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그 시각, 주 백야가 말한 응성 전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조정은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선제는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고 눈언저리는 까맣게 푹 꺼져 있었다. 밤새도록 잠을 설친 게 분명했다. 신하들도 하나같이 초췌한 얼굴로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한림원의 조 편수가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밖에서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조용한 대전 안에 울려 퍼지자 대신들은 흠칫 놀랐다.
“들라 하거라!”
정선제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림원 관리가 이런 시기에 알현을 청하는 걸 보니 분명 묘책이 있는 것이었다.
정선제의 명이 떨어지자 진녹색 관복을 입은 조범수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조범수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됐다. 일어나거라.”
조바심이 난 정선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응성 전투와 관련하여 무슨 계책이 있느냐?”
“예, 폐하. 소신에게 계책이 있사옵니다.”
조범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이 계책은 그가 하룻밤을 꼬박 궁리하여 떠올린 것이었다. 조정에서 중신들이 논의를 해도 방법을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하는 판국에 그가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었다.
“허 장군을 응성으로 보내고 거주의 정 장군을 서북으로 보내는 편이 나으리라고 사료되옵니다.”
실력을 논하자면 허 장군은 연초에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드러냈고 강하고 용맹한 자였다. 그에 반해 정씨 가문 사람들은 겁이 많으니 응성에 가 봤자 적에게 머리를 내어 주는 꼴이었다.
그러니 허 장군이 위험한 응성에 가서 적군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고, 정씨 가문의 일부가 서북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북은 난공불락인 곳이라 여차 일이 생기면 강왕을 보내 정 장군 쪽을 돕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많은 신하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태자는 두 눈을 반짝였다.
영국후부 후야는 이를 꽉 물고 찬동했다.
“좋소!”
정씨 가문이 이번에도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 완전히 웃음거리가 되고 말 터였다.
“군량과 마초는?”
정선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옥안관의 군량과 마초는 십 일 치밖에 없다. 아니, 그건 이미 그저께 일이니 지금은 팔 일 치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이 팔 일 치에는 옥안관의 나무껍질까지 포함됐을 터였다.
“정주定州와 사주砂州 등 몇몇 주를 지나갈 때 군량과 마초를 가져가면 됩니다.”
태자가 의견을 제시했으나 양왕이 냉소와 함께 반문했다.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그쪽에서 가져갈 수 있다면 애초에 도성에서 가져갈 필요가 왜 있었겠습니까. 그쪽에는 이미 군량과 마초가 없습니다.”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다들 속으로는 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있어도 없다고 말하거나 숨기려고 할 터였다.
언제 옥안관이 함락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군량과 마초를 보냈다가 옥안관이 뚫리면, 꼼짝없이 공격해 오는 적에게 포위돼 역시 함락되지 않겠는가?
“없어도 있어야 한다!”
태자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양왕이 이번에도 반론을 내세웠다.
“형님, 강제로 빼앗으려는 겁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전에도 그 몇몇 주에서 이미 두 차례나 군량과 마초를 조달해 줬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군량과 마초는 그들의 생존을 위한 몫인데, 그조차도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면 분명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또 서북에서 옥안관까지는 길이 험준하여 아무리 빠르게 가도 열이틀 정도는 걸립니다. 군량과 마초를 준비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옥안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은 함락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허 장군이 서북에서 군량과 마초를 가지고 가는 건 어떨까요?”
공부상서의 의견에 영국후부 후야의 낯빛이 확 변했다.
“아, 안 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허 장군이 군량과 마초를 가지고 가면 정씨 가문 군인들은 서북에 가서 뭘 먹으란 말인가? 서북풍西北風이나 들이마시라는 건가?
“이곳에서 군량과 마초를 옮겨 백주泊州에서 허 장군과 합류하면 됩니다.”
호부상서가 입을 열었다.
“도성에서 백주까지 가는 길은 이미 남쪽 이민족들이 봉쇄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정주로 돌아서 간다 해도 적어도 닷새는 더 소요됩니다. 그러는 동안 옥안관은 이미 함락되었을 겁니다.”
유 재상이 말했다.
“게다가 서북쪽은 정씨 가문이 도착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부장副將 둘에게 의지해야 한단 건데, 그럼 곧바로 서노 북군이 쳐들어올 겁니다. 어쩌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리 말한 공부상서는 조범수를 쓱 쳐다봤다.
조범수는 자신이 내놓은 계책이 잇달아 반박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이 하루를 꼬박 써서 생각해 낸 계책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현재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도성의 대장군이 군량과 마초를 가지고 군대를 지휘하며 내려가다 백주를 봉쇄하고 있는 남쪽 이민족들을 무너뜨린 뒤 옥안관으로 가는 것입니다.”
