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47화 (347/858)

제347화

이튿날 아침, 주운환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찍 문을 나서 관아에 갔다.

엽연채는 진시辰時(오전 7시~9시)의 절반이 지날 때까지 잠을 자다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긴 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혜연이 물을 길어오자 엽연채는 세수를 한 다음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런데 추길이 늑장을 부리며 오지 않자 엽연채는 좀 짜증이 나 밖을 향해 소리쳤다.

“추길아?”

“아이고, 예!”

문 입구에서 추길의 대답이 들렸고 이어 그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디 갔던 거야?”

엽연채가 그녀를 쏘아봤다.

“난죽거에 가서 공자께서 일어나셨는지 보고 왔습니다.”

추길은 엽연채 뒤로 걸어가 상아 빗을 집어 들고는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거울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비쳤는데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오늘 휴가 아니니? 그런데 어째서 또 관아에 갔단 말이냐?”

혜연이 옷을 들고 걸어와 한쪽에 있는 옷걸이에 걸며 엽연채에게 대답했다.

“들어 보니 변경에서 또 전쟁이 일어나 윗분들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일 조회에 참석해 그에 관해 의논해야 한다고 해요. 황제 폐하와 재상, 상서 등 중신들이 모두 휴가를 쓰지 않고 있는데 공자께서 어떻게 감히 휴가를 쓰시겠어요.”

추길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랬던 거구나! 그럼 한동안 휴가를 쓰지 못하시는 거네.”

추길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그저 휴가를 쓸 수 있는지 여부였다.

엽연채는 변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철렁했고,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서 머리를 만져 주렴. 잠시 후 밖에 있는 요릿집에 가서 요기나 하자꾸나.”

“와!”

그 말에 추길은 또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 가서 드실 거예요? 진귀루에 가나요?”

진귀루는 도성 북쪽에 자리한 제일 좋은 요릿집이었고, 엽연채는 종종 그곳에 가서 음식을 포장해 오곤 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청륭青隆 찻집으로 가자꾸나.”

“아! 안 간 지 오래됐죠!”

추길은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청륭 찻집 역시 도성에서 아주 유명한 곳인데, 음식 맛은 평범하지만 그곳만큼 재미있고 시끌벅적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청륭 찻집엔 설화자가 수없이 많아 그곳에 가면 앉아서 간식거리를 먹으며 설화자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나 소문을 들을 수 있는데,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듣자 하니 청륭 찻집은 이 특색으로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매달 설화자들에게 보수를 주며 날마다 찻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풀어놓게 한다고 했다.

치장을 마친 엽연채는 오밀조밀한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수홍색 적삼과 치마로 갈아입고 혜연, 추길과 함께 문을 나섰다.

청륭 찻집은 요 며칠 동안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2층 대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한가운데 설화자는 사방으로 침을 튀겨 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설화자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이야기를 듣는 데 푹 빠진 모습이었다.

대당으로 올라온 엽연채가 자리에 앉자 회색 옷을 입은 한 영감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쑥한 차림에 산수화가 그려진 쥘부채를 들고 있었다.

“이제 응성은 아마……. 쯧쯧!”

“설마요?”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응성이 함락되면 서남쪽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쪽으로까지 진격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풍 노장군께서 그쪽으로 가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모르는 일이지요. 풍씨 가문에서 가장 용맹했던 분이 목숨을 잃은 풍 대장군이잖습니까. 안타까울 따름이죠, 에휴!”

영감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쥘부채로 손아귀를 톡톡 두드렸다.

“정양절에도 윗분들은 천수하로 용선 경기를 보러 갈 기분이 아니었고, 이젠 휴가조차도 보내지 않는다고 하죠. 아무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그는 더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당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식이 흘러나왔다. 탁자에 차려진 간식거리를 입에 넣어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한편, 그들이 기다리는 소식은 지금 황제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정선제는 주황색으로 수정 사항을 적어 둔 노란색 상주서로 시선이 향했다.

대신들은 전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아래에 서 있었다.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위 차림의 한 남자가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뿐 아니라 노왕, 태자, 양왕, 나이가 가장 어린 용왕까지 그곳에 오른쪽에 일렬로 서 있었다.

태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그 시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 시위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보고를 이어갔다.

“풍 노장군이 군량과 마초馬草를 가지고 응성으로 가고 있었는데 응성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서노의 군사들에게 포위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여 데려간 20만 대군 중 17만의 사상병이 발생했고… 풍 노장군은 남은 3만 병력을 이끌고 응성으로 들어가 풍씨 가문 젊은 장수들과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못 가 응성이 함락되어 그곳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하옵니다…….”

