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51화 (351/858)

제351화

“됐다. 시간이 없으니 더 이상 지체하지 말거라.”

상석의 정선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15만 명을 소집하거라.”

그 말에 양왕의 수려한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에 서노와 남쪽 오랑캐는 총 35만 명의 정예 기병을 보냈다. 응성에 본래 30만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13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17만 명이 응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후 풍 노장군이 20만 명을 데리고 가 합류하여 총 37만 명이 되었지만, 대패를 거듭한 끝에 옥안관으로 후퇴한 3만 명이 필사적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지금 주운환에게 15만 명을 데려가라고 하니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았다.

“소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잡겠사옵나이다.”

그러나 주운환은 그저 담담히 예를 올린 후 대전을 떠났다.

정선제는 슬픔 어린 눈빛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손을 흔들어 조회를 파했다.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고 내일 이어서 상의할 것이다!”

요 며칠 정선제는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라 몸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이제 눈앞의 일은 해결된 셈이지만 앞으로 후속 조치에 대한 논의를 해야 했다.

* * *

주운환이 나간 뒤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자리를 떴다. 그리고 금세 황궁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황제가 응성과 옥안관을 버리지 않고 서쪽 정벌을 위해 군대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이번에 파견된 사람이 영국후부 후야나 정 황후의 두 남동생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뜻밖에도 주씨 가문 사람이 파견됐다고 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떤 주씨 가문을 말하는 거야?”

백성들 중 일부는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주씨 가문이겠어? 당연히 도성 북쪽에 있는 정국백부지.”

“아, 그 주씨 가문. 근데 그 주씨 가문이 능력이 될까?”

“전에 응성에서 참혹한 살육이 벌어진 게 바로 주씨 가문 때문이잖아. 결국 옥안관에서도 참패했고 주씨 가문 사내들 십여 명이 전부 목숨을 잃었지. 아, 아니다. 전부 죽은 건 아니네. 당시 주장主將이었던 주씨 가문 백야는 남아 있으니까.

쯧쯧, 어떻게 군대를 이끌었기에 형제와 사촌들이 전부 죽었을까? 그 사람 혼자만 살아서 돌아왔잖아. 아무튼 지금은 완전 머저리처럼 살고 있어.”

“아니야. 그 사람은 원래부터 머저리였어.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했는데 가문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장군이 된 거라고 했어. 이제는 문인의 길을 걷고 있지 않아?”

“그럼 이번에 출정하는 사람이 주 백야인 거야?”

“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셋째 아들이 간대. 서정장군에 봉해졌는데 이번 장원 급제자라고 하더라!”

“엥? 장원 급제자라고? 그럼 어쩌면 문무를 두루 겸비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장원의 칭호를 거머쥐었으니 분명 무공이 예사롭지 않은 용맹스러운 사람일 거야!”

“용맹스럽기는 무슨! 그 사람은 재능이 흘러넘치는 문과 장원 급제자야!”

“이런 제기랄! 무과 장원 급제자가 아니었어? 문과 장원 급제자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서 서노군을 우리 대제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그렇긴 하지만 다른 누가 있어야 말이지.”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던 백성들은 말문이 막혀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헤아려 보니 확실히 대제엔 쓸 만한 무장이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출정을 윤허하셨으니 분명 특출난 부분이 있을 거야. 어찌 됐든 간에 주씨 가문 조상들은 하나같이 영웅이었잖아. 우리 영토를 몇 년이나 지켰더라?”

주운환이 출정한다고 하자 백성들은 한때 명성을 날렸던 용맹한 주씨 가문 선조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자 응성 쪽 일로 수일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마침내 다소 가라앉게 되었다.

* * *

그 시각, 정국백부.

주 백야와 진씨, 주묘서, 주비양 등은 일상원 서차간에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큰 소리로 하하 웃기도 했다.

“에휴, 지금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아니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셋째는 어째서 아직도 퇴청하지 않은 게냐.”

주 백야는 배가 고파 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오시 이각에 식사를 하는데 지금은 그보다 시간이 늦은 듯했다.

“이미 오시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밖에 있던 녹지가 대답했다. 그러자 진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 애가 평소 일정한 시각에 퇴청하지 않는 걸 아시잖아요. 점심은 각자 먹는 걸로 하죠. 저녁에 함께 식사해도 되니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주 백야는 날카롭게 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진씨는 입을 오므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리! 나리!”

대복이 쿵쿵거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주 백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응성과 옥안관 쪽으로 오늘 출병한다고 하는데…….”

“아이고, 몇 번을 말했느냐? 응성 쪽 일은 더는 내게 보고하지 말거라.”

주 백야는 귀찮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가서 셋째가 몇 시에 퇴청하는지나 알아보거라.”

“지금 셋째 도련님 일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복은 둥글넓적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나리께서도 아시다시피 그저께 응성이 함락되어 그곳 백성들이 전부 도륙됐습니다. 그러니 그쪽으로 당연히 누군가는 가야 하죠. 다들 파병해야 한다는 걸 아는지라 이리저리 궁리를 해 봤지만 적절한 사람을 찾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셋째 도련님께서 전투에 나가 싸우겠다고 자청하셨다고 합니다. 옥안관으로 출정하겠다고 말이죠. 황제 폐하께서 이를 윤허하셨답니다.”

“뭐라 했느냐?”

주 백야는 깜짝 놀라 순간 멈칫했다.

“셋째… 셋째가…….”

