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이튿날, 진 부인은 엽씨 가문에 찾아가 혼사를 상의했다. 진지항과 엽영교 모두 나이가 적지 않으니 더 미루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혼례식 날짜를 한 달 뒤인 유월로 정했다.
엽연채가 방금 막 엽영교와 진지항의 청첩장을 받았을 때, 추길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청첩장이 또 왔습니다.”
“음?”
엽연채가 건네받아 보니 ‘희囍’ 자가 새겨진 진홍색 청첩장이었다. 그녀는 청첩장을 열어 보았다.
“청첩장이 또 왔어요?”
혜연이 차를 들고 걸어오다가 궁금해했다.
“누가 보낸 거예요?”
“유 소저야.”
* * *
그 시각 일상원.
진씨는 침울한 표정으로 탑상에 앉아 있었고, 주묘서는 하좌에 앉아 새파란 얼굴로 손수건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나 봤느냐?”
녹엽은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하좌에 서서 고했다.
“물론입니다. 한데 매파 고씨가 요즘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진씨는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주운환이 출정한 후 진씨는 주묘서의 혼사 때문에 초초해서 입술이 다 부르틀 지경이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던 진씨는 다시 녹엽을 보내 매파 고씨를 불러오려고 했다.
많은 일을 겪고 나니 매파 고씨가 전에 그녀에게 소개해 줬던 무슨 후부 정실부인의 차남, 국자감 제주祭酒의 적자 등도 이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파 고씨를 불러와 서둘러 혼사를 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녹엽을 보냈더니 고씨가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정말로 시간이 나지 않는 거라면 하루나 며칠 정도 기다려 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파 고씨는 그저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분명 정국백부 혼사는 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매파 고씨의 반응에 진씨와 주묘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수년 전, 진씨는 매파 고씨를 불러 혼처를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매파 고씨는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한 뒤 다시 부르자 그제야 정국백부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물론 진씨와 주묘서는 그녀가 소개해 준 혼처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다 거절하긴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지금 매파 고씨가 또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진씨 모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주씨 가문이 예전의 그 몰락한 가문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씨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주묘서가 둔하다 할지라도 그녀 또한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좀 더 지나면 시집갈 필요도 없겠죠. 흑…….”
주묘서는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열여섯 살인데 혼담을 꺼내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도 이 판국인데, 주운환이 옥안관에서 패하면 가문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질 테고, 그럼 시집가기란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진씨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하좌의 녹엽에게 분부했다.
“나리를 뫼셔 오너라.”
녹엽은 어리둥절해하더니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주 백야가 비틀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전에 비해 몰라보게 야위었으며, 얼굴은 더욱 우울하고 초췌해 보였다.
주 백야는 안으로 들어와 주묘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탑상에 앉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겠습니까? 보세요. 저희 가문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진씨는 그리 말하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제 매파조차도 저희 가문 혼사를 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 백야는 마음이 더욱 괴로워져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에휴……. 당분간은… 좀 참아 봅시다.”
“뭘 참는다는 말입니까? 참으면 참을수록 더욱 분하고 억울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참으면 저희 가문은 완전히 끝장나고 말 거예요!”
진씨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하자 주 백야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소? 그런 넋두리를 하려고 날 부른 것이오?”
진씨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나리는 가족들을 생각하셔야지요. 셋째는 끝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말려들게 했어요. 하지만 나리에겐 첫째와 둘째, 묘서, 묘화, 학해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피해를 볼 수는 없다고요!”
“에휴…….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소?”
주 백야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에게 방법이 있었다면 9년 전 그 일이 벌어진 후 집안이 이 지경으로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주씨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묘서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주 백야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며 왜 이야기가 갑자기 주묘서 쪽으로 흐른단 말인가? 주묘서가 어떻게 가문을 구한단 말인가?
“묘서가 명문대가로 시집갈 수 있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도와줄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나도 묘서가 명문대가에 시집가길 바라오. 하지만 그쪽에서 원하겠소? 누가 묘서를 명문대가로 시집보낼 수 있겠소!”
“셋째 며느리요. 그 아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진씨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어도 다시는 엽연채 덕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딸아이를 위해 지금으로선 억울해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 애가 뭘 할 수 있겠소? 그렇게 말하는 부인이 직접 그 애를 찾아가 보시오!”
주 백야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더 신경 쓸 기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녹지는 눈치가 빠른 아이라 얼른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 * *
다시 궁명헌.