정선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위는 이어서 말했다.

“풍 노장군과 젊은 장수 셋이 참수되었습니다. 풍씨 가문의 두 젊은 장수는 남은 5만 명을 데리고 옥안관으로 물러나 지금 그곳을 사수하고 있사옵니다.”

그러자 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군량과 마초는?”

“군량과 마초는 빼앗겼다고 하옵니다.”

시위가 작은 목소리로 그리 답하자, 정선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전지신이 굳은 얼굴로 말문을 뗐다.

“힘들게 준비한 군수품이… 저희 호부가 텅 비어 버렸습니다.”

“일단 군량과 마초는 제쳐 두고 누굴 응성으로 파견할지 먼저 생각해 봅시다.”

양왕이 냉소를 지으며 중점을 짚었다.

“이제 풍씨 가문의 남은 두 장수는 쓸모가 없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풍씨 가문은 끝났습니다.”

양왕의 이어진 말을 들은 태자와 영국후부 후야, 요양성, 전지신 등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풍씨 가문은 태자 측비의 친정이며 태자의 손에 쥐어진 병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그 병권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었다.

상석의 정선제는 흐리멍덩한 눈을 가늘게 뜨며 아래의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현재 부릴 수 있는 무장이라고는 고작 강왕, 허대실, 영국후부, 풍씨 가문뿐이었다. 물론 도성에 상관수, 오일의 등이 있지만, 그들은 금위군 대장과 도성을 수비하는 병영의 책임자이니, 절대로 전용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선제는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무장들이 언제 이렇게 줄어들었다는 말인가. 쓸 만한 무장이 한 명도 없다니.

하나 지금은 이런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응성과 옥안관이었다. 옥안관이 뚫리면 서남의 열두 개 주州를 절대로 지킬 수 없게 된다.

“강왕 전하나 허 장군을 옥안관으로 동원하는 건 어떨지요?”

병부 상서가 이리 운을 떼자 유 재상이 바로 반박하고 나섰다.

“서북은 면적이 넓어 두 사람은 그곳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이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을 옥안관으로 동원하게 되면 서노 북군北軍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서노군이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영국후부는 어떻소?”

양왕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으로 한쪽에 서 있는 영국후부 후야를 쳐다봤다. 영국후부는 바로 황후의 친정이었다.

“그건…….”

울퉁불퉁한 얼굴의 영국후부 후야는 안색이 확 변했다.

“영국후부는… 이미 거주醵州를 지키느라 여력이 없사옵니다.”

그 말에 양왕은 ‘풉’ 웃으며 반문했다.

“전쟁 하나 없는 거주를 지키는 데 여력이 없다니요?”

“이!”

영국후부 후야는 표정이 확 굳었으나 한마디도 쏘아붙이지 못했다. 정선제는 영국후부 후야의 이런 나약하고 못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영국후부는 대대로 거주 지역에 군대를 주둔해 그곳을 지켜 왔다. 거주에선 몇십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거주를 지키는 건 가장 편안한 일이었고, 국토를 수호한다는 좋은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동안 영국후부는 점점 더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졌다. 그만큼 게을러진 것 역시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그들을 응성으로 보내는 건 죽으러 가라는 말이나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사실 그들이 죽으러 가는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래서는 병력이 손실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양왕의 비웃는 눈빛을 쳐다보던 태자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영국후부 후야는 자신의 외조부였다. 그런데 양왕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를 조롱한 것이다.

참다못한 태자가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사람을 비웃느니 아우가 직접 출정하는 건 어떤가?”

말을 마친 태자는 자기가 내뱉은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태자의 안색이 확 변했다.

“예, 그리하지요.”

양왕은 즉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가 출정하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황자를 출정시키옵소서!”

사부상서 자학전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현재 옥안관을 지키는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을 겁니다. 양왕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대신해 직접 출정하시면 분명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태자와 영국후부 후야 등은 안색이 확 변했다. 태자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출정을 하려면 마땅히 소자가 해야 하옵니다. 태자인 제가 당연히 아바마마를 대신해 출정하겠습니다.”

“소자도 출정하겠사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노왕과 용왕도 잇달아 쿵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고 조정 신하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정선제는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끄럽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 지금 사기만 북돋는다고 해결될 일 같으냐?”

“아바마마, 소자의 몸엔 소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싸울 수 있사옵니다!”

양왕이 물러서지 않자 정선제의 머릿속에 또다시 소 황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진 그는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된다. 넌 스스로를 잘 지키거라.”

양왕을 보내면 병권이 양왕의 손에 떨어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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