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 왔다. 주운환은 말을 채찍질하며 쏜살같이 달려갔는데 기분 탓인지 살결에 와닿는 바람에서 지독한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망파정望波亭’은 붉은 칠이 벗겨져 있었고 바람을 맞고 햇볕을 쪼여 처마와 붉은 기둥의 곳곳이 마모되어 있었다. 엽연채는 그곳에 서서 저 멀리 채찍질을 하며 쏜살같이 달려오는 주운환의 모습을 바라봤다.
차갑고 굳건했던 주운환의 마음은 그녀를 본 그 순간 약해지더니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말고삐를 바짝 잡아당겨 말을 탄 채로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공자, 출정하는 거예요?”
엽연채의 곱고 화려한 옷이 바람을 맞아 나부끼고 있었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다.
“네.”
주운환은 있는 힘을 다해 마음을 억누르며 엄숙하고 위엄 있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가기 전에 저랑 술 한 잔 해요.”
엽연채가 말했다.
정자의 돌 탁자 위에 백옥 주전자와 술잔이 놓여 있었다. 엽연채는 두 잔을 따른 후, 술잔을 들고 그의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며 권했다.
“장군님께서 용맹무쌍하게 적을 섬멸하고 무사 귀환하는 날, 제가 장군님의 갑주를 벗겨 드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엽연채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속으로 들어오자 간신히 억눌러 놓았던 주운환의 마음에 결국 잔물결이 일고 말았다.
“…네.”
주운환은 술잔을 건네받아 단숨에 들이켠 후 술잔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곤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 나갔다. 자리를 뜨지 않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까 봐, 두려움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떠나가는 주운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더니 눈물을 흘렸다. 시야가 흐려진 그녀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물며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흑…….”
그런데 이때, 점점 더 멀어져야 할 말발굽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환한 빛을 발하는 차가운 달 같은 소년 장군이 다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이고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깨끗이 닦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주운환이 그녀의 아래턱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몸을 숙이더니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듯 그의 품에 안겼다. 그 순간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성벽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엽연채의 입술에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거친 주운환의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숨결 사이론 그가 느끼고 있는 짙은 아쉬움과 슬픔이 전해졌다. 엽연채는 정신이 아물아물 몽롱해졌고 이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팔로 주운환의 목을 감싸 안았다. 옅은 체향이 아련히 풍겨 왔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오가자 둘의 감정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좋아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씩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그녀는 이미 자신의 뼈와 살과 하나가 되어 버렸다.
자신은 어떤 일이든 용감하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엽연채에게 관한 일만은 늘 망설이고 주저했다.
엽연채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라 지금껏 그녀와 함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장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번 그녀가 영패를 놓으러 태자부로 갔을 때, 자신은 마침내 스스로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에게 넘어가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태자 같은 사내는 물론이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 주는 추경 같은 사내도 안 된다. 엽연채는 자신의 여인이어야만 했다.
그날 밤 별장에서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주운환은 몇 번이고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며 자신을 달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과 절망을 그녀가 겪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고통과 절망을 이미 9년 전에 너무도 많이 봐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그녀를 단호히 거절하더라도 자신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 그녀는 고통스럽고 괴로워할 것이며 심지어 무너져 내릴 것임을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자신을 좋아하니까.
말은 안 해도 두 사람은 서로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운환은 엽연채가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아쉬워하며 서로를 놓아주었다.
주운환은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다른 한 손으론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몸을 숙이고는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며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주십시오.”
엽연채는 기다란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꽉 물고 대꾸했다.
“안 기다릴 거예요. 공자께서 돌아오지 않으면 재가할 거예요.”
주운환은 가슴이 철렁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엽연채는 그 말을 듣더니 조금 전보다 더 굵은 눈물을 또르륵 떨어뜨렸다. 주운환은 몸을 숙여 그녀를 꼭 안아 주며 살살 달랬다.
“그럴 기회는 없을 겁니다. 소저는… 내 사람이니까! 내 여인이어야만 합니다!”
마지막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엔 고집과 단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
엽연채는 그를 꽉 껴안았고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음속에서 어느새 슬픔은 사라지고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도련님!”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주운환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여양과 여한이 말을 탄 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갈게요.”
