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두 사람이 떠나자 진씨는 맥이 풀려 자리에 앉은 채로 주묘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주 백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매씨가 직접 나섰으니 그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기는 곤란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한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능력이 없으면 다들 조용히 살면 되었다.
그는 원래 소란 피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씨 모녀가 훌쩍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영 찜찜했다.
“됐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어떻게 황제 폐하께 혼처를 정해 달라고 청한다는 말이오. 성심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라 정말 청한다 해도 꼭 들어주신다는 법도 없소. 어쩌면 그 때문에 집안에 화를 부를 수도 있소.”
그는 그리 말하더니 자기가 먼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황제를 찾아가 주청해서는 안 되었다. 정말로 큰 화를 불러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 백야는 소매를 뿌리치더니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진씨는 줄행랑을 치는 주 백야의 모습을 보더니 화가 나 심한 말을 퍼부었다.
“무능한 작자! 겁쟁이 같으니라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어떻게 자손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저런 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느냔 말이야!
다른 집 할머니들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가문의 번영을 이어 나가기 위해 갖은 희생과 노력을 다하는데, 이 죽지도 않는 늙은이는 가문이 몰락하는 걸 눈을 뻔히 뜨고 지켜만 보려고 하다니……! 그야말로 주씨 가문의 죄인이다!”
* * *
한편, 매씨를 부축하며 문을 나선 엽연채는 그녀의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원에는 활간 한 대가 세워져 있어 엽연채는 그녀가 이 활간을 타고 이곳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매씨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엽연채는 그녀를 부축해 활간에 태웠고, 회색 옷을 입은 두 명의 마마가 앞뒤로 서서 활간을 들고 걸어갔다. 엽연채도 함께 이곳을 떠났다.
매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엽연채는 그녀가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조용히 있었다. 그녀와 말할 엄두 또한 나지 않았다. 괜히 심기를 건드릴지도 모르니 말이었다.
매씨의 처소는 주씨 가문 서남쪽의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은 저택에서 가장 외진 곳이기도 했다. 걸어가면서 보니 정자와 누각들은 무척 황량해 보였고 잡초가 무성했다. 이곳 또한 사람들이 가꾸고 돌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마침내 널찍한 뜰에 도착했다. 외벽은 낡고 허름하며 위에 깔린 검은색 기와는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색이 바랜 녹나무 대문 위로 ‘공거空居’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마마가 문을 열어젖히자 널찍하고 고즈넉한 정원이 엽연채의 눈에 들어왔다. 정원은 깔끔하고 간소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세 칸의 본채와 동쪽으로 네 칸의 곁채가 있었고 서쪽으로 탱자나무가 일렬로 심어져 있었다. 탱자나무 옆으론 낭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낭가 아래에는 덩굴무늬가 들어간 소나무 당의躺椅(누워 잘 수 있는 침대식 의자)와 대리석 탁자가 놓여 있었다.
“저쪽으로 가자꾸나.”
매씨가 낭가가 있는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그러자 회색 옷의 두 마마가 매씨를 그곳으로 모셨고, 그녀가 활간에서 내리자 엽연채는 그녀를 부축해 당의에 앉혔다.
매씨가 말했다.
“마마는 가서 그 물건을 가져오게.”
“예.”
장 마마는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장 마마는 금박 무늬가 들어간 붉은 박달나무 상자를 들고 나왔다.
“이건 내가 주는 첫인사 선물이다.”
매씨의 말에 엽연채는 일단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공손하게 받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님.”
“그럼 그만 돌아가 보거라. 난 좀 쉬어야겠구나.”
“예.”
엽연채는 대답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매씨는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서남쪽을 바라봤다.
“드디어 집안에 인물이 나왔습니다.”
장 마마의 말에 매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출정한 남편을 집에서 기다리며 느낄 고통과 괴로움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주운환이 출정해 있는 동안, 자신이 엽연채를 제대로 지켜줘야 했다. 그래야만 집안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영웅을 볼 낯이 있을 테니 말이다.
* * *
공거를 나온 엽연채와 혜연은 함께 서과원으로 향했다.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을 걸어가던 중에 혜연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성가시게 구니 짜증 나 죽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박달나무 상자를 빤히 쳐다봤다.
진씨와 주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차라리 두 사람이 살인을 하거나 불을 지르면 속 시원하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아예 직접 관청에 고발해 감옥에 집어넣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지는 않고 번번이 소리를 지르고 징징거리며 뻔뻔스러운 짓을 벌였다. 전부 하찮고 사소한 일로 말이다. 발등에 올라온 두꺼비는 사람을 물지는 않지만 꺼림칙하고 짜증나게 만드는 법인데, 진씨 모녀가 딱 그랬다.
“다행히도 오늘 노마님께서 두 사람을 제압하셨네요.”
혜연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노마님께서 너무 엄숙하고 말씀이 없으셔서 보고 있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그러자 엽연채는 피식 웃었다.
