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화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녹엽이 말했다.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서자 주 백야는 뒷짐을 지고 앞으로 걸어오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고함을 쳤다.
“어디 갔던 것이냐? 네 부군이 출정했다는 건 알고 있느냐?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단 말이다!”
여기까지 말한 주 백야의 목소리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속으로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고 머릿속에선 가장 지우고 싶은 그때의 기억이, 응성에서의 전투와 피바다가 걷잡을 수 없이 떠올랐다. 주운환이 곧 그런 일을 겪게 된다는 생각만 하면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공포 그리고 잔혹무도함……. 왜 자신의 아들이 그런 잔인한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주운환이 출정함에 따라 도성에서 주씨 가문의 평판은 한 단계 더 높아졌다. 하지만 주 백야는 그건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운환이 다시 옥안관에서 패배하게 되면 백성들은 또다시 주씨 가문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을 것이고, 가문은 더욱 처참하게 추락할 뿐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이곳에는 주 백야뿐만 아니라 진씨, 백 이낭, 주묘서 등 모든 가문의 상전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진씨는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그녀는 주운환이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고 그를 비웃었다. 전에 늘 그가 죽어 버리길 바랐고 이제 마침내 그 바람이 이루어져서 기뻤다. 하지만 주운환이 정말 비명횡사하게 되면 주묘서의 혼사는 어찌한단 말인가?
비 이낭은 조롱기 가득한 얼굴로 말문을 떼며 혀를 찼다.
“셋째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멀쩡한 장원 급제자가 죽음을 자초하다니. 아이고, 참으로 가련하네요……. 어쩜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주 백야는 비 이낭이 시끄럽게 떠들자 머리가 윙윙거려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입 다물게!”
그러더니 또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지금 당장 움직이거라. 대복이와 함께 셋째의 뒤를 쫓으라는 말이다. 어쩌면 넌 셋째를 설득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엽연채는 주 백야가 이렇게 흥분해 무례하게 구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놀라는 기색 없이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할 따름이었다.
“부군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장군입니다. 폐하의 뜻을 받들어 병사를 차출하여 출정하는 겁니다. 설령 부군이 후회하여 돌아오고 싶어 한다 해도 황제 폐하께서 동의하실까요?”
주 백야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 우리 가문에서 어렵사리 장원 급제자가 나왔다! 그러니 운환이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기어코 가야 한다면 운환이 대신 종과를 보낼 것이다!”
그러자 주종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종과 도련님 말이 맞습니다! 나리, 이런 법은 없습니다!”
비 이낭은 울부짖었고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진씨는 표정이 확 굳었다. 방금 주 백야가 한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셋째 이 빌어먹을 놈은 장원 급제를 하여 귀한 존재이니 다른 사람보고 그를 대신해 죽으러 가라는 말이 아닌가?
“잠시… 말실수를 한 것뿐이네. 그 누구도 그곳에 가는 걸 허락할 수 없네!”
주 백야는 또다시 탄식을 뱉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절망하고 말았다. 그랬다. 물리고 싶어도 물릴 수가 없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소매를 확 뿌리치며 문밖으로 나갔다.
“참, 비양이는 어디 갔느냐?”
진씨가 갑자기 물었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죽상을 한 강심설이 차갑게 대꾸했다.
“어머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떴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진씨의 표정은 무거웠다. 이제 주운환은 타지에서 죽게 됐는데 주씨 가문의 평판은 주운환 덕분에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게 되면 가문의 평판은 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테니 반드시 이 시기를 틈타 딸의 혼사를 매듭지어야 했다.
일상원을 나온 엽연채는 곧장 궁명헌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주운환 생각뿐이었다. 위험한 응성을 떠올리자 걱정이 가득하다가도 그가 했던 입맞춤이 떠오르자 조그만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아침 식사를 마친 엽연채는 우울한 표정으로 나한상에 엎드려 화본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추길이 홱 뛰어 들어와 이리 고했다.
“아가씨, 마님과 노마님 일행이 오셨습니다. 지금 일상원 쪽으로 가고 계시니, 좀 있으면 이곳으로 오실 거예요.”
“그래. 그럼 차를 준비하거라.”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혜연이 차와 간식거리 준비를 마치자 궁명헌 문으로 들어서는 온씨, 온사월 모자, 묘씨, 엽승강 부부, 엽영교, 엽미채의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얼른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어머니, 할머니…….”
온씨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연채야.”
“어서 안으로 들어가 앉으세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으로 데려갔다.
온사월은 얼른 온씨의 팔을 잡아당기며 진정하라고 다독였다. 앞길이 창창한 주운환이 까닭 없이 전장에 가게 되었으니, 엽연채는 당연히 무너져 내릴 것만 같으리라. 얼마나 상심해 있을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너무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엽연채를 자극하게 될 수도 있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에요?”
