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27화 (327/858)

제327화

그 시각 일상원.

서차간에 앉아 있는 진씨는 경문을 필사하는 일로 화가 나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주묘서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상태였고, 강심설도 괜히 이런 때에 찾아와 재수 없는 꼴을 당할까 봐 감히 이곳에 오지 못했다.

이때 밖에 있던 여종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셋째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 말에 진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침 잘 왔구나!’

그러잖아도 아내 단속을 어찌하는 것이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그녀는 찻잔을 집어 든 채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올 때 그에게 찻잔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고개를 들어 그의 얼음장 같은 두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자 진씨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겁내면 안 된다며 자신을 타일렀다.

그녀가 입을 막 열려고 했으나, 주운환이 한발 빨랐다.

“어머니, 오늘 또 어머니의 두통이 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이젠 예전 같지 않아 매일 궁과 관아에 가야 하니 어머니를 위해 경문을 제대로 필사할 수가 없습니다.”

진씨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방금 전까지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매일 궁과 관아에 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이제 그는 장원 급제자이고 관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재차 상기하게 됐고, 저도 모르게 또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 자랑하는 거야? 기녀가 낳은 천한 놈 주제에!’

그녀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꾸하려 하는데 주운환이 또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두통이 여전한데 저 때문에 병세가 지속되도록 할 수는 없지요. 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한 대사가 제 명리가 어머니를 대신해 경문을 필사하는 데 적합하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젠 제가 시간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저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역술易術에 통달한 청허한 진인眞人(도가道家에서 참된 도를 체득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집으로 모신 다음 집안사람들의 명리를 따져 보시지요. 누구의 명리가 어머니와 잘 맞는지 확인한 뒤 앞으로 그 사람이 자주 어머니께 경문을 필사해 드리면 될 겁니다.”

말을 마친 주운환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역술에 통달한 진인?’

진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손가락으로 그가 떠난 방향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놈! 네가 감히!”

“마님…….”

녹지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경문을 필사하는 데 적합한 명리라니.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그저 진씨가 주운환을 괴롭히기 위해 지어낸 핑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청허한 진인은 아주 뛰어난 능력자였고 성격 또한 강직했다. 만약 그를 집으로 모셔와 운명을 점치거나 법사法事를 행했는데 주운환과 엽연채 모두 경문을 필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진씨가 그 오랜 세월 주운환에게 필사를 하라고 했으니 그녀가 서자를 이유 없이 괴롭힌 일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 아닌가!

* * *

주운환이 떠난 후,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가 눈물 흘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가씨.”

혜연이 황급히 앞으로 다가섰다.

“괜찮아.”

엽연채는 이내 얼굴을 쓱 문지르고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밖에 나가 좀 걸어야겠구나.”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걸어나갔다. 놀란 추길이 엽연채의 뒤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혜연이 그녀를 붙잡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명헌을 나온 엽연채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저 서과원을 어슬렁거렸다. 서과원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했고, 남북 방향으로 들쑥날쑥 서 있는 낡은 정자들도 보수가 되지 않아 황폐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엽연채가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주운환이 가까운 월동문月洞門(담에 뚫은 아치형 문)을 넘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놀란 마음에 다급히 석가산 쪽을 향해 걸어갔다.

주운환은 담홍색 옷을 입은 아리따운 뒷모습이 보이자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갔고, 엽연채는 두세 걸음 만에 그에게 따라잡혔다.

“어딜 갑니까?”

주운환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가긴 어딜 가요. 그냥 좀 거닐고 있었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돌리더니 검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다리를 다쳤는데 방 안에 있어야지요.”

화가 난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다쳤다니요? 그저 살갗 좀 벗겨진 것뿐이에요.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엄살 부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엽연채가 손을 뿌리치고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주운환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엽연채의 작은 몸이 그의 품 안에 쏙 안기게 되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란 엽연채에게 주운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렇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다만 소저가 엄살을 부리지 않으니 제가 좀 부리려 합니다. 괜찮지요?”

“아니요.”

“‘아니요’는 안 됩니다. 이리 오십시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고, 엽연채는 손으로 가볍게 그를 밀어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날 안는 걸 아주 좋아하나 봐요?”

“네. 소저는 아주 가벼우니까요.”

주운환이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괜히 심술이 나서 그를 다시 밀쳐 냈지만,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엽연채는 주운환의 품에 안긴 채 처마가 위로 솟은 초라한 팔각정자에 도착했다.

주운환은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후 품 안에서 연고가 담긴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엽연채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보니 본래 희디흰 양 무릎은 벌게져 있고 한쪽은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주운환이 연고를 조금 떠서 무릎에 발라 주자 엽연채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그녀는 그 연고가 눈에 익어 물었다.

“이 연고는 어디서 난 거예요?”

