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할머니께서 전할 말씀이 있으신 게냐?”
“큰아가씨.”
소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지난번 둘째 아가씨 아드님의 만월연이 있은 후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마님께서 큰아가씨께 부탁드린 일은 윤곽이 잡혔는지요?”
“후보는 정해졌고 좀 더 알아보는 중이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녀는 진지항 쪽을 떠올려 보더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섣불리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소청은 옅은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궁명헌을 나온 소청은 곧장 마차를 타고 엽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안녕당에 도착하니 묘씨와 나씨가 탑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청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마님.”
“어찌 되었느냐?”
묘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큰아씨께서 찾아보는 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청은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묘씨와 나씨가 실망한 기색을 보이는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 무성의하네요!”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손씨였다. 그녀는 알아서 의자에 앉더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간에 우리 이채는 어머님의 분부를 받자마자 신랑감을 소개해 주었는데 큰아가씨는 지금… 꿈쩍도 안 하시네요! 그리고 어머님도 말이죠, 지금 영교 아가씨의 평판이 어떤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시나 보지요? 장흥후부에서 아가씨를 신붓감으로 원하고 있으니 아가씨도 그쯤에서 만족할 줄 아셔야죠!”
그 말에 묘씨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됐다. 너희들은 영교의 혼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자 손씨는 냉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씨가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연채 아가씨를 탓할 수도 없죠. 지금 영교 아가씨 처지로는 신랑감을 구하기가 정말 어렵긴 합니다. 아니면 일이 년 지난 후에 다시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시간이 지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묘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덕이 그 빌어먹을 놈이 죽지 않고 도성에서 계속 사는 한, 그 녀석과 은정랑의 추문은 끊임없이 우리 가문의 체면을 깎을 것이다. 게다가 팔월이 되면 영교가 열여덟 살이 되지 않더냐. 일이 년을 더 끌게 되면 시집가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정혼해야지.”
나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면 저도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네가 아는 사람?”
묘씨는 그 말을 듣더니 관심을 보였다.
“부군께서 밖에서 사귄 벗인데요. 성은 여씨고 나이는 서른 가까이 됐습니다. 단정하고 품위 있게 생긴 사람이에요.
본처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도성과 본적지에 땅이 좀 있고 벽수루와 진미루를 운영하고 있고요. 상인이지만 그래도 그분의 형님이 상주廂州의 지현知縣이니 관리 집안 출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묘씨는 망설였다. 절대로 딸이 자신처럼 후처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 사람에게는 딸 하나뿐이라니 자신과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자신이 이 엽씨 가문에 시집을 올 땐 적자뿐만 아니라 서자까지 해서 의붓아들 셋과 의붓딸 둘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한번 만나 보자꾸나.”
묘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뜻을 내비쳤다.
* * *
주운환이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이미 해시亥時(밤 9시~11시)의 절반이 흘러 있었다.
엽연채는 탑상에 엎드려 화본을 보고 있었는데, 주운환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고모 일은 어떻게 됐어요? 진지항과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보여요? 안 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죠.”
“분명 될 겁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죠.”
주운환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일 소저의 할머님과 셋째 숙모님이 고모님께 신랑감을 소개해 줄 겁니다. 어떤 사람의 후처 자리로 말이지요.”
“네?”
엽연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조그만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다 별안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할머니와 셋째 숙모가 신랑감을 소개해 준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저도 모르고 있었는데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잖게 답했다.
“사람을 시켜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탑상에서 뒤척이는 그녀를 바라보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공자, 이 일에 정말 진심을 다하고 있었군요!”
“네. 전 일할 때 늘 진심을 다합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인데 엽영교와 혼인 관계를 맺게 되면 일이 아주 수월해질 터였다.
“그럼 내일 일은 어떡해요?”
“어떡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안심시켰다.
* * *
이튿날 아침, 묘씨는 엽영교, 나씨, 엽승강을 데리고 함께 벽수루로 향했다. 원래는 식사할 시간인 오시로 약속을 정하고 싶었는데, 이날 벽수루에 예약이 꽉 차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미시未時(오후 1시~3시)로 약속 시간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묘씨 일행이 벽수루에 도착하기 전, 1층 대당. 병풍으로 격리되고 입구에는 주렴이 걸려 있는 칸막이 공간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주운환과 진지항이었다.
“하하하, 왜 갑자기 여기 와서 술 마실 생각을 한 건가?”
진지항이 웃으며 물었다.
두 사람은 퇴청한 후 평복으로 갈아입고 외출한 참이었다.
“술 마시러 온 게 아닙니다.”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후에 고모님이 이곳에 신랑감을 보러 올 겁니다. 제 내자가 걱정은 되는데 할머님 일행과 함께 오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요. 그랬다가는 여인 쪽에서 너무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일 텐데, 혼인이 성사되지 않으면 보기에 안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보고 몰래 이곳에 와서 봐 달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저 혼자 와서 술을 마시면 좀 그러니 오는 김에 형님도 데려온 거죠.”
