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4화
엽이채가 음침한 얼굴로 반박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 부군은 이제 겨우 스물한 살에 불과해! 앞길이 창창하다고! 다음번엔 분명 합격할 거야. 애석한 사람은 형부지. 소년 영재인데… 쯧쯧,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다니 말이야.”
“너와 숙모, 제부에게 좀 물어봐야겠구나. 왜 제 부군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 거죠?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게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요?”
엽연채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손씨는 냉소하며 되물었다.
“죽으러 간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황제 폐하께서 친히 봉한 서정장군이 서남으로 가서 옥안관을 구하고 응성을 수복하는 일이 왜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이건 황제 폐하께서 군대를 보내 국토를 수복하라 명한 일을 잘못된 일이며 주제 넘는 짓이라고 말하는 거 아닌가요? 황제 폐하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가요?”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짚었다.
이에 손씨와 장박원 부부는 낯빛이 확 변했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무슨 그런 망발을……! 우리가 언제… 황제 폐하를 의심했다는 거니.”
손씨는 황급히 엽연채의 말을 부인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방금 전 그들이 했던 말에는 확실히 황제를 험담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공개적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는 법이었다. 뒤에선 아무리 음흉한 일이라고 헐뜯어도 공개적인 자리에선 떳떳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해야 하며,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이 잘리는 대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설령 황제 폐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세 사람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죽으러 간 것이든 아니든 간에 변방에 간 사람들은 모두 국토를 수호하기 위해 간 거예요. 밥 먹고 할 일 없는 세 사람 같은 사람들의 삶을 목숨 바쳐 지켜주고 있단 말이에요. 그들이 없다면 세 사람은 이곳에 앉아 떠들고 있을 수조차 없을 거라고요!”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손씨와 엽이채는 표정이 굳었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부는 그리 오랫동안 성현의 글을 읽었으면서 이런 이치도 모릅니까?”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장박원이 했던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었다.
장박원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지만, 묘씨 등이 보고 있는 자리라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뻣뻣이 굳은 자세로 그 자리에 앉아 침묵했다.
“보는 왜 안 데리고 왔느냐?”
묘씨가 갑자기 냉랭한 얼굴로 엽이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난감하기 그지없던 엽이채는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집에 있어요.”
“보가 네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데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있으니, 어쩌면 지금쯤 울면서 어머니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묘씨의 말에 장박원 부부와 손씨는 표정이 확 굳었다. 묘씨는 지금 자신들을 쫓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무안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해 준 셈이기도 했다. 아니었다면 세 사람은 이곳에 앉아 어색한 상황을 계속 견뎌 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엽이채는 도망치듯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장박원도 자리에 남아 있을 면목이 없어 그녀를 따라 나갔고 손씨도 차가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보고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어둡고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궁명헌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화가 잔뜩 치밀어 올랐다.
마차에 오르자 손씨는 도저히 분을 참을 수가 없어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죽으러 간 걸 죽으러 갔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어디 나중에 찍소리나 할 수 있는지 내 지켜볼 것이다.”
엽이채는 손수건을 쥐며 입가에 옅은 냉소를 띠었다.
‘하, 빌어먹을 계집애. 내 장원 급제자 부인 자리를 빼앗아 가면 뭐 해. 장원 급제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결국 과부가 되게 생겼는데! 그것도 평판이 바닥에 떨어진 과부 말이야. 그자에게 시집 안 가길 천만다행이야!’
자신이 시집을 갔다면 분명 주운환이 어리석은 일을 범하지 않도록 말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엽연채를 아내로 맞이했고 이제 죽으러 가 버렸으니 운이 없는 사내라고 말할 수밖에.
장박원도 분통이 터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자는 죽으러 간 거야!’
주운환이 응성에서 죽어야만 자신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주운환이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한 뒤로 그는 서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글도 써지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고장 난 것 같다는 느낌만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운환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령 정말로 나중에 장원 급제를 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일 터였다. 물론 그 또한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열여덟 소년 장원인 주운환과 비교해 보면 한참 많은 나이였다. 즉,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계속 뒤처지게 되며 어떻게 해도 주운환을 당해 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장박원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하지만 이제 주운환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 그가 죽고 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소년 장원이면 뭐 하겠는가. 어쩌면 책만 읽다가 바보가 된 공부벌레일지도 모르며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평가한 바람에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하여 옥안관으로 가 버렸으니 말이다.
주운환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졸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 * *
엽이채 일행이 떠난 후, 묘씨와 나씨 등도 잇달아 자리를 떴다.
“아무튼 걱정 말거라. 다 좋아질 게다.”