“지난번에 소저가 저에게 준 겁니다. 작년에 태자부에서 초대장을 보낸 일로 어머니가 저한테 차를 뿌렸지 않습니까.”

엽연채는 그 일이 생각났다. 그때 진씨는 자신에게 차를 뿌린 건데 그가 앞을 막아서서 대신 맞아 주었다. 차가 너무 뜨거운 탓에 그의 목 부위에 물집이 생겼고, 이에 혜연을 시켜 이 연고를 보냈었다.

“우선 이걸 쓰십시오. 내일 제가 태의원에 가서 의정醫正에게 하나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주운환의 목소리가 엽연채의 정수리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그저 작은 상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가 자신을 위해 더 좋은 약을 구해 주겠다고 하자 달달한 기분이 들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궁명헌 쪽은 이미 밥상을 차리고 있었는데 엽연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혜연은 밖으로 나가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저 멀리 처마가 위로 솟은 물가 정자에서 주운환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란 혜연은 그들을 못 본 척하고는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정원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추길은 혼자 돌아오는 혜연을 보더니 의아해했다.

“아가씨는?”

“밖에서 거닐고 계셔. 좀 더 기다리자.”

“공자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신 거야?”

추길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고 가 버리셨잖아. 대체 왜 그런 거야?”

“진짜로 그런 게 아니었어.”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추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혜연은 조용히 정원을 지나 방 안으로 돌아갔다.

* * *

이튿날 아침 진시辰時(오전 7시~9시)쯤, 주운환은 궁에서 사람을 시켜 약상자 하나를 보냈다. 엽연채가 보니 조그만 벽옥 상자였는데, 옥의 순도가 아주 높고 윗면에는 꽃문양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상자만으로도 값어치가 꽤 나갈 성싶었다.

엽연채가 상자를 열자 안에선 약 냄새가 폴폴 올라왔다. 이때, 녹엽이 초췌한 모습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

“녹엽이구나.”

엽연채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 일을 떠올려 보니 진씨와 주묘서 등은 억울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셋째 마님, 마님께서 잠시 후에 법화사에 가서 향불을 피우자고 하십니다.”

녹엽은 그리 전하고는 이내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혜연에게 물었다.

“또 뭘 하려는 거지?”

추길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웃으며 전날 소식을 알려 왔다.

“어제 공자께서 이곳에 오셨다가 바로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알고 보니 일상원으로 가신 거였어요. 가서 마님께 두통이 자주 생기니 늘 이러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하셨대요. 이제 공자께서는 매일 등청해야 하니 더 이상 마님을 대신해 경문을 필사할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 진인을 모셔와 집안사람들 중 누가 경문을 필사하는 데 적합한 명리를 가지고 있는지 따져 보자고 하셨대요.”

엽연채는 ‘픽’ 웃어 버렸다.

“그쪽도 참 영리하구나. 먼저 선수를 치려는 거네. 불상 앞에서 절을 올리려는 게지.”

한편, 궁명헌을 나선 녹엽은 일상원으로 돌아가 진씨에게 고했다.

“마님, 셋째 마님께 전달했습니다.”

“그래.”

진씨가 손을 흔들자 녹엽은 한쪽으로 물러났다.

진씨는 차갑고 어두운 표정으로 탑상에 앉아 있었고 한쪽에 있는 강심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좌에 앉아 있던 백 이낭이 말했다.

“함께 사찰에 가서 이미 명리를 따져 보았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진인을 집으로 모셔올 필요가 없고, 괜히 망신을 당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진인을 집으로 모셔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보살을 모셔왔다 해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운환이 장원 급제자가 되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운환이 평범한 백성이라면 다들 개의치 않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자제가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하여 장원이 되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또 자신의 힘으로 성공해서 황제가 그의 가문을 기억하게 되었으니 의미가 엄연히 달랐다. 그러니 그냥 넘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갑자기 진인을 모셔오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그 이유를 물어볼 것이고, 행여 서자의 명리가 경문을 필사하는 데 적합하다는 등의 핑곗거리를 알아내게 되면 전부 들통날 터였다. 대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모를 이가 어디 있겠는가? 모두 진씨가 서자를 괴롭혀 왔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백 이낭이 말을 이어 갔다.

“적모가 서자를 좀 홀대하는 건…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젠… 큰아가씨도 혼담을 꺼낼 때 셋째 도련님에게 기대야 하니 두 분 사이의 불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진씨는 낯빛이 더욱 싸늘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됐다. 어서 출타할 준비를 하거라! 녹엽이 너는 집에 남아 있다가 오시에 셋째가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오면 청허한 진인은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거라. 집안사람들이 법화사에 가서 대사께 부탁해 한 명씩 명리를 따져 볼 것이니 말이다. 외출한 지도 오래되었으니 이 기회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구나.”

녹엽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고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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