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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337화 (337/858)

제337화

엽연채를 마주한 진씨는 속으로 켕기는 바가 있어 그 일을 인정하지 않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주묘서가 먼저 일을 벌이자 자신도 마음을 독하게 먹고 없던 일인 셈 치기로 했다.

그렇다. 인정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뭐 어쩌겠는가? 증거라도 찾아서 내놓겠는가?

당시에는 혼담이 오가는 단계였다. 일반적으로 정식으로 혼사가 정해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알 수 없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혼사가 성사되지 않을 경우 웃음거리가 되며 양가의 평판에 흠집이 나기 때문이었다. 엽영교와 맹흠의 일이 그 일례였다.

작년에 중매를 섰던 사람은 온씨이고 그녀는 엽연채의 어머니이니 두 사람이 작당했다고 자신들이 몰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빙성이 없어진다. 그리고 엽연채 부부는 진씨 가문과 엽씨 가문 양가의 중매인 노릇을 했으니 진씨 가문의 입장과 그들이 하는 모든 말도 신빙성이 없게 된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일이니 저쪽의 말은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되었다.

민주閔州의 학자 가문 출신인 진씨는 스스로 인품이 아주 고결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라 이런 억지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야만 했다. 하지 않으면 체면이 깎일 일만 남을 테니 말이다.

엽연채의 아리따운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머님, 큰아가씨. 억지를 부리며 잡아떼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 그런 일이 없었는데 뭘 인정하란 말이에요! 엉엉…….”

주묘서는 쉰 목소리를 내질렀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지켜보던 주 백야도 정신이 하나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누구를 믿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 주 백야는 진씨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진씨는 민주 명문가인 진씨 가문의 여식이자 학자 가문 출신이고 성품이 고상하니, 절대로 억지를 부리는 뻔뻔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곤 해도 지금 주 백야는 그저 가화만사성을 바랄 뿐이었다.

“에휴, 왜 이리 수선을 떠는 것이오.”

주 백야는 훅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소란을 피워 봤자 아무 소용도 없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고 싶은 것이오?”

그러자 진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주 백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대단한 일이냐고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묘서를 확 잡아당기며 냉소를 띠었다.

“네.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가자! 우린 모두 남인가 보구나!”

주묘서는 훌쩍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매서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보고는 진씨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

“이런…….”

주 백야는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려 엽연채에게 말했다.

“셋째야……. 우린 한 가족이다.”

그러자 엽연채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봤다.

‘저런 얼빠진 인간을 봤나.’

엽연채는 그를 상대하기도 귀찮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주 백야는 하나둘 자리를 뜨는 모습을 쳐다보며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진씨와 주묘서를 찾으러 갔다.

일상원은 진씨의 처소인데 진씨가 주묘서를 끌고 밖으로 나갔으니 당연히 주묘서의 처소로 갔을 것이다. 주 백야는 얼른 그들을 쫓아갔다.

정원 문을 나선 그가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니 유리 유약을 발라 구운 오지 기와가 덮인 사각지붕 정자를 사이에 두고 ‘영시거詠詩居’라 불리는 뜰이 보였다. 이곳은 일상원을 제외하면 현재 주씨 가문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뜰이었다.

주 백야가 안으로 들어가자 정원의 낭가廊架 아래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주묘서와 그녀를 달래고 있는 진씨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오해와 고충이 있었을 것이오.”

주 백야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 탐화가… 스물세 살 정도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좀 많지 않소. 그러니 엽영교에게 소개하는 게 적당하지 않겠소. 어쩌면… 셋째가 묘서를 위해 더 좋은 짝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오.”

진씨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는 냉소를 지었다.

“그 애가 아는 사람 중에 진지항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주 백야는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그는 얼른 두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저 인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거요. 진지항은 묘서의 운명의 짝이 아닌 게지.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에 불과해. 넌 분명 그자보다 더 좋은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을 게다.”

그는 점점 더 작아지는 목소리로 이리 말하고는 뒷짐을 지더니 그곳을 떠났다.

주 백야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주묘서는 그만 참지 못하고 또 눈물을 흘렸고 분노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희가 소란을 피웠지만…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버지는 또 저희를 위해 나서지 않으실 거고 나설 능력도 없으세요. 어쩌면 좋죠? 방금 전에 새언니에게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벌을 내렸어야 했어요. 어떻게 그리 가족의 정도 모를 수가 있단 말이에요?”

“누가 소용이 없다고 했느냐?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는 건 앞으로 받을 벌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어디 두고 보자꾸나. 춘산아, 녹지야. 가서 행장을 꾸리거라.”

춘산과 녹지는 어리둥절해졌으나 이내 춘산은 방 안으로 들어갔고 녹지도 일상원으로 돌아갔다.

* * *

한편, 엽연채와 추길, 혜연은 함께 서과원으로 돌아왔고 화가 난 추길은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저렇게 후안무치한 사람들은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엽연채는 차갑고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추길아, 가서 우리 어머니께 이 일을 진씨 가문과 어머니 말고 또 누가 알고 있는지 여쭤보거라.”