“뭐가 무섭다고 그러니? 할머님은 좀 엄숙한 것뿐이지, 정의롭고 올곧은 분이야. 하나도 무섭지 않던데.”
두 사람이 궁명헌 대문으로 들어서자 추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맞으러 나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일상원 쪽에서 또 소란이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어라? 이건 뭡니까?”
추길은 엽연채 손에 들린 상자를 보더니 어리둥절했다.
“이 상자는 어디서 난 거예요?”
“이건 할머님께서 주신 첫인사 선물이란다.”
“어서 열어 보세요.”
추길이 엽연채를 재촉했다.
“그래.”
세 사람은 서차간으로 갔고 엽연채는 나한상에 앉아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을 확인한 그들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반짝였다. 묵직한 박달나무 상자 안에는 붉은 명주 위에 찰랑거리며 움직이는 구슬 장식이 달린 정교하고 아름다운 순금 팔찌가 놓여 있었다.
순금은 눈이 부시게 빛났다. 맑고 투명한 비취 구슬에선 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가 전해졌다. 게다가 팔찌는 아주 정교하고 뛰어난 수공 기술로 만들어져 딱 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추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가씨께서 가지고 계신 장신구 중에도 이것처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어요.”
엽연채가 팔찌를 들어 보니 팔찌의 윗부분에 달려 있는 비취 구슬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흔들려 마치 팔찌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씨 가문에도 이런 귀한 물건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추길은 재차 놀라워했다.
“그래도 주씨 가문이 전에는 명색이 최고의 권문세가였어. 전쟁에서 패했을 때 선대 대노야께서 인의仁義를 지키시는 분이라 가산의 대부분을 팔아 병졸들을 돕는 바람에 이리된 것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 지경으로 몰락했겠어. 어쨌든 괜찮은 것 한두 개는 남겨 두신 게지.”
혜연이 말했다.
“아가씨, 어서 차 보세요.”
추길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다그쳐 엽연채는 팔찌를 손목에 찼다. 금팔찌가 더해지니 하얀 손목이 더욱 보드랍고 매끄러워 보였다.
“참, 아가씨. 황제 폐하께 혼처를 구해 달라는 청은…….”
말을 하던 혜연은 두 눈을 반짝였다.
“마님과 큰아가씨가 공자의 출정을 들먹이며 폐하께서 공자께 진 빚을 이용해 큰아가씨에게 창창한 미래를 만들어 주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방금 전 노마님께서 그건 아가씨가 쓸 수 있게 남겨야 한다고 하셨으니… 그럼…….”
그 빚진 마음을 이용해 황제에게 뭔가를 좀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뜻밖에도 엽연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묘서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 주는 일은 분명 가능했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 이득이 되는 걸 얻기란 불가능해.”
“어째서요?”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는 혜연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셋째 공자께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출정하셨잖니. 내가 주묘서의 혼처를 구해 달라고 청하면 황제 폐하께서는 내가 착해서 시댁 시누이를 아낀다고 생각하실 게다.
그런데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청하면 폐하께서는 내가 공자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려 한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럼 폐하께서는 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테니 내 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아까 할머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건 그저 두 사람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그러신 것뿐이야.”
게다가 자신이 어떻게 주운환의 희생을 이용해 살길을 도모하겠는가. 그런 건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혜연은 조금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추길이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참, 아가씨께서 나가신 뒤 이모님께서 보내신 서찰이 왔습니다. 모레 출발하여 정성으로 돌아가신다고 해요. 모레 추씨 가문으로 배웅해 드리러 가세요.”
“이렇게 빨리 가신다고?”
엽연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그동안은 큰이모와 사촌 오라버니들이 곁에 있어 울적하지 않으셨을 텐데, 이제는 홀로 적적히 지내게 된 것이다.
* * *
이틀 뒤, 엽연채는 온사월과 추경 등을 배웅하기 위해 추씨 가문으로 향했다.
온씨 가문 사람들도 그곳에 와 있었다. 그런데 엽연채는 온남아를 보더니 대번에 표정이 굳어졌다. 온남아가 임신한 지 5개월이 된 배를 받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아이를 잘 가지는 걸까!’
그들은 점심 식사를 한 뒤 온사월과 추경, 추랑 형제를 도성 밖 나루터까지 배웅해 주었다.
추씨 가문 사람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 한 척을 전세 냈고, 이번에 도성에서 시음에 성공한 새로운 술을 여러 단지 배에 실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나루터에서 사람들은 전부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온사월이 온씨의 손을 잡으며 이리 제안했다.
“차라리 우리와 함께 정성에 가서 지내자꾸나. 집안의 주인은 나와 네 조카들이다. 그곳에 가서 일 년쯤 지내다가 내년에 우리가 도성으로 다시 돌아올 때 너도 같이 오면 되잖니.”
온씨도 자신만 생각하면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출정한 사위와 홀로 외로워할 엽연채가 마음에 걸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년에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