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사월은 봄빛이 좋지만 예불禮佛 성수기가 아니라 사찰에 오는 참배객들이 많지 않았다. 법화사까지는 마차로 대략 반 시진 정도의 거리이니,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저녁 무렵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시의 절반이 지났을 때쯤 마차와 공물 등이 준비되었다.
진씨는 주묘서 자매와 두 명의 여종을 데리고 화려하고 큰 마차에 올랐고 엽연채는 혜연을 데리고 작은 마차에 탔으며 비 이낭과 백 이낭은 또 다른 작은 마차에 올랐다. 주비양과 주종과는 말을 탔고 그렇게 주씨 가문 사람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반 시진쯤 지나 엽연채 등은 마침내 법화사에 도착했다.
그들은 본당에서 선향線香을 꽂고 등불 기름을 채웠고 엽연채는 부들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향불을 피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앞쪽으로 불상이 세워져 있는데 자애로운 모습 사이로 장엄한 분위기가 느껴져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본당 안의 불상에 절을 올린 후 그들은 옆에 위치한 관음전觀音殿에 가서 또 보살에 절을 올렸다.
추길은 진씨 등이 꾸물거리며 명리를 따져 보러 가지 않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님, 어떤 분이 마님을 대신해 경문을 필사하는 데 적합한 명리를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본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하인에게 사주팔자를 들려 보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모두 대사가 계신 선방禪房으로 몰려가면 대사께 폐를 끼칠 수도 있으니, 가서 십팔나한十八羅漢께 절이나 올리거라.”
말을 마친 진씨는 주묘서를 데리고 돌아서서 오른쪽에 위치한 전당殿堂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모든 전당에 들어가 절을 올린 후 선향을 꽂고 등불 기름을 채운 다음 문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녹지가 걸어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마님, 대사께서 모두의 명리를 따져 보셨습니다.”
“어찌 되었니?”
백 이낭이 묻자 녹지는 마뜩잖은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이제 12년이 지나 한 바퀴를 돌았으니 앞으론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경문을 필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마님께서는 매일 일찍 일어나시고 주무시기 전에 여종에게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좋은 일이네요. 그 말은 부인의 건강이 호전되셨다는 의미잖아요.”
그러고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이리 말했다.
“집에 돌아가시면 셋째 도련님께 걱정 마시고 맘 편히 관아에 가시라고 전하셔요. 집안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이죠.”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으나 저들이 이런 변명을 할 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하죠.”
진씨는 엽연채가 냉담한 어조로 말하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화제를 바꾸었다.
“가서 공양밥을 먹자꾸나. 식사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 함께 식당으로 향했고 공양밥을 먹은 후 그들은 바로 사찰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하산하려는 찰나, 근처 대나무 숲에서 낡고 허름한 긴 탁자를 발견했다. 그 탁자 앞에는 회색 승복을 입은, 수염과 눈썹이 희끗희끗한 노승이 앉아 있었고 뒤쪽으론 ‘차분히 기다리면 인연이 온다.’라고 적힌 깃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 가서 저 대사께 운명을 점쳐 달라고 부탁해 볼까요?”
주묘서가 진씨를 잡아끌며 관심을 보였으나 진씨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로 운명을 점쳐 보고 싶으면 나중에 고승을 찾아가 해 보자꾸나.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승려는 수련이 부족하니 허튼소리를 지껄이게 되면 되레 네게 악영향만 줄 것이다.”
그런데 백 이낭이 진씨를 잡아당기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저분은… 법화사의 전 주지 스님이신 요공대사이십니다.”
“뭐라?”
진씨는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정말입니다.”
백 이낭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요공대사께서는 행각行脚을 좋아하셔서 주지 스님을 맡고 계시지는 않지만 깊은 경지에 도달하신 분입니다. 십 년 전에 자리에서 물러나신 후로는 법화사의 법회에 참가하지도 얼굴을 내밀지도 않으셨죠. 그런데 3년 전 제가 예불하러 왔을 때, 멀리서 법화사의 주지 스님이 요공대사를 사형師兄이라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알아보니 요공대사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 곳곳에 다니며 ‘차분히 기다리면 인연이 온다.’라는 깃발을 꽂아 놓고 사람들의 운명을 점쳐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을 뵙는 게 법화사 주지 스님을 뵙기보다 더 어렵다고 해요.”
“그럼 가서 운명을 점쳐 달라고 해 보자꾸나.”
진씨는 기쁜 기색으로 주묘서를 데리고 걸어갔고, 비 이낭도 두 눈을 반짝이더니 주종과를 끌고 앞다투어 걸어갔다.
“우리 둘째 도련님도 과거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운명을 점쳐 봐야겠네.”
“아가씨, 저희도 어서 가요.”
