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이때, 밖에 있던 시위 하나가 안으로 달려 들어와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 방금 전 응성에서 보낸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풍 노장군이 응성에 당도했다고 하옵니다.”
시위는 서찰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말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어린 환관이 얼른 서신을 건네받아 서안 위에 올려 두었다.
정선제의 낯빛은 금세 어두워졌고 조정의 신하들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도착했다는 말이냐?”
정선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도성에서 응성까지는 수로와 육로를 바꿔 가며 속도를 내면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한데 사월 초엿샛날에 출발한 풍 노장군이 사월의 마지막 날인 그믐이 되어서야 도착을 했으니, 가는 데 근 한 달이나 걸린 것이었다.
풍 노장군의 몸이 여정을 견디지 못한 게 분명하니, 정선제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 걱정 마시옵소서. 아마 풍 노장군께서 중요한 일 때문에 여정을 지체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병부 상서가 말했다.
“맞습니다.”
관원들은 얼른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선제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또 고개를 돌려 어사들을 나무랐다.
“보거라.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국가의 대사들이 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너저분하고 하찮은 일만 쳐다보고 있지 말란 말이다!”
깜짝 놀란 어사들을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가의 대사에 대해 자신들이 무슨 탄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큰일이 일어날 경우 나서서 탄핵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황제가 진노해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소한 일을 탄핵해 봤자, 황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지금처럼 풍기나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응성의 상황은 어떠하냐?”
정선제의 하문에 시위가 즉시 대답했다.
“풍 노장군이 응성에 도착한 후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풍 소장군들이 모두 냉정함을 되찾아 이미 결속하여 반격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노장군은 전장에서의 경험이 풍부합니다. 응성 쪽에 도착했으니 직접 젊은 장군들을 이끌고 서노와 남쪽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이옵니다.”
시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지신이 이렇게 보충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얼른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선제는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풍 노장군을 응성으로 보낸 건 그가 직접 전장에 나서길 바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주재하며 계책을 내놓고 풍씨 가문의 젊은 장수들을 위무慰撫(위로하고 지지함)하려던 목적이었을 뿐이다. 그러면 소장군들이 중심을 잡고 다시 서노와 남쪽 이민족들은 몰아내리라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쪽에 서 있던 양왕은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칠순이 넘은 늙은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응성까지 서둘러 가는 것만도 한 달 가까이의 시간을 써야 했다.
양왕은 풍씨 가문이 패해 주운환이 출정할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랐지만, 또 한편으론 그래도 풍씨 가문이 패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전장 경험이 부족한 주운환이 만에 하나라도 그곳에서 목숨을 잃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 * *
그 시각 한림원.
채결은 한참 동안 주운환을 위로한 후 한림원을 떠났다.
“운환아, 일이 잘 해결될 줄 알았다.”
진지항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돌아가면 저 대신 형님 어머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조범수는 벌써부터 가족 간의 두터운 정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주운환이 처리되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진지항에게도 불똥이 튀었을 것이다. 실제로 요 며칠 동안 주운환과 진지항은 더 이상 상서방에 가지 못했으니 분명히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역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범수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언짢았다.
이때, 어린 환관 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진지항에게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진 편수 대인, 감축드립니다. 진 낭중께서 호부 우시랑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아?”
진지항은 깜짝 놀랐다.
“하하, 아버지께서 승진을 하셨구나!”
그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어린 환관을 향해 읍했다.
“알려 줘서 고맙소.”
그러면서 옷소매 안쪽에서 은 한 덩이를 꺼내 어린 환관에게 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린 환관은 이런 마음을 받으러 오는 게 목적이었기에 은을 받자마자 뛸 듯이 기뻐하며 돌아갔다.
조범수는 진지항의 아버지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배알이 더 뒤틀렸다. 일갑 안에 든 세 사람 중 자신의 배경이 가장 별 볼 일 없었다.
향신鄕紳(향촌에 살던 과거 합격자나 퇴직한 벼슬아치)이자 소지주 출신인 자신은 관계官界에서 기댈 곳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본래도 진지항의 출신을 부러워하고 질투했는데, 이제 진무가 승진까지 했으니 질투심이 그야말로 활활 타올랐다.
