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55화 (355/858)

제355화

궁명헌을 나온 추경이 서쪽 수화문 밖에 도착하자 마차의 끌채 앞에 앉아 있는 추랑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괜찮은 거죠?”

추랑이 끌채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그래.”

추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는 괴로움과 씁쓸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방금 전 엽연채는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눈엔 오직 자신만 담겨 있었을 것이다.

“가요, 형님!”

추랑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 * *

추경이 떠나자 정원은 다소 조용해졌다.

“연채야.”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엽영교가 백합 문양이 들어간 반투명한 둥글부채를 들고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 가셨던 거 아니었어요?”

“안 갔어. 너랑 거리 구경 가려고.”

엽영교는 헤헤 웃으며 대꾸하더니 돌의자에 앉았고 엽연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요.”

엽연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엽영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안 하지만 지금 엽연채의 마음이 아주 괴로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한 최대한 그리해야 했다.

잠시 후, 엽연채가 밖으로 나왔다.

“가자.”

엽영교는 엽연채의 팔짱을 꼈고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참, 고모. 국수는 언제 먹게 해 줄 거예요?”

그 말에 엽영교는 비단부채로 얼굴을 살짝 반쯤 가리며 어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곧.”

뒤에 있던 옥패가 말했다.

“마님께서 더는 미루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진씨 가문 쪽에서도 서두르고 있고요. 지금 길일을 고르고 있어요. 빠르면 다음 달이고 늦어도 팔월에는 혼례식을 치를 겁니다.”

“넌 무슨 말이 그리 많니.”

엽영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그녀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 엽영교가 진지항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랬다. 혼인은 대부분의 경우 조건만 맞으면 성사되기 때문에 당사자가 진정으로 서로 좋아하기는 어려웠다.

“가자, 어서.”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당겼다.

“우리 어디부터 갈까? 책방? 너 전에 화본 보는 걸 좋아했잖아.”

“지금도 좋아해요. 우선 책방에 갔다가 밥을 먹으러 가요. 그런 다음 자수 상점에 가서 자수실을 고르는 건 어때요?”

두 사람은 함께 문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랐고 이각쯤 가니 도성 중심에 도착했다. 마차가 책방 앞에 멈춰 서자 엽연채와 엽영교는 마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화본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엽영교가 난초가 그려져 있고 붉은색 표지가 씌워진 작은 책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미채도 보고 있다고 하더구나.”

엽연채는 그 서책을 집어 들고선 책장을 넘겨 보았다.

“영……. 엽 소저.”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진지항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엽영교를 보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저.”

“진 공자.”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네는 엽영교의 아리따운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진지항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의 정혼녀를 만나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보니 주운환이 떠올라 마음이 좀 편치 않았다.

지금 한림원 사람들은 모두 주운환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며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감히 드러내 놓고 이죽거리지는 못했지만 뒤에서는 아주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특히 조범수가 그랬는데, 비웃음과 고소해하는 감정이 섞여 있는 그 늙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 대 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운환이는 똑똑한 사람이니… 저보다도 훨씬 똑똑한 사람이니 분명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네.”

진지항의 위로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리 물었다.

“진 공자, 어디 가시는 길이었어요?”

“그냥 화선지를 좀 사러 가는 길이었어요.”

진지항은 하하 웃으며 답하고는 역시 물었다.

“두 분은요?”

“화본을 사려고 왔어요.”

엽연채의 대꾸에 진지항이 다른 곳을 추천했다.

“화본이요? 여긴 화본 종류가 많지 않아요. 앞에 있는 보묵재寶墨齋로 가는 편이 나아요. 지난번에 붓과 먹을 사러 그곳에 갔었는데, 화본이 꽂힌 커다란 책장이 세 개나 있더군요. 온갖 종류가 다 있었어요. 갑시다, 보묵재로요.”

근처에 있던 서점 주인과 점원은 분노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고 엽연채와 엽영교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대놓고 남의 장사를 방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지항이 친절하게 안내하니 따라나서지 않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시끌벅적한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걸어와 그 앞을 가로막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저.”

그 사람은 서른 살 가까이 되어 보이는 잘생긴 사내였다. ‘복福’ 자 문양이 들어간, 둥근 깃이 달린 회색 금포를 입은 그는 복잡한 얼굴로 엽영교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깜짝 놀란 엽연채는 엽영교에게 저절로 시선이 향했다.

엽영교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 남자는 바로 벽수루의 주인 여빈이었다. 지난번에 그와 선을 본 날, 그의 딸이 자신에게 바퀴벌레를 선물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여빈은 엽승강의 친한 벗이기 때문에 당시 엽승강은 두 사람을 연결해 주려고 갖은 애를 썼고, 묘씨에게 잘 생각해 보라고 하며 두 사람의 혼사가 성사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진지항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여빈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무슨 일이죠?”

엽영교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 그저 소저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 것뿐입니다.”

여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운 표정으로 진지항을 한 번 쳐다봤다.

