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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348화 (348/858)

제348화

정선제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태자를 쓱 쳐다봤다. 태자가 가게 되면 분명 간사한 자에게 해를 입게 될 터였다.

노왕은 출정하려면 우선 각혈부터 고쳐야 했다. 용왕에게 가라고 하면 양왕의 출정을 막는 정당한 이유가 사라진다. 양왕이 그의 형이니 말이다.

“게다가 너희들은 전장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지켜 줄 장군도 없는데 그저 사기만 북돋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정선제는 서안을 사정없이 내려치고는 버럭 호통을 쳤다.

“기백이 넘치는 우리 대제에 나서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단 말이냐?”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감하게 나서서 출정하겠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그곳은 응성이었다. 용맹스러운 풍씨 가문 장수들도 잇달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누가 감히 출정하겠다고 하겠는가.

“방법을 생각해 내거라! 이럴 때 나무토막이라면 너희들에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정선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거듭 호통을 쳤다.

“이 일이 해결되기 전에는 누구도 퇴청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은 다시 토론을 시작했고 끊임없이 의견을 내놓았지만, 실상은 강왕과 허 장군, 영국후부 사람을 보내라는 말을 에둘러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한편으로 다른 귀족 출신 무관을 보내라는 의견도 제시됐으나 방안이 거론될 때마다 그에 따른 각종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논쟁은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정선제는 자기 입으로 일이 해결되기 전엔 퇴청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연로하고 쇠약한 몸은 장시간 이어지는 조회를 버티지 못했다.

정선제는 오시가 되자 허기가 져서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퇴청하여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조정 신하들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어선방에 명을 내렸다. 하지만 신하들이 궁을 떠나지는 못하게 했다.

궁 안 다른 관아의 관리들은 전부 퇴청한 상태였다.

한림원도 요 며칠간 국사를 수정하지 않고 응성과 옥안관 일로 분주했다. 어쩌면 좋은 계책을 생각해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범수는 쉬지 않고 전조의 국사와 전쟁을 기록한 서책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서 작은 묘책이라도 찾아낼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위기를 해결해 낸다면 황제는 분명 자신을 달리 보게 될 것이었다.

퇴청 시간이 됐는데도 그는 여전히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사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주운환은 붓을 씻고 있었다. 퇴청하려는 모양이었다.

조범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신은 두각을 드러낼 기회를 얻기 위해 쉼 없이 서적을 보느라 분주한데 주운환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는 이 기회가 대수롭지 않은 게 분명했다. 황제를 뵐 기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불공평한 처지에 화가 난 조범수는 저도 모르게 조롱 섞인 말을 건넸다.

“주 수찬은 집에 가려는 모양이네?”

“네.”

주운환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리따운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에휴, 주 수찬은 참 한가하구먼. 응성 쪽 전투에는 관심도 안 두고 말이야. 어쨌든 간에 그곳은 주씨 가문이 예전에 지키던 곳인데 지금 참혹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조범수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주씨 가문이 문관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문관이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적어도 응성 쪽을 위해 계책을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

주운환은 눈에 싸늘한 조롱기를 내비치며 되물었다.

“그럼 조 편수는 어떤 묘책이라도 생각해 내셨습니까?”

그 말에 조범수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생각하는 중이라네.”

“운환이도 생각하는 중이에요. 다만 이곳에 머물러 생각하는 게 아닌 것뿐이죠. 운환이는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할 겁니다. 밖에 나가 걷다 보면 묘책이 떠오를지도 모르죠.”

진지항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조 편수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죠.”

진지항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운환은 이미 자신의 책상을 깨끗이 정리한 후였다.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조범수는 함께 퇴청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 진지항이 밖에 나가서 걷다 보면 묘책이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묘책을 떠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조정의 나이 든 관리들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런 시기에 밖을 돌아다니면 분명 응성 전투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사람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조범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한림원에 있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퇴청 시간에 바로 귀가한 반면에 저 혼자 추가 근무를 하고 있으면 적어도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주운환과 진지항은 궁에서 나간 후 바로 궁 밖에 있는 마관馬館으로 향했다. 말을 세워 두는 마구간으로 걸어가다가 진지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범수 그 늙다리가 한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마. 응성 전투 때문에 초조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대책 마련에 고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대책이라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인재가 부족할 뿐이죠.”

주운환은 그리 대꾸하며 말고삐를 풀고는 말 위에 올랐다.

“운환아?”

