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셋째 오라버니 때문에 이 사달이 났잖아요. 지금 황제 폐하께서 셋째 오라버니에게 빚을… 셋째 오라버니를 마음에 두고 계시니 저희가 작은새언니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황제 폐하를 찾아가 혼처를 구해 달라 청을 드리라고 말이죠……. 그런데 새언니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억울했는지 재차 눈물을 흘렸다.
“절 시누이로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빚진 것도 없다고 했어요…….”
“셋째가 죽음을 자초하지 않았다면 집안과 묘서가 이 지경으로 됐겠습니까? 그 애는 묘서에게 빚을 진 것이며 이 집안에 빚을 진 겁니다. 그런데도 셋째 며느리는 인정을 하지 않더군요!”
“에휴, 빚을 졌네 아니네 하는 말은 하지 마시오. 가족끼리 서로 도와야지.”
주 백야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 함께 이 난관을 극복…….”
그런데 이때, 하늘을 뒤흔들 듯 요란한 ‘쾅’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주 백야의 말허리가 동강 잘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매씨를 쳐다봤다. 방금 전 이 소리는 유창목癒瘡木으로 만든 매씨의 용머리 지팡이가 바닥에 세차게 부딪히며 내는 소리였다.
“언제부터 출정이 큰 죄가 되어 버린 건지 난 모르겠구나!”
매씨는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그건…….”
주 백야와 진씨 모녀의 낯빛이 확 변했다.
“할머니 그게 아니라… 네, 오라버니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면 좋은 일이죠……. 그런데 지금은 죽으러 간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되면 저희 가문은… 악!”
주묘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씨는 ‘짝’ 소리를 내며 주묘서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고, 주묘서는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주묘서는 왼쪽 얼굴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져 한쪽 얼굴이 마비된 것 같았다. 머릿속에 계속해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입가에 피도 흘러내렸다.
“묘서야…….”
깜짝 놀란 진씨는 얼른 주묘서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주묘서의 얼굴과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본 진씨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내 딸을 때리다니!’
아무리 매씨가 무서워도 화를 내야 했다.
“어머님… 어떻게!”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그러나 매씨가 먼저 큰소리를 치며 진씨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아라. 이 대저택이 어디서 난 것이냐? 너희들이 지금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사는 게 누구 덕이냐? 다 주씨 가문 선조들이 변방에 가서 목숨을 던지며 얻어 낸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일상원 전체에서 진동이 느껴졌고, 주 백야는 가슴이 떨리며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진씨는 이를 꽉 물었고, 그녀의 품에 기대어 있는 주묘서는 화가 나서인지 아파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었다. 모녀는 분이 전혀 가라앉지 않았지만 감히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매씨는 계속해서 사리를 밝혔다.
“출정해서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장군이 어디 있겠느냐? 누가 감히 패배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패배한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목숨을 잃는다는 걸 똑똑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백성을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말이다!”
주 백야는 온몸을 덜덜댔다. 전장에 출정하여 싸웠을 때의 장면과 형제들이 눈앞에서 죽어 가던 장면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더없이 참혹하고 애통했다. 그러니 더 이상 자신의 가족들이 그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힘겹게 영광을 얻었을 때 너희들도 함께 그 영광을 누렸다. 그건 너희들이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죽을 때도, 영광을 잃을 때도 너희들은 그들의 가족이다! 그런데 어째서 영광을 가득 안고 돌아왔을 땐 그걸 함께 누리고, 그들이 패배했을 땐 고통을 함께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냐?”
매씨의 훈계에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화가 가라앉지 않아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어머님…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셋째가 그런 결정을 할 때… 저희와 상의한 적 있습니까? 셋째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해 집안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그런데 저희가 왜 그 애와 함께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까!”
이때,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흰 바탕에 짙은 푸른색 문양이 들어간 찻잔 하나가 진씨의 발 앞으로 날아들어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매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이치를 따졌다.
“그 애는 장원 급제를 하기 전에도 너희들과 상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 영광을 함께 누렸느냐?”
진씨는 말문이 막혔고 낯빛이 새파래졌다.
“너희들은 그 애가 어릴 때부터 나 몰라라 했다. 그 애는 자기 생각대로 결정해 과거 시험을 봐서 장원이 되었고, 그리해서 얻은 영광은 뜻밖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 애는 너희들에게서 땡전 한 푼 받지 않았다. 그러니 그 애가 그런 영광을 얻는 데 있어 너희들에게 조금의 빚도 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 어머니……. 저희는 한 가족입니다…….”
주 백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빚을 졌느니 아니니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가족끼리 빚을 지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습니까? 서로 돕는 거죠.”
“맞습니다……. 흑흑…….”
주묘서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한쪽 뺨이 너무 아파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고 또 억울한 마음에 진씨의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가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어째서 절 도와줄 수 없다는 거예요?”
