들을 데리고 가서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전에 품었던 희망은 허서가 출세하는 것이었다. 그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자신도 귀한 부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젠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엽승덕이라는 큰 나무뿐이니 필사적으로 그를 붙들고 놓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는 엽씨 가문과 관계가 있으니 기회를 봐서 뭐라도 좀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 * *
엽영교는 출가한 이튿날 진지항을 데리고 함께 엽씨 가문에 와서 일가친척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축복의 의미가 담긴 조롱박 문양과 ‘희囍’ 자 문양이 가득 수놓인 금색 배자 차림이었다. 여기에 능운계凌雲髻 머리를 하고 복숭아꽃 장식이 들어간 여의如意와 홍옥 머리 장신구를 꽂고 있어 더욱 생기 있으며 눈이 부시도록 아리따워 보였다.
묘씨와 엽학문, 둘째 아들 내외와 셋째 아들 내외의 식구들도 전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지로 시집을 간 고모 둘과 일부 가까운 친척들도 와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자리에 앉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은 상태였다. 엽이채와 장박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엽이채의 몸종인 류아가 전 마마와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리, 마님, 보 도련님께 병이 났는데 울음을 멈추지 않으셔요. 둘째 아씨께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어 오늘 이곳에 오지 못하십니다. 아씨 부군께서도… 대학자와 어렵사리 약속을 잡게 되어 오지 못하십니다. 중추절에 오시면 그때 인사를 나누도록 하시지요.”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었고 묘씨는 냉담한 목소리로 그녀를 물렸다.
“알겠다.”
엽영교는 엽연채의 귀에 대고 그들을 조롱했다.
“옹졸한 것들.”
그러자 엽연채는 ‘피식’ 웃었다. 엽이채는 엽영교가 탐화에게 시집을 가자 질투가 나서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이고, 장박원은 자신은 시험에 붙지 못했으니 전시에 급제한 사람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자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과거 시험에 붙어서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어디 진지항과 대면하고 싶겠는가? 자신보다 나이도 몇 살 많지 않은 사람이 고모부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니꼬웠을 것이다.
“참, 며칠 후면 유 재상 대인의 적장손녀가 출가하는 날이야. 상대는… 음, 네 고모부와 너희 부군의 동료더라. 너희 가문도 청첩장을 받았니?”
엽영교가 화제를 바꾸었다.
“유 소저 말이지요? 저도 받았어요.”
“우린 공자 쪽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았단다.”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의 말을 받았다.
유곡요의 혼인 상대는 진지항의 동료였다. 동료들에게 청첩장을 보낸 것이므로 당연히 진씨 가문도 청첩장을 받았던 것이다.
“난 그런 수준의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다행히 너도 오는구나. 네가 없었다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몰랐을 거야.”
“네. 그날 저랑 같이 있어요.”
유씨 가문 같은 최고의 권문세가는 예전 엽씨 가문 수준으로도 관계를 맺기 어려운 가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작년에 적성대에서 엽연채와 엽영교는 유곡요와 함께 어울리지 못했다. 가세가 다르기도 했고, 또 취미도 달라 어울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작년 칠석 때, 양왕부에서 유곡요와 바둑 대결을 펼치면서 친분을 쌓았기에 엽연채도 유곡요의 청첩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 * *
도성의 내로라하는 권문세가들은 거의 다 유 재상의 손녀 유곡요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았다.
엽연채는 청첩장을 받은 일을 숨기지 않고 주 백야에게 알렸고, 주 백야는 소식을 진씨에게 전하며 주묘서 자매를 데리고 함께 참석하라고 했다. 가서 혼처를 구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런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게 되면 우선 견문을 넓힐 수 있고 어쩌면 정말로 적당한 상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씨와 주묘서는 매씨에게 『가규』를 필사하라는 벌을 받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엽연채와 함께 가는 것 또한 체면이 확 구겨지는 일이니 무슨 낯짝으로 외출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유월 스무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을 시작했다. 추길은 진주를 상감하고 순금 마름꽃 장식을 두른 머리 장신구를 가져왔다.
“이건 됐다.”
그러나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꽃문양이 새겨진 옻칠한 작은 화장 상자를 열더니 진주가 상감된 순금 화전 두 개를 골랐다.
“이 두 개로 하자꾸나!”