진지항은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주운환은 말채찍으로 제 준마를 가볍게 내려치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 * *

그 시각, 궁명헌.

엽연채는 서차간의 기다란 탁자 위에 몸을 숙인 채 수본을 그리고 있었다.

혜연은 소청에서 밥상을 차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추길의 기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께서 돌아오셨어요.”

엽연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계속해서 수본을 그렸다. 잠시 후, 주운환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엽연채는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관복을 벗지 않은 그는 엄숙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주운환은 엽연채 맞은편에 놓인 등받이가 없는 낮은 걸상에 앉아 낮은 소리로 물었다.

“뭘 하고 있었습니까?”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수본을 그리고 있잖아요.”

그러고는 ‘보면 몰라?’ 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주운환은 엽연채가 종이에 그리고 있는 꽃무늬들을 쳐다봤다. 그림 실력은 평범했지만 하나같이 귀여워 보였다.

수본을 그리던 엽연채는 말도 없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

“소저가 수본을 그리는 걸 보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반짝거리는 커다란 두 눈이 자신을 힐끗 쳐다보자 그는 가슴이 살짝 일렁였다.

엽연채는 말문이 막혔고 방금 전 속으로 보면 모르냐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도 똑같은 바보짓을 해 버린 것이다.

엽연채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옷 갈아입으러 안 가요?”

“밥 먹고 가려고 합니다.”

주운환이 이리 대꾸하는데, 혜연이 소청에서 소리쳤다.

“아가씨, 공자.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엽연채는 화필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부부가 함께 소청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탁자엔 세 가지 반찬과 탕 하나가 차려져 있었다. 평소와 같이 백채소육사와 오이냉채, 토마토 달걀탕이었다.

“이거 가지고 되겠습니까?”

“네.”

주운환의 물음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먹으면 꽤 괜찮아요. 담백하고 소화도 잘되거든요. 그리고 이런 날씨엔 냉채를 먹어 줘야죠.”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한 후로 주방 쪽에서도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재료를 아끼지 않았고 익기도 딱 적당하도록 신경을 썼다.

부부는 그렇게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서차간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수본을 그렸고 주운환은 난죽거로 향했다. 그는 집에서 입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궁명헌으로 돌아왔고, 엽연채 앞에 앉아 그녀가 수본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엽연채는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얼굴을 숙인 채 가지에 핀 해당화를 그리고 있었다. 꽃봉오리도 있고 반쯤 핀 것도 있으며 활짝 핀 것도 있는데 송이마다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드리운 그녀의 모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엽연채는 주운환이 자신을 계속해서 쳐다보자 좀 어이가 없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다.

엽연채가 수본을 완성하니 시간은 이미 오후가 되어 있었다. 또 같이 식사를 한 후에야 주운환은 문을 나섰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응성의 일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풍 노장군이 참수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풍씨 가문 젊은 장수 다섯 명 중 셋은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가장 어린 두 명이 패잔병을 데리고 옥안관으로 퇴각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응성에서 참혹한 살육이 벌어졌단 소식에 백성들은 잇달아 탄식했다.

“끔찍해! 응성은… 운도 없지. 에휴! 대체 어찌 된 일이래? 이제 겨우 9년이 지났을 뿐인데 또 이런 처참한 일이 벌어지다니.”

주 백야도 응성 쪽 일을 듣게 되었다. 일상원에 틀어박혀 있던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진씨는 그런 그의 옆에 앉아 있었고 주묘서, 주묘화, 강심설, 주종과는 방금 막 문안 인사를 드린 후 권의에 앉은 참이었다.

주 백야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응성은 어쨌든 자신이 수년간 지키던 곳으로, 그곳이 다시 짓밟히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전장의 참혹함, 새빨간 피와 시체들이 떠오르자 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가족들은 전부 이곳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말이다.

주 백야는 아래에 자리한 아들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다가 감상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이제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부모 형제가 흩어지는 생이별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가문이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셋째가 장원 급제를 했으니 시련을 헤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문관이 되는 것도 괜찮다.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씨는 가문이 주운환에게만 기대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대번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참, 가족들끼리 함께 식사한 지도 오래됐으니 점심에 일상원에 상을 차립시다.”

주 백야가 말했다.

진씨는 주운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주묘서의 혼사를 떠올리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응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죠.”

주 백야는 가족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응성 전투 같은 건 위쪽에서 해결하게 두면 된다. 어차피 자신들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들은 관여하고 싶어도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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