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대로한 진씨는 그대로 넘어갈 뻔했고 백 이낭도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백 이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 부인께서는 참 솔직한 분이네요. 그래도 저희 셋째 도련님은 진 공자와 동료이며, 정6품 수찬이고, 상서방에도 출입합니다. 그리고 저희 부인은 셋째 도련님의 적모시죠. 진 부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동료 간의 우정을 깨뜨릴 수도 있을 텐데, 그건 염려되지 않으시나 보죠?”
“동료 간의 우정을 깨기는 무슨. 흥!”
진 부인은 기가 차서 비웃음을 짓더니 조롱기 가득한 얼굴로 진씨를 쳐다보며 반박했다.
“부인은 정말로 본인이 주 공자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세요? 어머니는 무슨. 우린 집안의 안주인입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죠! 그런데도 부인은 주 공자의 세를 이용해 저를 압박하려는 겁니까?
돼먹지 못한 그 댁 따님을 우리 아들에게 밀어붙이려는 모양인데, 전 싫습니다. 그리고 주 공자가 정말로 부인과 따님을 위해 나서겠습니까? 정말 우스워 죽겠네요! 공자는 부인의 친아들도, 따님의 친오라버니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부인께선 친아들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셨군요.”
진씨는 정말이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내 아들은!”
“부인 아들은 아무 능력도 없죠! 그래서 서자의 세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본인만 똑똑하고 다른 사람은 다 멍청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죠.”
진 부인은 속이 시원한 나머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진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진 부인이 한 말은 전부 사실이라 받아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죠. 주 부인께서는 좀 자중하시라는 겁니다.”
진 부인은 허허 웃으며 덧붙였다.
“주 부인이 기분이 언짢고 속이 편치 않을 거라는 거 압니다. 우리 모두 정실부인이고 집안의 안주인이니 제가 좋은 마음으로 충고 하나 하죠. 적당히 좀 하세요!
지금 부인의 아들이 싹수가 누러니 서자의 세를 빌려 가문의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고 서자의 힘을 빌려 여식을 좋은 곳에 시집보내고 싶은 거겠죠. 그러면 서자에게 잘 대해 줘야죠! 부인은 서자의 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고 하면서도 서자를 짓밟으려고 하시죠.”
“부인, 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겁니까!”
진씨는 정말이지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부인께서 허튼소리라고 하시니 그럼 허튼소리를 좀 더 해 보죠!”
진 부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주씨 가문이 대체 뭐기에 우리 진씨 가문이 그 댁 눈치를 봐야 합니까? 전에는 거절을 했는데 이젠 시집을 못 가고 있으니 지금에서야 우리 가문에 들어오고 싶어진 것 아닙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됐어요. 여기까지 하죠!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 저런……!”
진씨는 자신의 체면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마구 짓밟혀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시어머니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네요. 우리 딸이야말로 당신 같은 사람들은 원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빌어도 시집오지 않을 겁니다! 가자!”
진씨는 콧방귀를 뀌고는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흥. 제 뜻대로 안 되니 괜히 남의 악담이나 하고 있네!”
진 부인 역시 콧방귀를 뀌었다.
진씨와 백 이낭은 꼴사나운 모습으로 다급히 그곳을 떠났다. 한쪽에 서 있던 진 부인의 여종은 진씨와 백 이낭의 볼썽사나운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마님, 이렇게 해도… 정말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느냐?”
화가 난 진 부인은 콧바람을 불며 대꾸했다.
“내 지금껏 살면서 저렇게 후안무치한 사람은 처음 본다.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았다면 내 마음속 원한을 풀지 못했을 게다.”
그러나 여종은 여전히 좀 걱정스러워 입술을 삐죽거렸다.
“주 공자가 언짢아하면 어쩌시려고요?”
“뭘 어쩐단 말이냐? 방금 전에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더냐? 적자와 서자는 서로 다투는 사이다. 주 공자가 정말로 그 돼먹지 못한 것을 우리 가문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면 오늘 이곳에 서 있었을 게다. 그런데 주 공자는 고사하고 그 내자조차도 오지 않았다.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느냐?”
진 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정말로 사람을 멍청이로 봤나 보지?”
“그럼 온 부인은… 방금 전에 마님께서는 왜 그분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하신 겁니까?”
“온 부인은 당연히 자리를 피해야지. 온 부인은 주 공자 내자의 어머니 아니더냐. 부인의 여식은 지금 주 부인이 손에 쥐고 주무르고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당연히 서로의 앞에서 체면을 구겨서는 안 되지. 온 부인이 동석한 상황에서 내가 주 부인에게 면박을 줬다면 어땠겠느냐. 온 부인이 사돈을 도와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지 않았겠느냐?