추길도 흥분하여 엽연채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엽연채는 표정을 굳힌 채 떨떠름해했다. 자신은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이니, 아무래도 승려가 좀 무서웠다. 하지만 방금 전에 불상과 보살, 십팔나한 앞을 돌아다녔는데도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한적한 본당 밖 산자락에 위치한 공터에는 푸른 대나무가 일렬로 심겨 청명한 녹음이 드리워져 있었고, 노승은 그곳에 좌판을 깔고 앉아 있었다. 관심을 갖는 이가 아무도 없어 그는 그곳에서 졸고 있었다.
“대사.”
이때, 귀부인들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귀부인과 열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여쁜 소녀였다. 바로 진씨와 주묘서였다.
노승은 기척이 들리자 두 눈을 떴다.
“아미타불. 시주들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그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선향과 등불 기름이 담긴 조그만 상자를 진씨 앞으로 내밀었다.
이 모습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아직 운명을 점쳐 준 것도 아니면서 돈을 바라다니!’
진씨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녹지를 쳐다봤다. 녹지는 얼른 작은 은화 두 개를 꺼냈고 은화는 ‘짤랑’ 소리를 내며 조그만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시주분들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노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대사, 이 아이의 부부 인연을 한번 봐 주십시오.”
진씨는 긴 탁자 앞에 놓인 걸상에 주묘서를 앉힌 후, 탁자 위에 놓인 붉은 종이에 주묘서의 사주팔자를 적어 노승에게 건넸다.
노승은 종이를 건네받아 살펴보고 또 주묘서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부의 인연은 당연히 있습니다. 구혼을 하는 자가 도처에 깔렸고 그중 몇몇은 분명 좋은 인연이 될 겁니다. 부인 쪽에서 원하지 않는 것뿐이죠.”
그 말에 진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 구혼을 해 오는 자는 많았지만 그들은 가세가 너무 평범했다. 그게 무슨 좋은 인연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 승려가 전혀 득도한 고승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 괘씸한 늙은 매파들처럼 느껴졌다.
사기꾼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진씨는 백 이낭을 쳐다봤다. 백 이낭은 표정을 굳히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사께서 선택지가 많다고 하시니 좋은 일이네요.”
“내가 묻고 싶은 건 귀한 사위를 얻을 수 있느냐는 거다.”
진씨의 말에 노승이 툭 내뱉듯 말했다.
“좋은 사위이면 됐지, 굳이 귀한 사위일 필요가 있습니까? 적당히 하시죠.”
진씨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엽연채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고, 비 이낭은 한술 더 떠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부인, 이 말은 큰아가씨께서 귀한 가문에 시집갈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자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노승은 말만 많을 뿐, 중요한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하네요. 대사는 무슨. 순 사기꾼이에요.”
말을 마친 그녀는 콧방귀를 뀌고는 계단을 따라 걸어갔고, 마음이 무거워진 진씨도 녹지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비 이낭은 흥분하여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대사, 정말 정확하시네요. 저희 종과 도련님의 미래와 부부의 인연도 점쳐 주세요.”
그러고는 작은 은화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전은 낭랑한 소리를 내며 조그만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비 이낭은 탁자 앞에 몸을 숙이고는 주종과의 사주팔자를 적었다. 노승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종과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열심히 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비 이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노승이 말했다.
“더 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이 늙은이가!”
비 이낭은 ‘흥’ 하고는 그 조그만 상자를 안아 들더니 상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안을 헤집었다.
“이! 이! 이런!”
격노한 노승은 손을 뻗어 상자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비 이낭은 자신이 던져 넣었던 은화를 꺼낸 후 진씨의 뒤를 따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대사, 정말 정확하시네요!”
흥분한 추길이 앞으로 다가가 작은 은화가 꿰어진 동전 꾸러미를 꺼냈고, 이내 돈은 금속음을 내며 조그만 상자 안으로 던져졌다. 추길은 엽연채를 끌고 다가서며 노승에게 부탁했다.
“저희 아가씨도 봐 주세요.”
그 노승은 엽연채를 한 번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더니 조그만 상자를 품에 안고 이 말만 내뱉었다.
“이 노승은 감히 점을 칠 수가 없습니다. 점을 쳤다가는 소승뿐만 아니라 이 소저에게도 해가 갈 겁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도망쳤다. 엽연채는 돈을 품에 안고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런……! 분명 사기꾼이에요.”
화가 난 추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려 은화 한 냥이나 넣었는데.”
“네 한 달 급료에서 삭감할 거야.”
엽연채는 그녀를 흘겨보았고, 추길은 무너질 듯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가씨…….”
추길의 애원에도 엽연채는 일언반구 없이 반투명한 둥근 부채를 흔들며 산을 내려갔다.
하산하니 진씨와 두 이낭이 탄 마차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엽연채는 푸른 덮개가 달린 그녀의 조그만 마차를 타고 대략 반 시진 걸려 집에 도착했다.
궁명헌으로 들어서니 혜연이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
“아가씨, 주인마님의 몸종인 소청이 와 있습니다.”
“어? 그래?”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쌍환계 머리를 한 여종 하나가 소청小廳의 원탁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