주묘서를 끌어안은 진씨도 너무 억울해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리 가여운 묘서…….”
“그 애가 가엾다고?”
매씨는 기가 찬 나머지 가소로운 웃음을 지을 뻔했다.
“묘서는 자신을 아껴 주는 부모와 형제가 있다. 가여운 건 셋째의 내자이지. 남편은 변방으로 떠나고 혼자 남아 외롭게 버티고 있다. 황제 폐하께 청을 드릴 기회는 한 번뿐이니 그 애가 쓰도록 남겨 둬야지. 이렇게 가여운 아이에게서 너희들은 어찌 기회를 빼앗아 가려는 것이냐?
방금 가족끼리 서로 돕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느냐? 너희들은 이 아이의 가족인데 이 아이는 너희의 가족이 아닌 것이냐?”
그 말에 진씨와 주묘서의 얼굴이 굳었다.
진씨가 말했다.
“저희 집안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가면 앞으로 셋째 며느리를 도와줄 것이고 집안도 도울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집안은 무너질 겁니다. 이건 주씨 가문의 운명이 걸린 대사입니다.”
“진작에 무너지지 않았느냐?”
매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여식을 좋은 곳에 시집보내 집안을 부귀하게 만들겠다는 말이냐? 우리 주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 모양이 된 것이냐?
우리 주씨 가문은 역대 조상들이 출정하여 적을 무찌르고 목숨을 바쳐서 잠깐의 영화를 봤던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계속 부귀하게 지내는 것이고, 능력이 없으면 기운이 다한 것이니 부귀한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허상에 집착하지 말고 능력껏 살거라.”
그 말을 듣고 있던 진씨와 주묘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집착도 하지 말고 제 능력껏 살라고?’
“비양이는?”
매씨가 갑자기 이리 물었다.
진씨는 주묘서를 안고 바닥에 비스듬히 앉아 훌쩍거리는 데 여념이 없는지라 주 백야가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처소에 있을 겁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 불러오겠습니다. 녹지야, 가서 첫째 내외를 불러오거라. 학해도 데려오고.”
그는 그리 분부하고는 매씨에게 주학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님은 아직 비양이의 내자와 학해를 못 보셨죠? 학해는 어머님의 증손자입니다. 아주 영특해요.”
주 백야는 매씨가 어린 주비양을 아주 예뻐했었기에 그와 증손자를 보면 아주 기뻐하리라 여겼다.
잠시 후, 주비양이 강심설과 함께 걸어 들어왔고 강심설은 주학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엽연채는 주비양을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 그는 바짝 야위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아주 초췌해 보였다. 아래턱엔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매씨는 패기 넘치던 적장손이 지금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 그녀의 시선은 옆에 있는 젊은 부인에게 향했다. 스물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여인은 국화 문양이 들어간 누르스름한 배자를 입었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예쁜 편이었다. 다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 전체적으로 사람이 우중충해 보였다. 그래도 옆에 있는 어린 사내아이는 귀엽고 똘똘해 보였다.
“할머님.”
주비양 부부가 매씨에게 예를 올리자 매씨는 입을 오므리고는 주비양을 쳐다보며 물었다.
“셋째도 출정했는데 너는 이러고 있는 것이냐?”
주비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심설은 매씨의 말을 듣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지금 자신의 남편더러 주운환을 따라 죽으러 가라고 한 것인가? 그러나 그가 죽으러 간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은 아들을 지키며 잘 살 수 있었다.
매씨의 눈빛엔 순간 실망의 기색이 비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그럼 그리 지내거라. 네가 즐겁게 산다면 그걸로 됐다.”
주비양은 좀 전보다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매씨는 다시 진씨와 주묘서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돌아가서 『가규家規』를 서른 번 필사하거라.”
진씨는 수치심과 분노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가규』를 필사하는 벌을 받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30년 가까이 주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지냈고, 시집온 후로 집안에서 큰소리를 떵떵 치며 지내 왔다. 특히 주씨 가문이 몰락하자 매씨는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혀 지냈고, 주 백야는 집안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아 그녀는 이 집안의 독재자로 군림해 왔다.
그래서 여태껏 그녀가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지, 감히 그녀에게 벌을 내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가규』를 필사하는 벌을 받은 것이다. 그야말로 아들과 며느리를 비롯한 아랫사람들 앞에서 사람의 뺨을 후려갈긴 다음 땅바닥에 던져 흠씬 짓밟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셋째 새아기는 날 부축해 처소로 돌아가자꾸나.”
매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엽연채에게 말을 건넸다. 엽연채는 순간 어리둥절해했으나 얼른 앞으로 다가서며 답했다.
“예.”
강심설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매씨가 큰손주며느리인 자신을 부르지 않고 엽연채를 부를 줄은 생각지 못했기에, 질투심이 불쑥 치솟으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엽연채는 앞으로 다가가 매씨를 부축해 일으킨 다음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