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0화
“주씨 가문 자제가 확실히 순진하군요.”
이어 낮게 깔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곱슬곱슬한 수염이 난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는데 바로 금위군 대장 상관수였다.
“자네는 전장을 소꿉장난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겐가? 아니면 본인이 서책을 많이 읽은 문인이고 병법도 익혔으며 군기軍棋(군대 체재와 무기를 응용한 장기의 일종)에도 능하니 전장이 장기판과 같다고 생각하는 겐가? 병서兵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전장의 상황이 자네가 생각한 대로 움직일 것 같은가?”
상관수는 그리 말하며 ‘허허’ 웃었다.
“전장에서는 순식간에 생사가 결정되네. 영토가 확장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피를 뿌려야 한다는 말이세. 지금 자네 머릿속엔 이론과 계책이 가득 차 있겠지만,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같이 흐르는 전쟁터를 보고도 과연 그럴까? 예리한 화살과 잘려 나간 팔다리가 자네 눈앞에 날아들면 자넨 깜짝 놀라 오줌을 지려 버릴 걸세.”
거칠고 속된 말이긴 해도 구구절절 일리가 있는지라 조정의 신하들은 그에 합세해 주운환을 조롱했다.
전지신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같은 사람이야 전장에서 죽어도 누가 아쉬워하지 않겠지만, 장수가 능력이 없으면 수만 명의 병졸들이 목숨을 잃는다네.”
조정의 신하들은 곱지 않은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솔직히 병졸의 생사 여부는 그들에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전장에 나간다는 건 곧 누군가는 죽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병졸의 사망이란 숫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많은 병졸들을 전장으로 보냈는데 그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건 대제의 전력이 태반이나 손실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야 무슨 영토 수복이겠는가. 그야말로 알아서 대제의 손발을 자르는 셈이었다.
“9년 전 주씨 가문의 참담한 패배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아마 아직까지도 그때 죽고 다친 십만 병졸의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고 있을 텐데?”
영국후부 후야는 그리 말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주운환을 쓱 흘겼다.
정선제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하좌의 주운환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하좌의 소년은 여전히 침착하고 냉담한 모습이었다.
주운환은 냉랭한 목소리로 영국후부 후야에게 맞섰다.
“정씨 가문은 단 한 번도 이런 참혹한 일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영국후부 후야께서 저 같은 사람은 출정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럼 정씨 가문이 출정하시죠.”
영국후부 후야는 안색이 확 변했다.
“이익! 나는!”
민족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곳은 뼈도 못 추릴 곳이고 목숨을 잃을 게 뻔한 곳인데 또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목숨을 적에게 갖다 바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정씨 가문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고 명성도 바닥에 떨어질 터였다.
“왜 그러시죠? 정씨 가문은 출정하지 않을 겁니까?”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또 가장 말이 많았던 전지신을 쳐다봤다.
“그럼 전 대인께서 가시지요!”
전지신은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성난 목소리를 냈다.
“우리 전씨 가문은 학자 가문이네. 대대로 글을 읽은 선비인데 군대를 이끌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가문 사람들도 당연히 대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네. 그러나 경솔하게 군대를 이끌었다가는 수만 명에 달하는 병졸들의 목숨만 헛되이 잃을지도 모르네. 자넨 일부러 병졸들을 사지로 내몰려는 건가?”
주운환은 조정의 다른 신하들을 쓱 훑어봤다.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매서운 눈빛에 신하들은 몸을 떨더니 이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어찌하고 싶으신 겁니까? 후야와 대인에게 가시라고 하니 싫다고 하시고, 두 분은 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가지 말라고 하니 뭘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옥안관을 포기하고 싶으신 겁니까?”
주운환은 싸늘한 말을 내뱉더니 결국 비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제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짐이 어떻게 짐의 백성을 버릴 수가 있겠느냐!”
옥안관은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이 성을 잃게 되면 서남쪽 열두 개 주를 서노와 남쪽 이민족이 나눠 먹게 되리라.
주운환이 이어서 말했다.
“현재 동원할 군대가 없는 것이 절대 아니옵니다. 출정하지 않으면 서남쪽 열두 개 주가 적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되면 대제의 사기는 분명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옵니다. 백성과 병졸들이 조정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주운환의 마지막 말이 정선제의 마음속에선 ‘백성과 병졸들이 황제를 믿으려고 하겠습니까?’라는 말로 울려 퍼졌다. 그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서남쪽 열두 개 주가 함락되면 분명 대량의 난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극악무도한 만행이 일어나 백성들은 평안을 얻을 수 없고, 민중의 원망이 하늘을 메워 결국 유민과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이옵니다.”
주운환의 말을 들고 있던 정선제와 조정 신하들의 이마엔 핏줄이 울뚝불뚝 솟았다. 그들도 당연히 이런 문제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저 마주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주운환이 이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 놓았으니 이제 더는 회피할 수가 없었다.
출정해도 분명 지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반드시 가야 했다. 명성과 명예를 위해서 말이다. 패전한 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백성들이 여전히 대제를 믿으면 적군을 진압하고 반격할 기회가 충분히 남아 있을 것이었다.