“셋째 도련님께서 전투에 나가 싸우겠다고 자청하셨고 옥안관으로 출정하신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셋째 도련님을 정2품 서정대장군에 봉하고 당장 출발하라고 하셨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주 백야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셋째가… 전투에 나가 싸우겠다고 자청했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진씨와 주묘서, 주종과 등도 전부 깜짝 놀라 순간 멈칫했다. 주운환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과거 시험을 치러 이미 조정의 관리가 되었는데, 왜 출정을 자청한단 말인가?

이때, 밖에 있던 녹엽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리, 마님. 셋째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밥상을 차릴까요?”

“이 상황에 밥상은 무슨!!”

주 백야는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씨 등은 수년 동안 이토록 불같이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주운환은 사실 요 며칠 출정 준비를 하며 짐 같은 것들을 이미 다 싸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아직 챙기지 못했으니, 바로 군기軍旗였다.

군기는 줄곧 사당의 동쪽 곁채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주씨 가문 사람들이 지휘관이 되어 출정할 때 사용하는 깃발이었다.

주운환은 사당으로 가서 역대 조상들에게 향을 올린 후 군기를 가지고 큰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서과원으로 돌아온 그가 수화문 근처의 마구간으로 가려는 찰나, 멀리서 주 백야와 진씨 등이 그를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운환아! 어디 가는 것이냐?”

주 백야는 마음이 급해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미 소식을 들으신 거 아닌가요?”

주운환은 이 말만 하고선 마구간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정신이 나간 것이냐? 아니면 우둔한 것이냐?”

주 백야는 울부짖으며 그의 뒤를 쫓았다. 간신히 따라잡자 얼른 그의 팔을 움켜잡고는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이냐? 어렵사리 장원 급제를 하게 되어 창창한 앞날이 널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 뼈도 못 추릴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냐? 응?”

주운환은 말없이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주 백야는 그가 손을 뿌리치자 비틀거렸다. 다리를 저는 그는 주운환만큼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주 백야가 주운환을 다시 뒤쫓는 동안, 이미 말에 오른 주운환은 말채찍으로 준마를 한 대 후려치더니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 백야는 문밖으로까지 나가 절망 가득한 소리를 냈다.

“운환아! 운환아! 돌아오거라!”

하지만 주운환은 이미 쏜살같이 달려 나간 후였다. 주 백야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게 끝나 버렸다는 기분이 들자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게다! 집안에 가까스로 장원 급제자가 나왔으니 몇 년만 지나면 학자 가문이 되어 위상이 달라질 텐데… 왜, 왜 그것을 모르는 것이냐!”

주운환은 준마를 몰고 성문을 나섰다. 그가 교외의 넓은 들판에 다다르자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환아! 멈추거라!”

주운환이 고개를 돌려 보니 말을 타고 쫓아오는 주비양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 주운환은 표정이 차갑게 변하더니 말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높였다. 주비양이 뒤에서 추격해 왔지만, 주운환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붉은 술이 달린 긴 창이 그의 얼굴 앞으로 날아왔다. 주운환은 깜짝 놀라 몸을 숙이며 창을 피했지만, 그사이에 주비양이 말고삐를 낚아채는 바람에 주운환의 말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타고 있는 말이 갑자기 멈추자 주운환은 반동으로 몸이 휘청거렸지만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운환아, 어딜 가는 게냐?”

주비양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으면서도 말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주운환의 솜씨에 내심 깜짝 놀랐다.

“큰형님, 그런 쓸데없는 말은 뭣 하러 하세요?”

주운환이 비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속은 게다.”

주비양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누가 너보고 출정하라고 한 것이냐? 조정 신하들이 하는 말에 고무라도 된 게냐? 지금 응성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냐? 가면 죽는다! 어쩌면 황제 폐하는 이미 응성과 옥안관을 버리셨을지도 모른다!

폐하께서 너에게 병사와 군마를 얼마나 주셨느냐? 10만? 아니면 15만? 그 정도 병사와 군마를 줬다면 너보고 가서 죽으라는 뜻이다!

출정은 그저 백성들에게 말할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그리하겠다고 달려들다니! 황제 폐하는 민심을 붙잡으며 힘을 비축해 놨다가 다시 기회를 봐서 영토를 수복하시려는 게다.”

“맞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포기하는 것이든 힘을 비축해 놓으려는 것이든 간에 어쨌든 누군가는 나서야 합니다.”

주운환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옥안관을 구하고 응성을 수복하기 위해 가는 겁니다.”

“네가 뭘 안다고!”

주비양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더니 이어 냉소를 흘렸다.

“하긴 너처럼 어릴 때부터 도성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던 사람은 온종일 대단한 영웅이 되겠다는 단꿈에 빠지고 희망 같은 걸 꿈꾸겠지! 지금 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특별한 존재이며 탁월한 장수감이라고 생각하겠지!

네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느냐? 그건 네가 주씨 가문 사람이며 네 몸에 주씨 가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전장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주운환은 대답과 함께 실소를 지었고 이어 말의 배를 팍 차자 말은 그대로 앞을 향해 내달렸다.

깜짝 놀란 주비양이 정신을 차렸을 땐 주운환은 이미 쏜살같이 달려 나간 후였다. 그의 뒷모습은 얽매임 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원대한 뜻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비양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방금 전 격양된 어조로 일장 연설을 하며 주운환의 무지함을 비웃었는데 주운환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그 말을 듣자 그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렸다.

제일가는 장수 가문의 자제였던 자신은 손에 붉은 술이 달린 긴 창을 쥐고 말을 채찍질하며 쏜살같이 질주했었다.

앞에 뭐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무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굴하지 않는 신념을 가득 품고 있었고, 지옥 같은 곳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용기가 가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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