주운환이 작별 인사와 함께 말채찍으로 내려치자 말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엽연채는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져 가는 주운환을 바라보며 들고 있던 달콤쌉싸름한 술을 조금씩 조금씩, 남김없이 비웠다.
“아가씨.”
근처에 있던 추길과 혜연이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혜연은 엽연채의 반짝이는 눈이 눈물로 젖어 있으나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든 간에 바라는 대로 이뤄진 것이었다.
엽연채가 주운환을 좋아하는 건 눈먼 사람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눈치 빠른 혜연이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주운환이 엽연채에게 다가가면서도 분명히 말하지는 않고 또 부부로 지내자는 말도 하지 않으니, 그녀가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를 것이다. 혜연은 엽연채를 말리고 싶었지만 주운환에게 기대어 즐겁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편, 추길은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그녀는 전부터 계속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고 늘 두 사람 관계는 어정쩡하고 애매하다고 생각했으니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추길이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아가씨, 공자를 좋아하시는데 어째서 말씀을 안 하신 거예요? 공자도 아가씨를 좋아하시면서 왜 말씀을 안 하셨고요?”
진작에 말했다면 벌써 둘 사이에 아기도 있었을 것이다.
혜연이 그녀를 쏘아보며 핀잔했다.
“넌 체면은 신경도 안 쓰니? 먼저 부부로 지내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때 가장 심하게 욕했던 사람이 너였거든!”
그러자 추길의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맞다. 주운환은 그런 말을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 자신은 속으로 주운환을 수백 번도 넘게 욕했었다.
그런데 주운환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엽연채가 그를 좋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상황에서 엽연채가 먼저 말하게 되면 진짜 부부가 되어도 그녀가 숙이고 들어가게 되는 셈이었다.
추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또 이렇게 말했다.
“그럼 왜 좀 더 일찍 손을 쓰지 않은 거예요! 공자께서 아가씨를 좋아하시니 아가씨가 이혼하겠다고 운을 떼 공자께서 초조해하는지 아닌지 지켜보시면 됐잖아요. 이렇게 오래 끌 일이 아니죠.”
엽연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추길은 고요하고 적막한 교외의 정경을 바라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예전 일은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이제 공자께서 출정하신다고 하잖아요. 어째서 공자께서 싸우러 가셔야 해요? 장원 급제자잖아요? 한림원 관리로 잘 계시다가 몇 년만 지나면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르실 텐데… 어째서…….”
추길은 답답하고 속상했다. 어렵사리 장원이 되었고 이제 마음도 정하게 되었다. 편안한 나날을 보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영광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전장으로 가 버리다니.
그런 생각을 하자 추길은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아가씨께서 설득하셨다면 분명 가지 않으셨을 거예요.”
혜연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엽연채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하고 싶은 일이고 공자께서 바라는 바야.”
그녀는 그가 뜻하는 바를 이룬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가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 자신만의 영광을 얻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혜연과 추길은 눈짓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침묵했다.
세 사람이 이곳에 잠시 서 있으니 멀리서 나팔 소리 같은 것이 간간이 울려 펴지며 박자가 딱딱 맞는 함성소리가 들려왔고, 진고晉鼓(틀 위에 얹어 두고 북채로 두들기는 큰 북) 소리가 바람을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 울려 퍼졌다.
“가자.”
엽연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도성을 향해 나아갔다.
엽연채는 그가 떠나간 방향을 쳐다보며 아까 전 추길의 물음에 속으로만 대답했다.
‘왜 몰아붙이지 않고 지금껏 질질 끌었냐고……. 그가 나를 애지중지하며 그리도 따뜻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데, 내가 그이를 어떻게 난처하게 만들겠어.’
* * *
주씨 가문은 시끌벅적했다. 즐겁고 기쁜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이따금씩 들리는 질문과 정신 사납게 하는 언행 때문이었다.
엽연채가 탄 마차가 서쪽 측문으로 들어가자 녹엽이 앞으로 달려왔다.
“셋째 마님, 돌아오셨군요. 백야께서 한참 동안 마님을 찾으셨습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엽연채는 얼른 마차에서 내리더니 혜연, 추길과 함께 수화문을 지나쳐 일상원으로 향했다. 녹엽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 걸어가니 금세 일상원 대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주 백야는 뒷짐을 진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