정선제는 축 늘어진 얼굴을 파들파들 떨었고, 피곤함이 묻어나는 힘없는 눈빛으로 침착하고 냉담한 모습의 풍채 좋은 소년을 내려다봤다.
“주씨 가문 셋째 아들 주운환은 명을 듣거라!”
이어 정선제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병부상서가 다급히 목소리를 내더니 공수하고 말했다.
“누군가 반드시 가야 한다면 꼭 주 수찬이 아니어도 되옵니다. 꼭 문관을 파견해야 하는 건 아니옵니다…….”
“주 수찬은 수찬이 아니라 주씨 가문 사람이다!”
정선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조정의 신하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누군가 출정해야 한다면 주운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말마따나 그는 주씨 가문 사람이었다.
주씨 가문은 대대로 영웅들을 배출했고, 지금은 비록 몰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시의 명성은 얼마간 살아 숨 쉬었다. 그 유명한 주씨 가문이 나서면 기선 제압도 할 수 있고 명분도 설 수 있었다.
황제는 아무렇게나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파견하는 사람은 주씨 가문 아들이고, 이 가문은 한마디로 응성의 수문신守門神이라 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차라리 주 백야를 파견하시옵소서.”
도성 및 인근 지역을 수비하는 병영의 책임자 오일의가 말했다. 그는 이 젊은이의 용맹함과 대의, 무한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기에 그가 사지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주씨 가문 셋째 아들로 하겠다.”
그러나 정선제는 하좌의 주운환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뜻을 밝혔다. 그가 저번에 주정에게서 보았던 건, 본인과 마찬가지로 노쇠하여 거동이 불편한 몸과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뿐이었다.
반면, 눈앞에 서 있는 이 소년은 시종일관 침착하고 냉담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마치 천천히 뽑히고 있는 절세명검絶世名劍처럼 느껴졌다. 검은 칼끝을 반쯤 드러내고 차가운 칼집 안에서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정선제는 노쇠하고 병들어 미동도 없던 몸속의 피가 순간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명을 내리겠다. 주씨 가문 셋째 아들 주운환을 정2품 서정대장군西征大將軍으로 봉하니, 짐을 대신해 옥안관으로 출정하여 영토를 탈환하거라.”
주운환은 옷자락을 살짝 걷어 한쪽 무릎을 꿇고는 사의를 표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정선제는 책상 위를 더듬거리다 뭔가를 집어 들더니 아래로 던졌다.
“가져가거라. 네 호부虎符(범의 모양을 본떠 만든 군대 동원의 표지)다!”
주운환이 한 손으로 그 호부를 받아 살펴보니 현철玄鐵로 만든 범 모양 호부의 오른쪽 절반이었다. 윗면엔 글자와 금색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묵직하고 차가웠다.
양왕은 주운환 손에 든 호부를 쳐다보며 매력적인 눈동자를 살짝 깜빡였고 입꼬리를 쓱 당겼다.
“금일 출발하여 동쪽에 인접한 병영으로 가서 병사들을 소집하거라.”
말을 하던 정선제는 순간 멈칫하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5만 명만 소집해야 하옵니다!”
전지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5만 명만 소집해야 하옵니다.”
요양성이 이를 꽉 물고 호응했다. 1만 명만 소집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라 그리 못 하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주위에 있던 신하들도 잇달아 동의를 표했다.
“주 장군은 젊고 유능하며 용감하기 이를 데 없으니 5만의 병사와 군마로 충분하옵니다.”
죽으러 가는 게 뻔했다. 그저 대제의 체면을 위해, 백성들에게 말할 변명거리를 만들어 놓기 위해 출정해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굳이 많은 병사를 데려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는가.
주운환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전지신을 쏘아봤다. 그러나 전지신은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자네 스스로 가겠다고 한 것이니…….”
전지신이 더 반박할 새도 없이 주운환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다가가 그의 앞섶을 움켜잡고 말했다.
“내가 너무 오래 참아 준 모양이군.”
“뭐, 뭐 하려는 게냐?”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전지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주위에 있던 신하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고 격노한 요양성은 앞으로 두 발짝 다가가 말했다.
“주운환,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자네 참 당돌하구만!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화들짝 놀란 조정의 신하들은 잇달아 호통을 쳤다.
고상한 태자도 불만스레 입꼬리를 삐죽거렸지만, 지금 응성에는 주운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왕은 ‘허’ 하고는 코웃음을 쳤고, 상석의 정선제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한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만하거라! 주 장군!”
주운환은 그제야 전지신을 홱 뿌리쳤다. 전지신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는데, 그나마 뒤편의 관원들이 그를 받아 준 덕분에 바닥에 나동그라져 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주운환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 풍 노장군은 20만 명을 동원했는데 저한텐 5만 명만 데려가라는 말입니까? 백성들에게 말할 변명거리를 만들 거면 제대로 하십시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다니요. 5만 명의 병사와 군마로 통할 성싶습니까?”
조정의 신하들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전지신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