공부상서의 말에 옥좌에 앉아 있던 정선제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결국 사람 때문 아니냐! 너희들 중 누가 가겠느냐!”
그는 그리 말하며 흐리멍덩한 눈으로 아래에 있는 신하들을 싸늘하게 휙 훑어봤다.
“짐의 대제에 인재가 이렇게 없단 말이냐?”
조정의 신하들은 전부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더니 일제히 시선을 영국후부 후야에게 향했다. 현재 도성에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장은 이 늙은이뿐이었다.
영국후부 후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무술을 연마하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 자신이 무슨 전장을 종횡하겠는가.
또 그는 젊었을 때 응성에 한 번 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곳에서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주씨 가문 대노야와 함께 적군을 벴다. 그때 생각을 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거주 쪽의 적군이 갓 태어난 어린 강아지라면 응성 쪽의 서노와 남쪽 이민족은 승냥이와 이리, 사나운 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풍 노장군도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자신은 그야말로 범의 입으로 걸어 들어가는 셈 아니겠는가. 그리되면 목숨만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명성도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영국후부 후야는 고개를 떨군 채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고, 조정의 신하들도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감히 죽음을 불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 주 수찬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밖에서 또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또 계책을 가져왔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서 또 무슨 계책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들라 하거라.”
정선제는 다소 무기력한 목소리로 허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청수하면서도 화려한 외모의 소년이 안으로 걸어 들어와 상석의 정선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예는 생략하거라.”
정선제는 옅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에겐 무슨 계책이 있느냐?”
“계책은 하나뿐이옵니다. 출정하는 것이옵니다.”
“출정해야 하는 걸 누가 모르는가? 문제는 누가 가는 것 아니겠는가?”
전지신이 냉랭한 목소리로 주운환에게 반문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씨 가문이 서쪽 옥안관 정벌에 나서고자 하옵니다. 적군을 몰아내고 응성을 탈환하겠사옵니다.”
‘주씨 가문이?’
주씨 가문이라는 말이 나오자 조정의 신하들은 깜짝 놀랐고 정선제마저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왜 잊고 있었을까? 주씨 가문도 있었다는 걸!’
주씨 가문이야말로 대제 제일의 장수 가문이었다. 하지만 9년 전에 너무 처참하게 패배하는 바람에 주씨 가문은 상갓집의 개처럼 온 나라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주씨 가문 아들이 장원 급제를 하기는 했지만 다른 가문에서 합격자가 나온 것만큼 영광스럽지는 않았다. 주씨 가문은 대대로 영웅을 배출한 어엿한 장수 가문이었는데 이젠 간이 콩알만 해져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은근히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하나같이 글공부에 뛰어들어 출신을 바꾸려 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순간 가슴이 요동쳤던 사람들은 다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주씨 가문은 이미 저렇게 망가져 버렸고 문인의 길로 갈아탔는데, 이제 와 어찌 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정선제는 아래에 있는 주운환을 유심히 뜯어보며 이렇게 물었다.
“주정이 출정하겠다는 말이냐?”
“폐하, 가친께서는 예전에 입었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의도 없으십니다. 출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소신이옵니다.”
“뭐라고? 주 수찬이?”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전지신이 가장 먼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반대했다.
“주 수찬, 자네는 장원 급제자가 아닌가? 문관이네!”
“붓을 버리고 무기를 들고자 합니다.”
주운환의 대꾸에 조정의 신하들은 경악해 두 눈을 번쩍 떴다. 특히 조범수는 이 소년 장원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주운환은 황제의 총애를 넘치도록 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지내는 한, 앞길이 창창하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지금 스스로 목숨을 버리러 전장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국후부 후야였다.
영국후부 후야는 주씨 가문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다. 과거 주씨 가문 사람들은 늘 다른 무장들보다 뛰어났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몰락해 버리는 바람에 곱절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거기에 영국후부 사람들이 포함됐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주씨 가문이 다시 부흥하는 모습을 보이자 영국후부 후야는 그 모습이 눈에 좀 거슬렸지만 그뿐이었다. 어찌 됐든 주씨 가문 사람들은 과거 시험을 보려고 하니 자신들과는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주씨 가문 사람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영국후부 후야는 가소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한 적과 맞닥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맞습니다. 터무니없기 이를 데 없군요!”
전지신이 냉랭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자네는 유약한 문신일세. 누가 자네의 용기만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출정하게 하겠는가?”
“아직 어리고 뭘 몰라 경솔하구먼.”
요양성이 거들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