추길은 알겠다고 대답을 한 뒤 월동문을 넘어 서쪽 수화문으로 향했다.

궁명헌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나한상에 엎드려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아가씨, 지금 초조해하셔도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화본을 보시지요.”

“읽어 봤자 눈에 안 들어온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게다가 이번 책은 지난번보다 재미도 없고.”

대략 반 시진쯤 지나자 추길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더니 엽연채의 나한상 옆에 서서 말했다.

“마님께서 말씀하시길 혼사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그저 혼담을 꺼내러 갔던 것뿐인데 그런 이야기를 밖에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셨습니다. 마님께서는 진 부인이 한 말을 듣고 바로 전하러 왔던 것이라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미간을 더욱 심하게 찌푸렸다. 밖에 있는 물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오시午時(오전 11시~ 오후 1시) 이각이 되자 마침내 주운환이 집으로 돌아왔다.

주운환이 뜰 문으로 들어서니 낭하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앞섶이 교차하는 해당화가 수놓인 담홍색 적삼에 하얀빛을 띤 노란색 월화군을 입었는데, 가느다란 허리에 두른 비단 허리띠 덕분에 날렵한 몸 선이 드러나 있었다. 손에는 반투명한 둥글부채를 들고선 그곳에 서서 목이 빠지도록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자.”

엽연채는 기뻐하며 얼른 그에게로 달려갔고 주운환은 쪼르르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공자, 집안에 소란이 났어요.”

엽연채는 조그만 머리를 치켜들고 그의 발걸음에 맞춰 안으로 들어가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나서야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소란을 피워 어사가 공자님을 탄핵할까 봐 걱정돼요.”

주운환이 보니 그녀는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뽀얀 얼굴을 치켜들고 있었고 이마에 난 솜털은 땀방울에 젖은 채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덮고선 문지르기 시작했다.

“웁…….”

엽연채는 그가 갑자기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자 순간 어리벙벙했다.

“우읍… 이……!”

그녀는 간신히 그의 손을 밀치더니 샐쭉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땀이 났기에 닦아 준 겁니다.”

“이렇게 닦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엽연채가 화를 내는데도 그는 또 손수건을 그녀의 얼굴로 던지더니 방금 전처럼 문질렀다. 엽연채는 어이가 없었다. 화본에서는 다들 이마를 살살 닦아 주지 않던가?

“웁, 전 지금, 공자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저도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주운환은 잔뜩 성이 나서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봤자 탄핵에 불과합니다. 그럼 더 강하게 대응하면 되겠지요.”

엽연채는 머리를 갸우뚱했으나 그에게 자신만의 계획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 *

이튿날 아침, 진씨와 주묘서는 짐을 챙기더니 마차를 타고 도성 밖으로 나갔고 엽연채는 그 소식을 듣더니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그리고 그 시각, 도성의 여러 극장과 찻집들에선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제 일상원 쪽에서 그런 큰 소란이 일어났으니 밖에 있던 여종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밖으로 이야기를 퍼뜨렸던 것이었다.

“맹씨 가문을 넘보다가 실패했던 엽씨 가문 셋째 소저 있잖아. 그 소저가 마침내 시집을 가게 됐다고 하더라. 그런데 상대가 이번 과거 시험의 탐화래.”

“뭐? 어떻게 그런 횡재를 했대? 진씨 가문이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그게 다 장원의 공이라고 하더라. 엽 소저가 그 사람 아내의 친정 고모래. 또 탐화는 그 사람 동료이고. 그래서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거지. 좋은 일인 셈인데 뜻밖에도 주씨 가문에서 소란이 일어났대.”

“왜 소란이 일어난 거래?”

“주씨 가문에도 아직 시집을 못 간 소저가 있거든. 그 소저의 혼사 때문에 그 댁 부인이 마음을 졸여 머리가 다 하얗게 셀 지경이래. 그런데 장원 급제한 주 공자가 동료가 선을 보려 한다는 걸 알게 되자 훌륭한 신랑감인 탐화를 누이동생은 제쳐 놓고 아내의 친정 고모에게 소개를 해 준 거지.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

“쯧쯧.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아내를 얻으니 어머니는 안중에도 없는 거네.”

“그 아내인 주 대소저는 적출이고 장원 급제자는 서출이니… 뭔 말인지 알지?”

“아하…….”

이 소문을 들은 엽영교와 묘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얼른 엽연채에게 서찰을 보냈다. 엽연채는 추길을 보내 자기 부군에게 대비책이 있다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손씨와 엽이채는 엽연채 쪽에 또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흥분감이 몰려왔다.

장씨 가문에 있던 손씨는 손자를 어르고 있었는데 여설이 와서 이 좋은 소식을 아뢰자 기쁜 나머지 희색이 만면했다. 그녀는 엽이채를 쳐다보며 흐뭇해했다.

“보거라. 이게 바로 인과응보다.”

그러더니 또 주씨 가문으로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했고, 그다음에는 돈을 좀 써서 소식을 밖으로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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