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32화 (332/858)

제332화

진지항은 얼른 부친의 뒤를 쫓으며 입을 뗐다.

“아버지, 운환이가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한 일은…….”

부자는 이미 집 중앙의 정원에 도착했고 진무는 돌아서서 진지항에게 말했다.

“알겠으니 넌 나가 보거라! 내가 네 어머니와 상의해 보마.”

진지항은 그 말을 듣고 희색이 만면했다.

‘아버지께서 동의하셨다는 말이지?’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걸어갔다.

진무가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태사의에 앉은 진 부인이 우 마마와 함께 손에 든 화첩을 넘기고 있었다.

진 부인은 남편을 보고 반색했다.

“나리, 마침 잘 오셨어요. 와서 항이의 배필을 좀 골라 보세요. 좋은 배필을 고르면 항이가 뭐라 하든 말든 바로 정혼을 시킬 겁니다.”

진무는 찻상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마마는 물러가게나. 부인과 상의할 일이 있다.”

“예.”

우 마마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진 부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부부 두 사람만 남자 진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고를 것 없소. 어제 항이가 당신에게 엽영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 아이로 합시다!”

“예?”

진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엽씨 가문은 예전 같지 않단 말입니다! 저희 진씨 가문의 체면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맹씨 가문 아들과도 추문이 퍼졌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게 있소. 오늘 항이도 상서방에 가는 기회를 얻었다오.”

“정말요?”

진 부인은 순간 멍해지더니 이어 뜻밖의 희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그런 좋은 일이 있었군요. 새롭게 뽑힌 진사들은 보통 한림원에서 국사 등의 자료를 수정할 뿐이고 상관인 시강과 시독이 상서방에 드나들지 않습니까? 듣기론 요즘 황제 폐하께서 장원 급제자를 자주 부르신다고 하던데 이제 항이에게도 차례가 온 겁니까?”

“아니오. 오늘 황제 폐하께서 항이를 부르신 건 장원 급제자인 주운환이 일부러 기회를 줬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오.”

진무는 사정을 알려 주고는 다시 엽영교를 입에 올렸다.

“엽영교는 주 부인의 고모요.”

“그게 뭐 어떻다는 말씀이세요?”

진 부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친정 고모에 불과합니다.”

“그쪽을 주 공자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상서방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항이에게 준 것이오. 오늘도 부러 나를 찾아와 이 이야기를 꺼냈고.”

진 부인은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하더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진무가 홀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 애가 엽영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소? 중요한 건 그 애가 항이에게 기회를 줬다는 것이오. 나무 하나론 커다란 집을 지탱할 수 없고, 관리 사회는 바다와 같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 있소. 엽영교는 그저 연결 고리일 뿐, 그쪽에서 실지로 원하는 건 우리 진씨 가문과의 동맹이오.”

진 부인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반박했다.

“그 애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린 그 애가 꼭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애가 비록 이번 과거 시험의 장원 급제자이긴 하지만 주씨 가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이고 엽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 당장 그 애가 황제 폐하의 성총을 받는 것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당신 말은 틀렸소. 당장 눈앞의 일을 보지 않으면 무얼 본단 말이오?”

진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항이의 혼사를 통해 얻고 싶은 게 무엇이오? 그저 좋은 며느리를 얻고 싶은 거면 엽영교도 충분히 그런 며느리가 될 수 있소.

그런데 당신이 지금 얻고자 하는 건 그 며느리의 가세가 아니오! 당신이 며느릿감의 가세를 따지면서 보는 것 또한 지금 좋은지 여부 아니오? 지금은 좋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누가 알겠소?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이 몇 년 전 유씨 가문이 얼마나 황제 폐하의 성총을 받았소? 그런데 결국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온 식구가 참형을 당했소!

지금 나이 어린 장원 급제자인 주운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소. 그렇다면 우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 아니겠소.”

진 부인은 탄식하고는 불평 섞인 말을 꺼냈다.

“됐습니다. 전 말로는 나리를 당해 낼 수 없어요. 하지만 엽영교의 평판이… 너무 안 좋습니다! 맹씨 가문과의 관계도 불투명하고요.”

“그 맹씨 가문과의 일을 믿는단 말이오? 그날 장씨 가문 만월연에 우리도 갔잖소. 당신 눈으로 보고도 모르겠소? 그저 장국후부 부인이 입이 가벼워 엽 소저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오.

우린 청렴한 가문이니 우리 쪽에서 그 아이를 며느리로 들이겠다고만 하면 사람들은 그 일이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오. 우리 진씨 가문은 눈뜬장님이 아니니 말이오.”

진무의 계속된 설득에 진 부인은 말없이 미간을 문질렀다.

“그 주 공자는 포부 없이 남의 밑에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고, 우리 아들도 그 소저를 좋아한다고 하니 양가가 혼인을 통해 관계를 맺읍시다!”