온사월은 헤어지기 전, 옅은 한숨을 쉬며 그저 이렇게 엽연채를 위로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주운환이 출정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을 때 온씨는 화가 나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딸이 가까스로 고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사위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하겠는가. 엽연채가 몹시 슬퍼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녀를 보러 온 것인데, 지금 보니 아주 좋아 보이는 모습이라 그나마 안심이 됐다.
엽연채가 그들을 문까지 바래다준 후 되돌아와 보니 회랑에 서 있는 추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물었다.
“오라버니, 안 따라가고 뭐 하세요?”
“연채야, 너에게 줄 게 있단다.”
그는 그리 말하며 혜연을 쳐다봤다.
“가져오너라.”
혜연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얼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엽연채는 회랑으로 걸어가며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또 술을 주시려는 거예요? 저번에 주신 새 대나무주도 아직 다 못 마셨어요.”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혜연이 검은색 자기로 만든 술 단지를 들고 걸어 들어왔다.
“아까 들어오실 때 사촌 공자님께서 제게 건네셨던 단지입니다. 보관해 두라고 하셨어요.”
“이걸 묻어 두렴.”
추경은 술 단지를 받아 엽연채에게 건네주었다.
“묻으라고요?”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이건 축첩주祝捷酒(승리를 축하하는 술)다.”
그 말에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군이 돌아오면 마시렴.”
추경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축첩주는 장수가 출정하는 날 묻었다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날 꺼내 대승을 거둔 장수를 축하하는 술이었다.
눈시울이 벌게진 그녀를 보자 추경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어릴 때처럼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분명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 단지를 품에 안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녀는 가면서 혜연에게 괭이를 가져오라고 해 이내 구덩이를 파고 술 단지를 묻었다.
추경은 본채의 회랑에 서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려 왔다.
‘내 사랑도 저 축첩주처럼 이제 묻어 두자.’
추경은 포기하기로 했다. 자신이 아무리 뻔뻔하고 돼먹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뜨거운 피를 뿌리려는 장수의 아내에게 눈독을 들일 수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그리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도 이젠 전부 이해가 됐다.
주운환이 이혼을 하려고 했던 이유, 분명 엽연채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던 이유 말이다.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도 조심스럽게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주운환이 위급한 틈을 타 그녀를 빼앗을 수 있겠는가.
전에 자신은 은근히 주운환을 조롱했었고, 어엿한 장수 가문의 자제가 과거 시험을 쳤다고 생각했다. 후에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주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비로소 진정으로 주운환을 존경하게 되었다.
엽연채는 술 단지를 묻은 후 돌 의자에 앉아 깨끗한 물로 손을 씻고 있었다.
추경은 걸어오더니 하얗고 부드러운 작은 손으로 물장난을 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다가 얼른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며칠 후에 우린 정성으로 돌아간다.”
“돌아간다고요?”
엽연채는 깜짝 놀랐고 조그만 손을 물에서 꺼내 면 손수건으로 닦은 후 재차 물었다.
“이렇게 빨리 가시려고요?”
“빠른 건 아니지.”
추경은 좀 우스웠다.
“우리가 작년 유월인가 칠월에 왔는데 이제 오월 중순이니 좀 있으면 일 년이잖니.”
“그렇네요.”
엽연채도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간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이미 반년 가까이 미뤄진 거네요. 그런데 그간 여기서 거래를 몇 건 성사시켰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추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성에 판로만 만들어지면 우린 돌아가서 술을 만든 후 곧장 도성으로 운송해 올 수 있단다. 새 대나무주도 좋긴 하지만 우리 가문의 주력 상품은 송무주잖니. 송무주는 서쪽으로 돌아가 빚어야 맛이 좋단다.
게다가 정성은 옥안관, 응성과 가까운데 전란이 일어났으니 집안사람들이 분명 불안해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돌아가서 집안을 안정시켜야 한다.”
“언제 가요?”
엽연채는 아쉬움이 가득한 투로 물었다.
추경은 요 며칠 동안 이미 떠날 준비를 다 해 둔 상태였다. 원래는 엽연채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온씨를 데리고 함께 정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희망이 없으니 서둘러 정성으로 돌아가 식솔들을 다독여야 했다.
“그럼 오라버니들과 이모가 떠나실 때 배웅해 드릴게요.”
“그래.”
추경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좀 있으면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네요. 오라버니, 여기서 같이 식사하고 가세요!”
엽연채가 추경을 쳐다보며 식사를 권했으나 추경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돌아가 봐야 한다.”
“이렇게 빨리요? 그럼 제가 바래다줄게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면 손수건을 내려놨다.
“괜찮다. 나오지 말거라.”
추경은 손사래를 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검고 둥근 눈썹과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 앙증맞은 코,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마름모 형태의 작은 입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각인되고 나서야 추경은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키가 크고 훤칠한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뜰을 뒤로하고 문밖으로 나서는 뒷모습에서 쓸쓸함과 슬픔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