그리고 온 부인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깎는 말을 하지 않은 건 주 부인의 마지막 체면을 세워 준 것이다. 앞으로 주 부인이 온 부인과 만나게 돼도 체면이 서지 않아 얼굴을 들지 못하는 상황은 없을 게다.”
“이번 일을 겪었으니 주 부인도 자중하겠죠?”
그렇게 주종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 우 마마가 온씨를 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온씨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씨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진 부인, 제 사돈과 이야기는 잘 나누셨어요?”
“네. 이미 거절까지 마쳤습니다.”
진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부인께 폐를 끼쳤네요. 부인께서 제게 답변을 전해 주셨을 때 제가 바로 부인께 그쪽에 정확히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닙니다.”
온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양했다.
“그게… 참.”
그녀는 입을 함부로 놀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 부인 앞에서 진씨의 험담을 하기 곤란했다. 진씨의 행실이 어떠한지는 다들 잘 알고 있으니 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눈 후 온씨도 그곳을 떠났다.
* * *
진씨와 백 이낭은 마차에 오른 후 곧장 도성 북쪽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 앉은 진씨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진 부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40년 가까이 사는 동안 이런 쓴소리를 면전에서 대놓고 들어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씨 가문이 몰락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기는 했으나 다들 빙빙 돌려 말했었다.
백 이낭은 화가 나 미쳐 버릴 것 같은 진씨의 모습을 보며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좀 통쾌해하며 속으로 비웃었다.
‘당신에게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군.’
게다가 오늘 진 부인이 했던 말은 자신이 진작부터 하고 싶던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진씨 손아귀에 있는 일개 이낭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백 이낭은 이때다 싶어 얼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오늘 일이 틀어진 건 사실… 저희와 셋째 도련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다지 좋지 않다니? 좋은 게 뭐기에?”
진씨는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내가 그 녀석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원래부터 큰애의 몫인 세자 자리를 그 녀석에게 넘겨주기라도 해야 좋은 사이라는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
백 이낭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진씨가 셋째 도련님을 살갑게 대해 주는 건 아니었지만 따지자면 셋째 도련님에게 안 좋은 일을 한 적 역시 없었다. 적모로서 진씨가 만점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합격점 정도는 되는 셈이었다.
“난 그 녀석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 한데 봐라. 그 녀석은 나에게 어떻게 했느냐?”
진씨는 눈시울을 붉혔고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누이동생의 혼사를 논하고 있는데도 그 녀석은 도와주는 기색도 없지 않으냐!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가는 꼴을 못 봐 주겠으니 이러는 게다. 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가면 제 큰오라비를 잘 끌어 줄 테니 그게 두려워서 그런 게지. 그 녀석이 여태 자신의 능력을 왜 그리 꼭꼭 숨겼겠느냐? 큰애의 세자 자리를 빼앗고 싶어 그런 것이다!”
백 이낭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능력을 숨긴 건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사전에 싹을 잘라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백 이낭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진씨는 진 부인이 했던 말을 재차 떠올리고는 몹시 억울해하고 분해했다. 이어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했을 때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떠올리다가 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무능한 주비양의 모습을 떠올렸다.
잠시 후, 마차는 정국백부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진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빨리 수화문을 지났고 화가 나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곧장 일상원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묘서와 강심설이 권의에 앉아 있었고 주묘서는 그녀를 보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어머니, 돌아오셨군요……. 어떻게 되었어요?”
주묘서는 두 사람이 자신의 혼사를 논하기 위해 진씨 가문에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강심설은 진씨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는 결과가 어떠한지 바로 알 수 있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조롱기가 스쳤다.
‘탐화에게 시집가기는 무슨. 그 사람이 좋아해 줄 땐 걷어차더니 이젠 관심 없다고 하는데 들러붙고 있네. 천박하기는.’
“어떻게 됐어요? 성사됐어요?”
주묘서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진씨를 쳐다봤다. 그녀는 원래 이 혼사는 성사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진지항이 저를 본체만체했으니 조바심이 났다.
“성사될 리가 있느냐! 이게 다 네게 능력 있는 오라비가 없기 때문이다!”
진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녹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서 비양이를 불러오너라!”
녹지는 그녀가 자신을 쏘아보자 몸을 덜덜 떨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주비양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무 표정 없는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즘 뭘 하며 지내느냐?”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주비양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딱히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진씨는 안면에 마비라도 온 듯 무표정한 그를 쳐다보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강심설을 노려보며 물었다.
“첫째는 평소에 뭘 하느냐?”
강심설은 진씨가 자신을 노려보자 깜짝 놀라 가슴이 뛰었다. 그에 아들을 꽉 안으며 억지웃음과 함께 답했다.
“서책을 보고 글을 쓰십니다.”
실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서책을 보고 글을 쓰고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