진지항은 오는 김에 데려왔다는 말에 입꼬리를 실쭉거렸다.
그런 한편, 엽영교의 혼담이 오가고 지금 신랑감을 보러 왔다는 말에 마음이 대단히 편치 않기도 했다. 지난번 함께 교자를 빚을 때 보았던 그녀의 아리땁고 뚝심 있어 보이는 얼굴과 밀반죽 덩어리를 치댈 때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하던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다.
주운환은 여유롭게 술 한 잔을 따랐고 탁자 위에는 몇 가지 간단한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마시죠!”
주운환이 권했다.
두 사람이 술을 두어 잔 마시고 있는데 주운환이 갑자기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왔군요.”
진지항이 밖을 쳐다보니 묘씨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영교는 보병寶甁 문양이 들어간 담홍색 배자와 흰 실에 은실을 섞어 짠 마면군을 입었고 손에는 반투명한 경라도화선輕羅桃花扇을 쥐고 있었다. 백합계百合髻 머리에는 유리 주화珠花(여성의 머리 장식품의 일종)를 꽂았고 주옥珠玉 술을 늘어뜨렸다. 그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에 꽂힌 유리 주화에서 맑고 아름다운 빛이 번쩍거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들었다.
묘씨 일행은 창가의 팔선상 앞에 자리했다.
“승강아.”
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른 살 가까이 되었을까. 잘생긴 축에 속한 한 사내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둥근 옷깃이 달린 푸르스름한 잿빛 금포를 입은 차림이었다.
“형님.”
엽승강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 사내를 향해 공수했다.
“오늘 가족들을 데리고 형님을 보러 왔어요. 그러니 특별히 신경 좀 써 줘야 돼요.”
“하하, 물론이지. 내가 오늘 대접할 테니 주문하고 싶은 요리가 있으면 마음껏 주문하게.”
여빈은 쾌활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곁눈질로 엽영교를 힐끗 쳐다봤다. 그는 소녀의 빼어난 미모와 날렵한 몸매, 우아한 기품을 보더니 마음이 설레고 흥분되었다. 다들 엽씨 가문 여인들은 하나같이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고 했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여빈은 미소를 지으며 묘씨에게 공수했다. 묘씨는 그의 훤칠한 외모와 쾌활하고 대범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참으로 친절하시구려.”
“어르신, 위층에 계신 귀빈께서 부르십니다.”
대화가 이어지려는 참에 점원이 여빈에게 걸어와 고했다.
“그래.”
여빈은 대답을 하고선 묘씨 등에게 공수하고 말했다.
“바빠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말을 마친 여빈은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씨는 시선을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지 않습니까?”
묘씨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구나.”
그녀는 그리 말하며 엽영교를 쳐다봤다.
“어떻느냐?”
엽영교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좋을 대로 하세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근처에서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걸어왔다. 수초 문양이 들어간 푸른색 유군을 입은 이 소녀는 여종 둘을 데리고 걸어오더니 냉랭한 눈빛으로 엽영교를 쓱 쳐다보고는 이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녀는 걸어가며 자신의 여종에게 이렇게 속닥거렸다.
“저 여인이 새어머니가 될 사람이란 거지? 마음에 안 들어. 저 사람이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남동생을 낳아 줄 바에야 차라리 이낭들이 낳는 게 나아! 돌아가서 이낭 둘에게…….”
고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묘씨 일행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묘씨와 나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엽승강을 쳐다봤다. 그러자 엽승강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저 아이는 형님의 여식이에요. 응석받이로 커서 그렇지,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묘씨는 안절부절못했다. 그 소녀의 태도를 보니 그녀는 마음이 답답해졌고 여빈의 이낭들에게 남동생을 낳게 만들겠다는 말에 더욱 불안해졌다.
“그 나이 때 여자아이들은 다 그렇잖아요.”
나씨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이제 아홉 살이니 오륙 년만 지나면 출가할 겁니다. 시집가기 전까지만 정성을 다해 대해 주면 될 거예요. 어떤 일이든 간에 흠 하나 없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영교 아가씨가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으면 되고, 저 아이도 출가하게 되면 자연히 남동생의 중요성을 알게 될 테니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묘씨는 여전히 꺼림칙했다.
“그러려면 영교가 이낭들보다 먼저 아들을 낳아야 하지 않느냐! 두 이낭이 먼저 낳는다면… 그럼 어찌한단 말이냐?”
“어머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아들이 있었을 것 같았으면 벌써 있었겠죠.”
나씨가 묘씨를 달랬다.
“저쪽에서도 진심으로 후처를 맞으려 하니 그런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영교야…….”
묘씨는 또 엽영교를 쳐다봤고 엽영교는 ‘아’ 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결정하세요.”
그녀는 자신의 혼사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골치를 썩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시집을 가지 않으면 집안은 또 웃음거리가 될 테니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일단 시집을 가고, 갔는데 정말 아니다 싶으면 큰새언니처럼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큰새언니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