아무튼, 이번 조회에서 주운환은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고 진무는 승진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이 더 있었으니 바로 황제가 태자의 금족령을 풀어 주며 군수품 준비를 도우라고 한 것이었다.
태자는 그동안 금족 상태였긴 해도 바깥 사정은 훤히 꿰고 있었다. 요리가 끌어내려졌다는 소식을 알게 된 태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감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물론 따지자면 일개 시랑 자리에 불과한지라 그에게 있어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긴 했다. 형부 상서, 병부 상서, 호부 상서 그리고 오성병마사가 모두 그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쫓겨난 요리는 다시 복직시킬 방법을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화가 나는 건 요리를 끌어내린 사람이 바로 장찬이라는 점이었다. 장찬도 그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장찬이 자신의 사람을 끌어내린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조회가 끝나자 태자의 사람들이 장찬의 앞을 가로막고는 그를 회미천하로 데려갔다.
장찬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태자에게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찬의 모습을 보자 태자의 수려하고 기품 있는 얼굴이 싸늘하고 어둡게 변했다.
“장 대인, 일어나시오.”
장찬은 몸을 일으켰다. 요리를 끌어내릴 때 태자에게 문책당하는 날이 올 것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장 대인은 요리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끝까지 조사한 것이오?”
태자가 써늘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이런 일은 매관을 조사하는 선에서 그만두면 충분했다. 용두사미로 끝내면 될 일로 그리 물고 늘어질 필요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제 마음을 떠보고 계셨기에 조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찬의 대답에 태자는 순간 당황했으나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그렇군.”
황제는 자신의 신하가 이심異心을 품고 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장찬은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태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하, 소관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여쭤보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오?”
태자는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사월 초, 소관 증손자의 만월연에 백 측비 마마께서도 오셨습니다. 그날 백 측비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만만이가 후보에서 탈락한 건 결코 태후 마마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만만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장찬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태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만만이 간택되지 않은 건 사실 자신이 백여언의 미모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또 백여언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자신은 어떻게든 측비가 되어야겠다고도 했었다.
당시 자신은 그녀를 총애했기에 무슨 일이든 그녀의 뜻에 따라 주었고, 자신 또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측비를 원했기에 장만만을 탈락시킬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그렇게 장만만을 떼어내며 장만만과 장찬의 평판마저 망가뜨렸다. 그뿐만 아니라 장찬이 잘못은 장씨 가문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에게 더욱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게 했다.
전에 자신이 장만만을 측비로 들이는 데 동의했던 건 장찬이 저를 도와 중요한 일들을 꽤 많이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했던 말을 지키지 않았으니, 지금 장찬이 대놓고 이 일을 언급하자 태자는 난처하고 곤란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벌써 성을 냈거나 오히려 장찬을 비웃었을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주 많기에 장찬 하나 없어진다 해도 아쉬울 게 없다고 여겼을 테니까.
그러나 풍 장군이 전사하면서 풍씨 가문은 응성 쪽에서 한바탕 난리를 겪었으며 거기에 요리도 축출됐으니,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장찬은 예전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므로 다시 신중히 대해야 했다.
태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꾸며 내며 말했다.
“장 대인, 그 말이 무슨 뜻이라니요?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사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장찬은 태자가 모르는 척하는 걸 보고 그가 여전히 자신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함을 깨달았다.
“장 대인, 그간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하오.”
태자는 그리 말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필시 백 측비 때문이겠지. 백 측비는 허영심이 많은 여자요. 장씨 가문 소저가 상처 입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 일부러 소저를 조롱하러 간 것이오. 여인들은 그런 걸로 실랑이하기를 좋아하지 않소이까.
큰일을 이루는 데 이런 사소한 것에 얽매여야 되겠소. 장 대인은 이 어리석은 여인과 똑같이 행동하지 마시오. 내 돌아가면 반드시 백 측비에게 중벌을 내릴 테니.”
그가 변명할 줄 이미 짐작했던 장찬은 공수하며 수긍했다.
“소관이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장 대인은 그저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안사람 단속을 제대로 못 한 탓이오.”
태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 대인, 자리에 앉으시오. 함께 한잔합시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