“네? 이건 너무 단출한데요! 너무 작아서 얹은머리 중간에 꽂으면 머리에 묻혀 가려질 거예요.”
“검소하게 가는 편이 좋아.”
추길의 만류에 엽연채가 이리 대꾸했다. 자신은 외모 자체가 눈에 띄는 사람이고 지금 주운환도 그런 상황이니 검소하게 꾸미는 편이 좋았다.
까닭을 눈치챈 추길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이 날까요? 예쁜 머리 장식을 꽂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세상일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 신분이 높지 않으면 좀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도 그리하면 안 되니 말이야.”
혜연은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옷 한 벌을 들고 와 침상 위에 올려 두었다. 하얀빛을 띤 노란색 항주杭州 비단으로 만든 얇은 웃옷과 은실로 짠 오밀조밀한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연녹색 소주蘇州 비단으로 만든 긴 치마였다.
혜연은 고심 끝에 이 옷을 골랐다. 무늬가 없는 웃옷은 깔끔하면서도 맵시가 있고, 긴 치마도 수수하지만 은실로 촘촘히 짜여 있어 수수하면서도 귀티가 흘러 보였다. 또 치맛자락에는 담홍색 해당화 문양이 수놓여 있어 산뜻한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이 옷 괜찮구나.”
엽연채는 거울에 옷을 비춰 보며 말했다.
“새로 지은 여름옷을 진작부터 입고 싶었거든.”
추길은 어느새 엽연채의 머리카락을 묶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살포시 잡아 천천히 빗질을 하자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찰랑거렸다.
“작은새언니.”
이때, 누군가의 가냘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다섯 살 정도 된 유순해 보이는 소녀가 오밀조밀한 말리화 문양이 수놓인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걸어 들어왔다.
역시 말리화가 수놓인 담홍색 대금식 배자를 입고 있는 이 소녀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부드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주묘화였다.
“둘째 아가씨도 가시려고요?”
추길이 물었다.
“응.”
주묘화는 조그만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가도 돼요?”
“물론이죠.”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장을 받은 후 그녀는 진씨 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주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갈 생각으로 말이다. 안 그러면 또 이런 행사에 참석하면서 자기들은 데려가지 않았다며 ‘가족애’ 운운할 테니까 미연에 방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씨와 주묘서는 자신과 함께 외출할 면이 서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엽연채는 당연히 주묘화도 그럴 줄 알았을 뿐, 따라온다면 거절할 이유야 하등 없었다.
주묘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엽연채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백 이낭은 며칠 전부터 주묘화를 엽연채와 동행시켜 유 재상 댁 혼례식 잔치에 참석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진씨 모녀가 알게 될까 봐 감히 그런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이 밝자마자 주묘화의 단장을 마친 후 몰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요. 저도 금방 끝나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주묘화는 침실에서 나와 소청의 원탁 옆에 놓인 아치형 다리가 달린 둥근 걸상 위에 앉았다.
엽연채가 거울을 보니 수괘계垂掛髻(두 갈래로 나누어 쪽을 짓고 양옆으로 늘어뜨린 머리 모양)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갑자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어 누군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 아가씨!”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녹지였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 서서 소리를 쳤다.
“둘째 아가씨, 여기서 뭐 하세요?”
주묘화는 표정을 굳히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마님께서 아가씨께 마님 곁에서 먹을 갈라고 하셨습니다!”
녹지의 말에 주묘화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말리화 문양 손수건을 한층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밖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둘째 아가씨는 오늘 나와 함께 외출하기로 했다. 녹지 네가 마님을 위해 먹을 갈거라! 집안에 먹을 갈 사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녹지는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엽연채가 자신과 대적하는 것은 진씨에게 대적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열불이 났다. 그러나 엽연채의 뒤에 매씨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녹지는 감히 화를 낼 순 없어 그저 냉담한 눈빛으로 주묘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둘째 아가씨, 그럼 가 보세요! 셋째 마님,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주묘화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불안해했다.
엽연채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와 함께 가요.”
주묘화는 입술을 깨물며 눈동자를 정신없이 이리저리 굴리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저… 전 돌아가서 어머니를 위해 먹을 가는 게 좋겠어요. 다음에 또 이런 연회가 있으면 큰언니와 함께 작은새언니를 따라갈게요. 저,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엽연채에게 인사를 올린 후 돌아서서 잰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