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어머님,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진씨에게 예를 올린 후 떠나기 전에 녹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녹지야, 어서 가서 큰아주버님 등을 모셔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어머님의 병세가 지속될 텐데 그러면 안 되지.”
녹지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엽연채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싸늘한 눈빛을 보니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씨는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이미 말을 꺼냈는데 이제 와서 병이 나지 않았다, 아프지 않다고 말을 바꾸게 되면 자신의 체면을 스스로 깎는 게 아니겠는가?
진씨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탑상에 몸을 기댔다. 이번에는 정말로 머리가 아팠다.
일상원을 나온 엽연채는 바로 사당으로 향했다. 그녀는 걸어가며 뒤에서 따라오는 혜연에게 일렀다.
“가서 사람을 시켜 큰 탁자와 문방사우를 준비하게 하거라.”
“예.”
혜연은 대답하고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내의문內儀門(의문은 옛날 관아나 저택의 대문 안쪽에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의례적으로 만들어 놓은 문임)을 나온 주묘서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엽연채를 보더니 어여쁜 얼굴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남대청南大廳을 지나고 대여섯 개의 뜰을 더 지나서 주씨 가문 사당에 도착했다.
주묘서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선조들의 위패가 보였고 음산한 바람이 간간이 느껴지자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안으로 들어온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좀 기다리죠. 잠시 후에 하인들이 물건들을 가지고 올 겁니다.”
잠시 후, 혜연이 여종을 데리고 큰 탁자 여섯 개와 문방사우를 들고 왔다.
주비양, 강심설, 주종과, 주묘화도 사당에 도착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녹지는 정말이지 엽연채가 너무도 얄미워서 이들에게 말을 전할 때 다들 사당에 가야 한다고만 말했을 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어찌 된 건가?”
강심설은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엽연채와 주묘서만 이곳에 있었다.
“어머님께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셔요. 저희가 효를 다하려면 함께 어머님을 위해 경문을 필사하고 복을 기원해야죠.”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그 말에 강심설은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경문을 필사하는 등의 일은 진씨가 늘 주운환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묘서의 침울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주묘서와 진씨가 엽연채의 계략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하기는, 그러지 않고서야 주묘서가 이곳에 올 리가 있겠는가.
“제수씨. 대체 어찌 된 거예요?”
주종과는 앞으로 나와 엽연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전에는 셋째가 필사를 하지 않았나요?”
이 말에 엽연채의 요염한 눈동자가 살짝 위로 향하더니 냉랭한 빛을 띠었다.
“이 가문에선 제 부군만 효도를 하나 봅니다. 둘째 아주버님께서는 효심이 없으신가 보죠?”
주종과는 엽연채가 물기를 머금은 듯한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가슴이 두근거렸고, 이에 경문을 필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절세미녀가 셋째 그 빌어먹을 놈의 아내라는 생각에 또 속이 쓰려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엽연채는 긴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붓을 집어 들었다.
강심설은 무릎을 꿇고 경문을 필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낯빛이 확 변했다.
주묘서는 콧방귀를 뀌며 걸어가더니 엽연채 맞은편에 놓인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꿇으면 꿇는 거지, 저라고 못 꿇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주묘서는 어릴 때부터 진씨가 오냐오냐 키운 딸인데 어디 무릎을 꿇어 봤겠는가? 바닥에 무릎을 꿇자마자 그녀의 두 무릎에선 ‘뚝’ 소리가 나며 통증이 느껴졌고 시린 느낌이 들었다. 하나 그게 전부였다.
주묘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이게 다였네! 겁날 게 뭐가 있어!’
그러나 강심설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걸상은 없는가? 부들방석도 없고?”
“제 부군은 늘 무릎을 꿇고 경문을 필사하셨어요. 어머님도 무릎을 꿇고 경문을 필사해야 비로소 정성이 담긴다고 하셨어요. 그래야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셨죠!”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강심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반박하려는 찰나, 주묘서가 냉랭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꿇으면 꿇는 거지, 뭐 대단한 일 하는 것처럼 그러지 마요.”
강심설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속으로는 이미 셀 수 없이 주묘서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주묘서도 이리 말하니 그녀는 그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붓을 집어 들고 『지장경』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주묘서는 처음 무릎을 꿇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양쪽 무릎에서 뚝뚝 소리가 나며 고통이 느껴져 제대로 자세를 유지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강심설도 견딜 수가 없었다.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주종과도 고통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고 오직 주비양만이 반듯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경문을 필사하고 있었다.
