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7화
주 백야는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그도 이런 이치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진씨가 엽연채를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너도 아는구나!”
진씨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셋째가 죽음을 자초하며 변방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문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네 큰시누이가 혼담을 꺼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다 셋째의 잘못이다! 그러니 네가 묘서에게 보상해 줘야 한다.”
주 백야는 진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자 안절부절못했다.
“아휴, 진정하시오. 일이 있으면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야지. 지금 이 아이에게 보상하라고 해도 이 애가 어찌 보상한단 말이오! 어쨌든 묘서의 혼사 문제는 해결할 수 없소.”
“해결할 수 없다니요?”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잡았다.
“지금 황제 폐하께선 셋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으냐. 네가 가서 황제 폐하께 큰시누이의 혼처를 구해 달라고 청을 드리거라.”
엽연채뿐만 아니라 주 백야와 주묘서도 깜짝 놀랐다. 진씨가 이런 묘안을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황제가 주운환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출정을 명한 것은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황실의 의지를 표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황제는 주운환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주운환의 아내인 엽연채가 가서 청을 드린다면 황제가 이에 응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이 기회를 놓치고 주운환이 그곳에서 죽게 된다면 백성들은 주씨 가문에 분노하고 그들을 멸시할 것이다. 그리고 주씨 가문은 15만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죄, 무능하면서 출정의 기회를 차지하는 바람에 옥안관과 서남의 열두 개 주를 잃어 대제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죄를 물어 큰 책임을 감당해야 하리라.
설령 그때 가서 황제가 혼처를 구해 준다 해도, 혼처로 정해진 상대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게 자명했다. 주씨 가문 때문에 옥안관이 함락됐다는 이유를 들어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 않겠는가.
백성들 또한 주씨 가문을 혼처로 정해 줬다며 황제를 어리석은 군주로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면 황제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주씨 가문을 버릴 것이고, 주씨 가문에 일말의 동정심이나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황제에게 혼처를 구해 달라고 청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후에 집안에 일이 생긴다 해도 정혼한 상대방은 감히 혼사를 물릴 수 없을 것이고, 황제 또한 혼처를 정해 준 뜻이 먼저 있었으니 구실을 만들어 주묘서를 감싸 주고 어떤 이유든 간에 파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어쨌든 황제는 주운환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 놓고 보상은 못 하겠지만, 앞으로 주묘서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진씨는 점점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일만 성사되면 주묘서의 앞날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을 것이다.
“흠.”
주 백야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제를 알현해 청을 드리면 분명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 백야는 놀랍고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맞소. 좋은 생각이오! 셋째야, 네가 묘서를 도와주거라!”
그러자 엽연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진씨의 의중을 파악한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불가합니다.”
“그게 무슨…….”
주 백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 불가하다는 것이냐?”
그는 미간을 점점 더 심하게 찌푸렸다. 엽연채가 거절한 것이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씨도 인상을 썼다. 그녀는 엽연채가 쉽게 응하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집안이 지금 이 지경이 된 건 전부 셋째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셋째가 묘서에게 해 주는 보상이다! 게다가 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가면 앞으로 네가 볼 이득도 적지 않을 게다.”
“아가씨에게 보상을 한다고요? 아가씨가 무슨 손해를 봤습니까?”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손해가 없어요?”
주묘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엽연채에게 증오의 눈빛을 보냈다.
“셋째 오라버니만 아니었으면 제가 혼처를 못 구했겠어요?”
“어머, 전에는 꼭 혼처를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요.”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어갔다.
“부군께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전에도 아가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집안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뿐이에요. 부군이 집안을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책망하기 전에 일전의 영예를 누가 가져다준 건지 생각해 봐야죠.
지금 이 상황은 마치 그동안 매일 아가씨에게 은화 한 냥씩을 주다가 갑자기 안 주니까 원망을 받는 것 같네요. 안 그래요? 제 부군은 누구에게도 빚진 게 없어요.”
“이, 이……!”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방자한 것.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셋째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주 백야도 그녀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에휴, 이 일은… 일단 잘잘못을 논하는 건 미뤄 두자꾸나. 넌 어떻게 빚을 졌느니 아니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냐. 우린 한 가족인데 그런 걸 따진다는 말이냐? 지금 네 큰시누이가 혼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올케인 네가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 지금 네게 이리 간곡히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너는 가족이면서 어찌……. 에잇!”
주 백야는 기분이 몹시 언짢고 마음이 상해 한탄을 금치 못했다.
