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중매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운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진지항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그 고모 말이다……. 참 좋은 사람 같더구나. 여빈인가 뭔가 하는 사람에게 시집갈 바에야 나에게 시집오는 게 더 낫지.”
주운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웃으며 이리 대꾸했다.
“형님, 저와는 동료로만 지내고 싶다면서요. 인척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지항은 그 말을 듣고는 순간 멍해졌다.
“에이…….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네.”
주운환이 허허 웃자 진지항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내가 널 형님이라고 부르기는 뭣하니 네가 날 고모부라고 부르길 바랐나 보다. 네 손윗사람이 되어야 더 편하지 않겠니!”
그 말에 주운환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괜히 손윗사람만 한 명 더 생기게 됐구나!’
“어때? 성사시킬 수 있겠어?”
“예.”
그러나 이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퇴청한 뒤 형님 아버님과 함께 차를 마실 약속을 잡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친 후 일할 준비를 했다.
대략 한 시진쯤 지나자 장원학사 필 씨가 들어와 상석에 놓인 긴 탁자 앞에 앉았다. 이어 어린 환관이 주운환을 찾았다.
“주 대인, 상서방에서 부르십니다.”
“알겠소.”
주운환은 책상을 정리한 뒤 어린 환관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장원학사 필 씨는 주운환이 또 상서방에 가는 모습을 쳐다보자 몹시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시독과 시강도 돌아왔는데 황제는 여전히 주운환을 불렀고 이 기간 동안 한림원에서도 그를 불렀다. 상황이 이러니 마뜩잖아도 주운환을 어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한편, 상서방에 온 주운환은 관례대로 근처에 놓인 다층 진열장 옆에 섰다. 정선제는 커다란 박달나무 책상 앞에 앉아 상주서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남부 지역인 융주隆州의 제방 문제에 관한 상주서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하문했다.
“천수하天水河에 제방을 쌓는다면 몇 장丈을 쌓아야 하겠느냐?”
주운환은 질문에 대답하고선 이 말을 덧붙였다.
“제방이나 교량의 노면 등 수운水運에 관한 일은 진 편수가 더 정통하옵니다.”
그 말에 정선제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렇게 물었다.
“이번 시험에서 탐화가 된 자를 말하는 것이냐?”
“예, 폐하.”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선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불러오너라.”
채결은 놀랍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주운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신진이 상서방에 드나들 수 있는 건 크나큰 축복이니 당연히 이 기회를 꽉 움켜잡고 이곳에서 입지를 굳혀야 했다. 궁 안에선 경쟁이 치열하니 자신의 지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이면 당연히 본인이 대답하지, 어디 남에게 기회를 넘겨주려 하겠는가?
방금 전 주 대인은 분명히 제대로 답변을 했는데도 이 분야에는 진 대인이 더 정통하다는 말을 꺼냈다. 만약 진 대인이 와서 더 좋은 답변을 내놓는다면 본인에게 쏠린 관심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추천한다고?
채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서방을 나섰고 금세 한림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장원학사 필 씨와 조범수, 진지항이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 대인, 상서방에서 부르십니다.”
채결이 진지항을 찾자 장원학사 필 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지항은 어리둥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채결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그들은 상서방에 도착했고 진지항이 인사를 드리자 정선제는 그에게 제방 문제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진지항은 조목조목 꼼꼼하게 대답했다.
정선제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아주 자세히 알고 있구나. 농가 출신이냐?”
“아니옵니다.”
진지항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신은 도성 사람이고 부친은 호부낭중戶部郎中 진무이옵니다.”
“아!”
정선제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자네가 바로 호부낭중의 아들이었군!”
정선제는 호부낭중 진무를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진사 출신인데 과거 시험을 봤을 당시 등수가 높지 않아 동진사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개국 공신인 진씨 가문 조상을 봐서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공훈이 있는 귀족 집안인데 수로水路가 농가에 미치는 세세한 영향을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것이냐?”
정선제가 의아해하며 묻자 진지항이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어릴 때 부친께서 시간이 나면 소신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곤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었다고?”
정선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무가 달리 보였다.
때마침 그의 손에 충해蟲害에 관한 상주서가 들려 있어 정선제는 진지항에게 충해에 대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진지항은 이번에도 세세히 대답했고 정선제는 그의 대답에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키워 볼 만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제는 반 시진가량 분주히 정무를 보고선 주운환과 진지항을 돌려보냈다.