“소저께서는 분명 저와 선을 봤었습니다. 잘 생각해 본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원치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 나중에야 소저가 이번 과거 시험의 탐화와 정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소저가 더 좋은 조건의 사내에게 돌아섰다는 걸 알게 됐죠.

예, 물론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겠죠. 저는 일개 상인에 불과하고 게다가 후처로 들인다는데, 어떻게 탐화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여빈은 그리 말하며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엽영교는 그 말에 화가 나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 여빈이라는 자는 정말로 가증스러웠다. 지금 정중한 모습을 꾸며 내면서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말만 내뱉고 있지 않은가.

여빈의 말뜻은, 첫째, 엽영교는 재물을 탐하여 자신과 혼인하기로 약속했지만 더 좋은 조건의 사내가 나타나자 곧장 그 사내에게 달려갔다는 것이고, 둘째, 엽영교는 상인의 후처로 들어갈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탐화에게 시집을 간다고 말을 바꿨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을 심지어 진지항 앞에서 해대니 엽영교는 낯빛이 더욱 퍼렇게 질렸고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연히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다 싶었다. 그의 입은 모질었지만 그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분명 자신은 그와 선을 봤었지만 결국 진지항을 선택했다.

“그쪽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때, 뜻밖에도 진지항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뎌 엽영교 앞을 막아섰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여빈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소저께서 그쪽과 선을 보긴 했지만 그쪽과 정혼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당신을 거절하면 안 되는 겁니까? 게다가 그쪽 여식은 소저에게 바퀴벌레까지 선물했다면서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런 불구덩이에 뛰어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저께서 그쪽을 선택하지 않은 건 그쪽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썩은 사과와 멀쩡한 사과가 함께 있는데 누구든 멀쩡한 것을 고르지 않겠습니까?”

여빈은 진지항이 그의 집은 불구덩이고 그는 썩은 사과라고 말하자 잘생긴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빈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탐화께서는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않나 보군요. 엽 소저의 가세와 평판으론 상인의 후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진 공자께서는 소저를 원하시나 보군요.”

“저를 높이 평가해 줘서 정말 고맙군요. 하지만 전 본디 그런 사소한 것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박하고 선량하며 부지런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여 공자, 함부로 자신을 낮추고 비하하지 마세요. 상인도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엔 다 같은 사람이니 자신감 좀 가지세요.”

진지항의 대꾸에 여빈은 한층 짜증이 치밀었고 불만이 샘솟았다. 그는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내면 진지항이 엽영교를 차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여인이 더 좋은 조건의 사내에게 시집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체면을 구긴 쪽은 자신이 되었다. 여빈은 대꾸할 말이 없어 거북한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탐화의 말이… 옳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풀 죽은 모습으로 걸어갔다.

“소저, 괜찮습니까?”

진지항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사람이 방금 전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자신을 염려하는 진지항의 모습을 보고 엽영교의 조그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이렇게 앞을 막아서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일까. 그가 자신을 보호해 주자 마음이 따뜻해지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도 모르게 묘기화와 정혼을 했던 그 몇 년의 기간이 떠올랐다. 전에는 늘 자신이 그의 앞을 막아섰기에, 자신에게도 누군가의 뒤에 서서 보호를 받고 살뜰히 보살핌을 받는 날이 올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네.”

엽영교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지항은 헤벌쭉 웃으며 앞장섰다.

“그럼 어서 서점으로 가요!”

엽연채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들은 서책을 산 다음 같이 점심을 먹고 또 자수실을 고른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진지항은 오늘 엽영교를 보고 나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진 부인과 진무를 재촉했다.

진 부인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방으로 돌아가 진무와 의논을 했다.

“주 공자를 보고 엽씨 가문과 사돈을 맺은 건데 그 공자가 그런 선택을 할 줄은…….”

“됐소. 혼사를 물리고 싶은 거요?”

진무는 찻잔을 들며 그녀를 쏘아봤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성사된 혼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 마음이 편치 않은 것뿐이에요.”

진 부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 공자가 우리 집안에 가져다준 게 적소? 부인은 내가 어떻게 시랑 자리를 얻게 됐는지는 생각도 안 하나 보오? 황제 폐하께선 주 공자에게 보상을 해 주고 싶으셨지만, 주 공자가 관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우리가 인척이라는 걸 생각해서 그 보상을 나에게 돌리신 것이오.

그뿐만 아니라 난 결코 주 공자가 죽으러 갔다고 생각하지 않소. 주 공자는 생각이 짧은 사람이 아니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아들이 그 소저를 좋아한다는 것이오.”

“그래요. 그럼 서둘러 날짜를 정하도록 하죠.”

진 부인은 진무의 말을 잠자코 듣더니 자기 아들이 엽영교를 좋아하며, 또 엽영교가 인물도 인품도 괜찮다는 생각이 다시 들어 마음을 놓았다. 기왕 결정을 내렸으니 서둘러 혼사를 치러야 했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품에 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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