진무가 이 일을 결정짓자 진 부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하시죠! 우 마마!”

“예!”

우 마마가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가서 항이를 불러오게나.”

우 마마는 대답하고선 바로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진지항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진지항이 초조한 목소리로 묻자 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엽영교로 하자꾸나!”

진지항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를 뻔했다.

“아버지,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진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샐쭉거렸다.

‘정말 얼빠진 놈이지 않은가! 꾀 많은 주 공자가 파 둔 커다란 구덩이에 빠져 놓고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꼴이라니!’

* * *

그 시각 궁명헌.

엽연채는 새로 산 화본의 책장을 넘기는 중이었다. 혜연은 그 옆에 앉아 부채에 청록색 연잎과 분홍색 연꽃을 수놓고 있었다.

추길이 다가와 엽연채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건 지난번에 보시던 『원앙결』이 아니네요?”

“그건 다 봤어.”

대답하다 엽연채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난번에 줬던 책은 다 읽었으려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혜연은 엽연채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조앵기 말이다.”

엽연채는 몸을 돌려 나한상에 누우며 말했다.

“다 봤는지 모르겠구나. 얼굴을 못 본 지 한참 됐어.”

“양왕비 마마요?”

헤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지난번 황제 폐하께서 베푸신 연회에서 물에 빠지시는 바람에 양왕 전하께서 구하시지 않았나요?”

“음… 맞아.”

엽연채는 그 생각을 하자 머리가 좀 지끈거렸다.

“양왕 전하께서 구한 후에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혜연은 그저 말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엽연채에게 벗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출가하기 전에는 집안에서 외출을 못 하게 해 왕래를 하고 지내는 벗이 별로 없었다. 장국후부의 포모와 포기처럼 엽씨 가문과 관계가 좋은 몇몇 명문가 소저들이 고작이었는데, 그나마도 엽연채가 주씨 가문으로 시집오자 연락이 끊겨 버렸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하니 다시 서신을 보내오긴 했지만, 엽연채는 더는 그들과 왕래를 할 생각이 없었다.

“기회가 생기면 다른 화본도 선물해 드려야겠어.”

엽연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도련님.”

추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엽연채가 창밖을 쳐다보니 주운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얼른 손에 든 화본을 집어 던지고 밖으로 향했다.

“이야기는 잘됐어요?”

“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 부인 쪽은요?”

“그쪽도 해결됐습니다. 진 부인께서도 이미 허락하셨고요. 그분도 호쾌하고 사리에 밝은 분이니 빠르면 내일 엽씨 가문에 방문해 혼담을 넣으실 겁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주운환을 올려다보았다.

“공자, 정말 대단한데요!”

주운환은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쓱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 *

엽씨 가문.

묘씨는 여전히 엽영교의 혼사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씨와 엽승강은 문안을 드리러 온 틈을 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제가 여빈 형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형님은 여식이 그렇게 장난이 심하다는 걸 알고는 바로 그 아이를 혼쭐 낸 다음 오늘 아침 일찍 그 아이를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그 앤 계속 고향에서 지낼 거고 시집갈 나이가 되어야 다시 데려올 거라고 하셨고요.”

엽승강이 말했다.

“그리하면 어머니도 걱정 없으신 거죠?”

묘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아직 혼례식을 올리기 전이니 당연히 이쪽에서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렴요! 아니면 장흥후부 5공자에게 시집보내는 건 어떠세요?”

손씨는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싱글벙글했다.

“그쪽에선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종이 외쳤고 이어 활짝 핀 꽃문양이 들어간 방한용 문발이 걷어 올려지자 엽이채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를 안고 있는 유모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할머니.”

엽이채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를 올린 후 손씨 곁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아이고, 우리 귀여운 손자!”

손씨는 아주 기뻐하며 얼른 보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엽이채에게 말했다.

“이채야, 무슨 일로 온 것이냐?”

“고모의 혼사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거예요?”

엽이채가 물었다.

“지금 정하려고 하는 중이란다!”

손씨는 냉소를 지었다.

“주루를 운영하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빈의 재산에 대해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엽이채의 눈빛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정7품 지방 현관縣官의 남동생이고 재산이 많다고는 하나 상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실부인이 죽어 후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계모를 죽도록 미워하는 정실부인의 적녀도 있었다.

‘쯧쯧, 요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할까!’

엽이채는 요즘 자신이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엽연채가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된 것만 떠올리면 후회가 잔뜩 밀려왔다. 그런 상황에서 엽영교의 혼사가 순탄치 않은 걸 보니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면 비로소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아니면 뭐 어떠한가? 어쨌든 자신은 3품 고관의 손자며느리고 단번에 득남을 했으며 자신의 시댁은 권신 가문이었다.

그런데 엽영교의 선택지는 상인의 후처 아니면 반편이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고, 그도 아니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 공자의 이낭이 되는 것이었다. 엽이채는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져서 매일같이 친정에 와서 구경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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