일각쯤 버티고 나니 주묘서는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쩜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단 말인가? 다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아이고’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밖에 있던 춘산은 낯빛이 확 변했다.
주묘서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더니 화가 치밀어 올라 손에 들고 있던 붓을 탁자 위로 집어 던졌다.
“난 그만할래요!”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춘산은 또다시 안색이 확 변하더니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엽연채의 눈빛에는 조롱기가 스쳤다. 강심설과 주종과도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지만 그들은 주묘서처럼 뛰쳐나갈 용기는 없었다.
잠시 후, 녹지가 어두운 표정으로 뛰어왔다.
“큰도련님, 큰마님, 둘째 도련님, 셋째 마님……. 주인마님께서 모두가 마님을 위해 복을 기원해 준 덕분에 병이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강심설은 주묘서가 뛰어나가자마자 자신도 곧 필사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붓을 집어 던지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서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쏘아본 뒤 자신의 여종 만월의 부축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아가씨.”
혜연과 추길이 얼른 안으로 걸어 들어와 엽연채를 부축해 일으켰다. 엽연채는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당 문턱을 넘어섰다.
엽연채는 궁명헌으로 돌아와 나한상에 앉았다. 혜연이 그녀의 치마와 바지를 걷어 올려 보니 다리가 온통 벌게져 있었다.
추길이 곧장 상처에 바르는 약을 가져와 엽연채에게 발라 주며 불만을 터뜨렸다.
“봐봐. 살갗이 다 까졌어.”
“그러게 말이야.”
“이게 뭐 별거라고. 난 기쁘기만 한걸! 내가 무릎을 꿇으면서 그 사람들도 전부 무릎을 꿇리지 않았느냐! 무릎을 꿇고 경문을 필사하는 게 어떤 느낌이고 어떤 기분인지 그들에게 느끼게 해 줬단 말이지.”
혜연도 곁에서 탄식했으나 엽연채는 조소를 날릴 따름이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우쭐함도 담겨 있었다.
“도련님!”
이때, 추길이 소리쳤다.
엽연채의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주운환이 걷어 올려진 주렴 밑에 서 있었다. 백로 문양이 새겨진 진녹색 관복을 입고 있는 그의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고 아름다운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엽연채는 그를 보더니 왠지 모르게 좀 켕기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무릎 위로 걷힌 치맛자락을 손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하얗고 길쭉한 두 종아리를 가리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주운환이 그녀의 조그만 손을 꽉 움켜잡아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왜 이런 겁니까?”
주운환의 얼음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엽연채는 그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엽연채의 앞에 서서 그녀의 두 무릎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양 무릎이 벌겋고 오른쪽 무릎은 살갗이 벗겨지기까지 했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찡그렸고 그림에 담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빛이 어리었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의 체면을 봐주며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사당에 가서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을 마친 주운환은 소매를 뿌리치고는 그곳을 떠났다.
혜연은 빠른 걸음으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엽연채를 쳐다봤다.
“아가씨…….”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 이미 그분들 체면은 깎은 상태였는데 굳이 사당에 가서 무릎까지 꿇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추길이 옅은 한숨을 쉬며 주운환의 말에 동조했다.
엽연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은 그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다.
오늘 자신은 완벽하게 반격했고 그들을 쏘아붙여 말문이 막히게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진씨 입에서 나온 ‘불효’라는 두 글자가 자신을 사당으로 보내 무릎 꿇게 할 수 있었다.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두 다리에서 뚝뚝 소리가 나며 고통이 느껴졌다.
‘잠시 무릎을 꿇었을 때도 그리 고통스러웠는데, 공자는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이런 고통을 겪었던 걸까?’
반항할 수도, 반항해서도 안 되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렇다 치지만 분명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매번 벌을 받았으니 속으로 얼마나 억울하고 무력했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밤마다 울어 봐도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자신이 그들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직접 겪어 보게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주운환이 돌아와 이쪽에 큰 소리로 호통을 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엽연채는 더없이 억울할 뿐이었고 마음이 너무 아파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편, 주운환은 차갑고 어두운 얼굴로 궁명헌을 나와 곧장 일상원으로 향했다.
그에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겪었던 일이라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은 서자이고 적모가 그렇게 효도를 하라 하니 그리 효를 다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엽연채에게 벌어지자 주운환은 도저히 평정심을 되찾을 수도, 진씨를 용서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