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화
온사월도 내심 그녀가 응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득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참, 균이는?”
“균이는 다리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가급적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고 해요. 안 그러면 정말로 다리를 못 쓰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의원이 말하기를 예전처럼 쓸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몸조리를 잘하면 제대로 걸을 수는 있을 거라고 했어요.”
온씨는 아들 생각에 코끝이 시큰거렸으나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이젠 말 잘 듣고 철도 들었으니 안심이 돼요.”
추경은 엽연채를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채야, 또 보자.”
“네.”
엽연채는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다음번에 올 때는 새언니도 데려오는 거 잊지 마요.”
그 말에 추경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슬프고 울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뱃사공이 승선하라고 재촉하자 온사월 모자는 배 위에 올랐고 배는 강물을 타고 저 멀리 떠내려가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장명가의 추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온씨는 마음이 좀 울적해졌다. 이 모습에 엽연채는 주 백야에게 추길을 보내 당분간 장명가에서 지내겠다고 말을 전했다.
주 백야는 그러잖아도 그저께 진씨 모녀가 벌인 소동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던 차라 선선히 그리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 * *
시간이 흐를수록 날씨는 점점 더 무더워졌다.
지난번 엽연채가 사람을 시켜 만든 여름옷이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옷 두 벌과 추길과 혜연의 옷을 두 벌씩 지었고, 여양과 여한의 옷도 두 벌씩 지어 줬다. 그리고 주운환에게는 다섯 벌의 옷을 마련해 줬다.
엽연채는 옷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짜를 세어 보니 어느새 유월이었다. 그러니 주운환은 분명 옥안관 쪽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의 전시 상황은 이곳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설령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황제의 책상에나 전해질 것이었다.
엽연채는 주운환을 생각하느라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유월 열여드레가 되었다. 이날은 바로 엽영교가 출가하는 날이었다.
엽연채는 신행新行(혼인할 때,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거나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것을 뜻함)하는 새색시를 보러 친정에 갔지만, 온씨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와 엽씨 가문은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게다가 그녀는 이혼한 몸이라 남의 집 경사에 참석하기에는 부적절했다.
이날 엽씨 가문은 아주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엽연채와 엽이채가 출가할 때보다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저택 전체가 붉은 비단과 조화造花 장식으로 꾸며져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곳곳에서 오색 비단 끈이 바람에 펄럭였고, 문, 창문 할 것 없이 ‘희囍’ 자 모양의 장식용 전지剪紙가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문과 창문에 전지가 빈틈없이 붙어 있어 아주 다채롭고 화려해 보였다. 작년 엽이채 혼례식 때보다 더 과하게 꾸며져 있는 듯해,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엽영교의 규방으로 걸어갔다.
엽영교는 이미 치장을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봉관을 쓰고 하피를 입은 채 더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소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모.”
엽연채가 그녀에게 걸어갔다.
“연채야, 왔구나.”
엽영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넌 무슨 선물을 준비해 왔어?”
엽연채는 붉은 바탕에 검은 해바라기 문양이 들어간 법랑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엽영교가 상자를 열어 보니 복숭아꽃 장식이 들어간 여의如意와 홍옥 머리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눈이 부시게 곱고 화려하며 정교한 공예 기술로 만들어진 상등품이었다.
“돈 좀 썼겠구나.”
엽영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마음에 쏙 들어. 내일 시댁에 갈 때 이걸 하고 가면 되겠구나.”
“참, 외관 장식은… 누가 한 거예요?”
엽연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엽영교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했겠니. 네 할아버지지! 성대하게 해야 한다고 성화시더라. 오늘 아침에서야 집안이 이렇게 꾸며진 걸 알게 됐어. 난 혼례식 준비를 해야 해서 짬이 나질 않으니 그냥 아버지가 하신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지, 뭐.”
엽연채는 어이가 없었다.
연이어 벌어진 안 좋은 일들 때문에 엽학문은 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해 의기소침해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여식이 떡하니 탐화에게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금세 기가 살아난 그는 혼례식을 최대한 성대하게 치러서 온 도성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물론 엽영교가 탐화와 정혼을 한 뒤 엽씨 가문의 평판이 조금 회복된 것은 사실이긴 했다.
“아가씨, 둘째 아가씨께서 선물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이때, 어린 여종의 목소리가 밖에서 울려 퍼졌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고개를 들어 보니 사람들 사이로 걸어나오는 엽이채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잔뜩 경직된 그녀는 흰 바탕에 검푸른 매화 문양이 들어간, 노란색 옷깃이 달린 대금식 배자를 입었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아름다운 얼굴은 칼로 깎은 듯이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 음울해 보였다.