“맞아요. 내 새언니잖아요……. 그런데도 안 도와주다니요.”
주묘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엽연채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하더니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거라. 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게냐?”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 백야와 진씨는 깜짝 놀랐다. 이어 온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더니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엽연채가 궁금해서 밖을 쳐다보니 백발이 성성한 한 노부인이 서 있었다. 비취가 상감된, 흐릿한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비단 말액을 머리에 두른 그녀는 수문壽紋이 들어간 갈색 배자 차림으로,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부인은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 어머니!”
“어머님!”
주 백야와 진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주묘서도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이 내 할머니라고?’
한 저택에서 살고 있고 자신에게 할머니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오랫동안 은거하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 자체를 잊고 지낼 때도 있었다. 할머니를 제대로 본 것은 9년 전으로, 그때 주묘서는 겨우 일곱 살이었기 때문에 현재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할머님.”
엽연채는 매씨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
매씨는 조금 처진 눈으로 엽연채를 힐끗 쳐다봤다. 겨우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눈앞의 소녀는 아주 아리따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대범하고 강건한 기개를 풍겼다.
예전이었다면 매씨는 과하게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여인은 죽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엽연채는 주씨 가문이 나락에 빠져 있는 동안, 주운환이 가장 힘이 없을 때도 단 한 번도 꺼려하지 않고 그 시기를 함께 견뎌 온 사람이었다.
그 후, 미천한 서자 부인의 신분에서 귀한 장원의 부인이 되어 구름 위에 떠 있다가 또다시 지금의 처지로 추락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주운환을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매씨는 그녀가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어 매씨는 오래전에 세상을 뜬 엽씨 가문 대노야도 떠올랐다. 그는 주씨 가문과 친분이 전혀 없었지만, 주씨 가문 영웅들이 그런 최후를 맞게 된 걸 차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자신의 증손녀를 주씨 가문으로 시집보내 도와주려 했다.
그런데 결국 원래 시집오기로 정해졌던 그 증손녀는 허영에 들뜬 자라 줄행랑을 쳤고, 대신 눈앞에 있는 엽연채가 시집을 오게 됐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엽연채의 품성이 당시의 엽 대노야와 가장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의 의지를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두 가문은 혼인을 통해 서로를 돕겠다는 초심을 지킬 수 있었다.
‘모든 건 다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나 보구나.’
그러니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매씨는 그런 생각을 하더니 저도 모르게 진씨에게 시선이 향했다.
진씨는 민주에서 아주 유명한 학자 가문 출신이자 대갓집 규수이며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생겼지만, 몇 년 못 숨기고 본성이 탄로 났다. 알고 보니 교양과 체면은 전부 개나 줘 버린 여자였다.
매씨는 마마에게 부축을 받아 탑상으로 걸어왔다. 진작에 자리에서 일어난 진씨와 주 백야는 몸을 숙인 채 하좌로 걸어갔다.
진씨는 자리에 앉은 매씨를 흘깃했다. 매씨는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그 자리에 앉았을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굽실거리게 했다. 이에 진씨는 매씨 때문에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주 백야의 몸은 바짝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매씨에게 물었다.
“왜, 난 나오면 안 되느냐?”
매씨가 냉담한 눈빛으로 주 백야를 쓱 쳐다보자 주 백야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아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 백야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운 게냐?”
매씨가 물었다.
진씨는 입을 오므린 채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반면, 매씨를 알지 못하는 주묘서는 그녀가 그런대로 온화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동시에 자신은 그녀의 적장손녀이며, 지금 이 일은 주씨 가문의 운명과 관계된 일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주묘서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이어 ‘쿵’ 소리를 내며 매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 절 위해 나서 주셔야 합니다!”
매씨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반문했다.
“나서다니?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느냐?”
“원래 집안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셋째 오라버니가 갑자기 출정을 청했습니다. 사람들 모두 오라버니가 그곳에 죽으러 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저에게… 혼담을 꺼내는 이가 한 명도 없습니다.”
“에휴.”
주묘서가 울며 하소연하자 주 백야는 옅은 한숨을 쉬며 뒷짐을 졌다.
딸이 먼저 운을 떼자 진씨도 그녀를 따라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저희 주씨 가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몰락하거나 이전보다도 못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갈 수만 있다면, 옥안관 쪽에 정말로 일이 생기더라도 집안에 도와줄 사람이 생길 테니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겁니다. 이건 저희 주씨 가문의 운명이 걸린 대사입니다!”
그러자 매씨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쩌고 싶은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