엽연채는 온씨의 팔짱을 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동쪽 측문에 도착해 일단 네 시어머니를 만나러 일상원으로 갔단다. 그런데 네 시어머니와 다른 식구들이 모두 외출했다더구나. 그래서 여종이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거란다.”
엽영교가 온씨 대신 대답했다.
이어 모두 함께 둘러앉았다. 본래 그들은 엽연채를 위로하러 이곳에 온 것인데 막상 자리에 앉으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엽연채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혜연이 따뜻한 차를 내오는데 갑자기 녹엽이 세 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셋째 마님, 마님을 뵈러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엽연채는 밖을 힐끔 쳐다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장박원, 엽이채, 손씨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엽이채는 눈가를 닦으며 앞으로 걸어와 이리 말했다.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묘씨 등도 자리하고 있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손씨는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서, 어머님. 오늘 이곳에 연채를 보러 오실 거면서 저는 부르지 않으셨네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묘씨, 나씨, 엽영교는 낯빛이 어두워졌고 묘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오지 않았느냐?”
“어머님, 지금 저희 식구를 따돌리시는 거예요?”
손씨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채 시댁에 가 있는 동안에 이리 찾아오시다니요. 이채 부부가 연채를 보러 오자고 하지 않았으면 어머님과 마주치지 못했을 테니 전 저를 따돌린 것도 몰랐겠네요.”
“그럼 이제 뭘 어쩌고 싶은 게냐?”
묘씨는 그녀를 노려봤다.
예전의 묘씨는 그래도 손씨에게 예의를 차리는 편이었다. 그때까지는 엽영교의 혼사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계를 잘 맺어 두면 후에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가든 간에 친척끼리 서로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엽이채가 엽영교에게 반편이를 소개하는 일을 겪으면서 묘씨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엽영교에게 정말로 일이 생겨도 손씨 가족은 도와주기는커녕 엽영교를 짓밟으려 들 것임을 말이다. 게다가 이제 자신의 사위가 탐화이니 배짱도 두둑해져 있었다.
손씨, 엽이채, 장박원은 묘씨의 호통에 낯빛이 변했다.
“할머님, 장모님도 그저 처형이 걱정되신 것뿐입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장박원이었다.
묘씨와 나씨 등은 장박원을 본 지 한참 되었다. 심지어 지난번 그의 아들 만월연에서도 보지 못했다.
묘씨는 장박원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의 장박원은 소년 수재답게 풍채 좋고 위풍당당한 인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고작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지금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몰라보게 초췌해졌고 얼굴은 살짝 패어 있으며 눈빛은 탁해 전체적으로 사람이 좀 우울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는 훨씬 기운차 보였다.
묘씨는 장씨 가문이 그래도 3품 고관의 집안이니 그의 체면을 너무 깎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고 있다.”
“처형, 좀 괜찮으세요?”
장박원의 시선이 엽연채에게 향했다.
오늘 엽연채는 집 안에서 입는 오밀조밀한 매화 문양이 수놓인 부드러운 비단 웃옷과 매화 문양이 촘촘히 수놓인 선홍색 백탁군百褶裙(주름치마)을 입었다.
머리는 간단하게 틀어 올려 술이 달린 매화 모양 장식을 꽂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거나 끄덕일 때마다 장신구에 달린 술이 움직이며 원래도 맑고 아름다운 그녀의 조그만 얼굴에 화려함을 더해 주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러더니 엽영교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고모, 이 팔찌 어디서 산 거예요?”
장박원은 엽연채가 자신을 제대로 상대도 하지 않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위어 뼈만 남은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더없이 잘나가던 장원 급제자 주운환은 이제 끝났다. 분명 응성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날 본체만체하다니, 아직도 자기가 잘난 줄 아는가?’
“아이고, 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났을까? 연채야,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손씨는 비통한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위로했다.
“어찌 되든 간에 친정에서 연채 너를 책임질 거란다.”
그 말에 온씨 등이 화가 잔뜩 치밀어 올라 되받아치려는 순간, 엽연채가 한발 먼저 고개를 들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손씨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르는 척하기는!’
그러더니 조금 전보다 더욱 슬픈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연채 네 부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다니.”
“그동안 성현의 글을 읽었지만 헛공부한 거죠. 그러니 주제 넘는 짓을 하는 겁니다.”
장박원은 ‘흥’ 콧방귀를 뀌더니 동정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엽연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헛공부한 건 제부겠죠! 진사도 되지 못하더니 사람다운 말도 못 하네요.”
그 말에 장박원과 손씨, 엽이채는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