엽연채는 붉은색 청첩장을 들고 있었다. 엽영교와 진지항의 청첩장이었다. 그 청첩장을 보고 있으니 엽연채는 대단히 흐뭇하고 기쁜 마음이었다.
추길과 혜연은 한쪽에 서서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영교 아가씨는 언제 출가하세요?”
“유월 열여드레에.”
“참, 유씨 가문 청첩장도 받지 않으셨어요? 날짜가 겹치지는 않나요?”
엽연채는 추길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안 겹쳐. 유씨 가문 혼례식은 유월 스무날이라 이틀 늦으니까.”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녹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셋째 마님, 백야께서 부르십니다.”
물론 엽연채를 부른 사람은 진씨였다. 하지만 진씨와 엽연채는 얼마 전 감정에 골이 생기지 않았는가. 지금 진씨가 엽연채를 불렀다고 하면 그녀 쪽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녹지는 주 백야가 불렀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래.”
엽연채는 대답을 하고선 들고 있던 청첩장을 내려놨고 혐오로 가득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녀는 이 주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점점 더 귀찮고 짜증이 났다.
엽연채가 침상에서 내려와 문을 나서자 혜연이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잡초가 무성한 서과원을 지나 금세 일상원에 도착했다.
회랑에 서 있던 녹엽은 엽연채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조롱박과 ‘복福’ 자 문양이 들어간 발을 걷어 올리며 고했다.
“셋째 마님이 오셨습니다.”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씨와 주 백야는 탑상에 앉아 있었고, 주묘서는 진씨 곁에 놓인 수돈에 자리했다. 주묘서는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눈시울을 붉힌 채 손수건을 비틀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엽연채는 무덤덤한 어조로 인사했다.
진씨는 자신에게 쌀쌀맞게 구는 엽연채를 보자 속이 뒤틀리고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는 주묘서의 혼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저 입을 오므린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
그러나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주묘서가 진씨를 잡아당겼고, 주 백야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씨는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작년 이달에 네 둘째 시누이의 생일이 있었다. 그때 네가 큰시누이의 혼처를 알아봐 준다고 하지 않았니.”
엽연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진씨의 낯짝이 자신의 인생관을 뒤흔들 만큼 두껍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어 엽연채가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으며 반문했다.
“어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진씨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네 큰시누이의 혼사 말이다! 큰시누이뿐만 아니라 둘째 시누이도 나이가 적지 않다. 넌 올케이니 어쨌든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죠, 나리?”
물론 신경 쓰는 것은 주묘서의 혼사였지만, 이런 때엔 주묘화도 끌어들여야 가문의 대사처럼 보여 엽연채에게 부담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주 백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소. 온 가족이 함께 도와야지.”
그러자 엽연채는 ‘픽’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작년에 저희가 큰아가씨에게 혼처를 구해 드리지 않았나요? 탐화 말이에요! 하지만 어머님은 탐화마저도 눈에 차지 않으셨으니, 정말이지 큰아가씨의 혼사는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엔 그보다 더 좋은 남편감은 없거든요! 어머님과 큰아가씨는 그분도 원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진씨는 엽연채가 또 이 이야기를 꺼내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주묘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엽연채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붓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때 진지항은 탐화가 아니지 않았던가.
주 백야는 진씨와 주묘서를 보고 있으니 자신이 다 낯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엽연채가 진씨 모녀에게 쏘아붙이며 그들의 체면은 조금도 살려 주지 않자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어 한숨을 쉬며 무마했다.
“에휴, 다 한 가족이다. 가족끼리 티격태격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지만,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것이니 언급하지 말거라!”
그러자 엽연채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어두워졌다.
“흥!”
진씨는 엽연채의 기세가 꺾이자 득의양양함과 비웃음이 섞인 눈빛을 번뜩이며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엽연채에게도 두리뭉실하게 일을 수습하는 주 백야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 것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번 자신과 주묘서가 진지항 일로 억울함을 당했을 때, 주 백야는 꼭 이런 식으로 일을 수습하며 끊임없이 셋째 그 빌어먹을 종자를 두둔했었다.
“네 큰시누이 혼사 말이다. 네 벗이나 친척 중에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네 큰시누이에게 소개해 주거라.”
주 백야의 이 말에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어머님도 큰시누이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지 못하시는데 제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희 가문이 어떤 처지입니까? 저도 주씨 가문 사람이라 사람들이 전부 저를 멀리 피하는데, 어디 혼사에 응하려고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