엽연채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분위기가 점점 더 강심설을 닮아 가는 듯했다.
예전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엽이채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가냘프고 어여쁜 소녀였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지금은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달라 보였다.
엽이채는 두 손으로 검은 칠을 한 배나무 상자를 받쳐 들며 엽영교에게 다가섰다.
“고모. 이건 제가 드리는 혼례 선물이에요.”
“그래, 고맙구나.”
엽영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한 후 상자를 열어 보니 맑고 투명한 벽옥 팔찌 하나가 안에 들어 있었다. 엽영교와 엽연채는 그 팔찌를 보자마자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엽영교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 팔찌는 전에 내가 내기에서 져서 네게 줬던 것이 아니더냐?”
작년에 적성대에 가서 바둑 대결을 보다가 엽이채가 내기에서 이겨 엽영교의 팔찌를 하나 가져갔었다. 그리고 엽이채의 부모는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무려 은화 일만 냥가량의 혼수를 몽땅 잃었고.
“맞아요!”
엽이채는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왜요? 안 됩니까? 전에 저에게 주셨으니 제 것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고모의 혼례 선물로 드리는 거고요.”
그 말에 엽영교는 입꼬리를 샐쭉거렸다.
“되지. 안 될 게 뭐가 있니. 이 팔찌는 내가 아주 아끼던 거란다. 이제 내 손으로 돌아왔으니 정말 기쁘구나. 고맙다.”
엽이채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더니 엽영교를 훑어보았다.
엽영교는 귀해 보이는 진홍색 혼례복을 입고, 머리엔 진주를 상감하고 물총새의 깃을 넣어 만든 봉관을 쓰고 있었다. 양쪽 뺨에 드리워진 순금 술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환하게 비춰 미모는 더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는 행복하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엽이채는 그 모습이 그저 눈에 몹시 거슬릴 뿐이었다.
엽이채는 자신이 준 팔찌를 쳐다봤다. 작년에 이 팔찌를 받은 후부터 재수 없는 일이 끊이지를 않았다.
부모가 내기에서 져서 혼수품을 몽땅 잃게 되었고, 혼삿날에는 혼수품 대신 돌덩이를 채워 넣었다가 도성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장만만이 그 일에 연루되어 간택에서 떨어지고 그 비난을 자신이 받기도 했다. 정말이지 일어나는 일마다 순조롭게 풀리는 경우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이 팔찌를 엽영교에게 돌려줬으니 모든 불운도 엽영교에게 돌려준 셈이다.
게다가 엽연채와 엽영교의 불운은 이미 시작되지 않았는가. 엽이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롱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았다.
‘네 불운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 서자가 응성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주씨 가문은 점점 더 곤궁해질 테고, 어쩌면 도성에서 지낼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엽연채의 말로가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하겠는가?
엽영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엽연채 부부가 혼사를 이어 주었으니 주운환이라는 뒷배가 무너지게 되면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작위와 관직이 박탈된, 몰락한 가문의 여식을 진씨 가문에서 계속해서 잘 대해 주겠는가.
엽연채는 조롱과 광기가 어린 엽이채의 눈빛을 보더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상상은 자유 아닌가. 그런 헛된 상상을 하며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면 되었다.
“아가씨.”
이때, 추길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엽연채는 그녀를 보더니 엽영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모. 전 이만 할머니를 뵈러 나가 볼게요.”
“그래.”
엽영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엽이채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를 규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추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엽승덕 나리께서 오셨어요.”
그러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디에 있느냐?”
“대청에 계셔요!”
두 사람은 주위 손님들을 스쳐 지나가며 대청으로 향했고, 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엽이채도 류아와 함께 그들을 쫓았다.
그들은 모두 저택의 대청에 도착했다.
곧 있으면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오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 진지항이 신부를 맞이하면 이곳으로 와서 작별 인사를 하기 때문에 손님들은 거의 다 이곳에 모여 있었다.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은 친척들과 손님들로 붐볐다. 엽학문과 묘씨는 상석의 녹나무 태사의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중앙에 서 있는 엽승덕을 쳐다보고 있었다.
엽승덕은 조금 하얗게 바랠 정도로 깨끗이 세탁한 둥근 깃이 달린 하늘색 금포를 입고 있었다. 그가 전에 자주 입던 옷이었다. 머리는 옥잠을 이용해 간단하게 상투를 틀었고 수염은 깔끔하게 민 상태였다.
하지만 기품 있고 온화해 보이던 예전의 분위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야윈 모습에 볼은 움푹 패어 있어 좀 궁상맞아 보였다.
“이, 이 못난 놈. 뭣 하러 온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