두 사람은 함께 한림원으로 향했고 진지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으로 황제 폐하의 고문 역할을 했는데 다행히도 모두 답할 수 있었네. 그런데 운환이 너도 답을 다 알고 있던 문제들 아니었어?”
“알긴 알지만, 형님만큼 정통하지는 않습니다.”
주운환의 이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저마다 장단점이 있는 법이었다. 자신은 제방과 충해에 대해선 서책에서 관련 내용을 읽어 보고 해결 방안을 암기했을 뿐이니, 어디 직접 경험하고 이해한 진지항에게 비교가 되겠는가?
두 사람은 한림원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국사를 수정하고 있던 조범수는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돌아왔구먼. 지항아, 어떻게 너도 상서방에 간 것이냐?”
진지항의 자리는 조범수의 앞쪽이라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이렇게 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하셔서 대답해 드린 것뿐이에요.”
그러고는 말을 아꼈다. 제방과 충해에 관한 상주서는 매년 많이 올라오지만, 어쨌든 황제와 관련된 일이니 가급적 말을 줄이는 편이 좋았다.
조범수는 질투심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황제가 주운환을 부른 건 그렇다 치지만 이젠 진지항도 불렀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주운환이 진지항을 추천하니 황제가 그를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 진지항만 추천하고 나는 추천하지 않는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청 시간이 되었고 정선제가 진지항을 불렀다는 소식은 금세 진무의 귀로 들어갔다. 뜻밖의 소식에 잠시 당황했던 진무는 이내 기뻐하며 주변을 정리하고 퇴청 준비를 했다. 호부를 나와 궁문 밖 마차를 세워 두는 곳에 도착하자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시위 차림의 사내가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진 대인, 저희 셋째 도련님께서 대인을 백취장百醉庄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진무는 시위가 주운환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백취장은 도성 북쪽에 위치한 주루로, 진씨 가문 저택도 정국백부처럼 도성 북쪽에 있는지라 마침 가는 길이었다.
진무는 마차를 타고 이각가량 이동해 백취장에 도착했다. 2층 객실로 올라가니 아직 관복 차림인 주운환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진무는 그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현질賢姪(조카를 높여 이르는 말)이구먼. 하하하.”
“어르신.”
주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하며 예를 올렸다.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친분이 전혀 없었지만 주운환과 진지항이 동료가 되었기 때문에 진무는 주운환을 현질이라고 불렀다.
“오늘 일은 다 자네 덕분이네. 정말 고마우이. 덕분에 내 모자란 아들놈이 황제 폐하 앞에 얼굴을 내밀 기회를 얻었구먼.”
진무가 전해들은 소식으로, 주운환이 진지항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제방은 형님이 잘 알고 있는 분야이니 형님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주운환은 사양하며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진무가 착석하고 점원이 술과 안주를 내오자 주운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르신, 부인께서 형님의 혼사 문제를 이야기하셨는지요?”
“혼사 문제?”
진무는 어리둥절해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이야기한 적 없네.”
“형님이 제 처고모님인 엽영교 소저에게 첫눈에 반하셨다더군요. 그래서 혼담을 꺼내고 싶은데 부인께서 동의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형님이 고민되는 마음에 저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가?”
뜻밖의 말에 진무는 깜짝 놀랐다.
‘엽영교? 아, 엽학문의 여식!’
“저는 이 일이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백옥 주전자를 기울여 술을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고모님은 아버지와 오라버니 일에 연루되어 혼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인정 많고 선량한 분이고 저희 고모님도 지혜롭고 어진 분이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형님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고모님도 자리에 계셨습니다. 두 분을 연결해 드리기 위함이었죠. 형님은 저희 고모님께 첫눈에 반했는데 부인께서 동의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르신, 이 일이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진무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탁자를 치며 동의했다.
“그럼!”
주운환은 시원한 응낙에 미소를 짓더니 술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어르신은 정말 호쾌한 분이십니다. 이제 저희는 인척이 되겠군요!”
“그래! 인척이 되는 거지! 하하하!”
진무도 술잔을 집어 들었고 두 사람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러곤 식사를 하며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마시니 시간은 이미 미시未時(오후 1시~3시)의 절반이 흐른 후였다.
진무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가 수화문에 멈춰 서자 그 옆에 자라난 대추나무 아래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진지항의 모습이 보였다.
진지항은 부친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
마차에서 내린 진무는 자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린 진지항을 보더니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어이구’ 하고 탄식했다.
“저 얼빠진 놈!”
그러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수화문을 넘어섰다.
진지항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보자마자 얼빠진 놈이라고 하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