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22화 (322/858)

제322화

그 시각 궁명헌.

나한상에 기대어 앉은 엽연채는 『원앙결』의 마지막 장까지 막 다 읽었다.

그 옆 수돈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던 혜연은 책을 덮는 그녀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보신 거예요?”

“응.”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밖에서 추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씨, 염교가 왔습니다.”

“그래? 어서 안으로 들여라.”

엽연채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기뻐했다.

안으로 들어온 염교는 숨을 헐떡거렸고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서둘렀니? 앉아 차부터 마시렴!”

“아, 아닙니다.”

염교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소식을 전했다.

“오늘 사돈 마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돈 마님?”

엽연채는 되묻고 나서야 진씨가 떠올랐고 그제야 안색이 변했다.

“시어머니께서 어머니를 찾아갔다는 말이냐? 무슨 이유로?”

염교는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진씨가 추씨 가문에서 했던 말을 전부 들려주었다.

“결국 마님께서는 내일 사돈 마님과 함께 진씨 가문에 가게 되셨어요. 채 마마가 슬그머니 제게 오더니, 사돈 마님이 아가씨와 도련님께 수작을 부려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르니 저보고 먼저 가서 아가씨께 이 사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와 보니 경인이 혼자서 서쪽 측문을 지키고 있기에 이렇게 뛰어 들어온 겁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추길아, 염교를 배웅해 주거라.”

추길은 대답한 뒤 염교를 서쪽 측문 밖으로 배웅해 주었다.

혜연은 냉소를 짓고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투로 운을 뗐다.

“이제…….”

“분명 잔꾀를 부리려고 하겠지.”

엽연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가자. 공자께 소식을 전해야겠구나.”

* * *

한편, 동쪽 측문에서는 화려하고 큰 주씨 가문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진씨와 백 이낭은 마차에서 내린 후 일상원으로 가면서 상의를 이어 나갔다.

“지금 먼저 가서 이야기해 놓거라. 내일 바로 갈 준비가 되어 있게끔 말이다.”

진씨의 분부에 녹엽은 그리하겠다고 대답을 하고선 곧장 서과원 쪽으로 향했다.

진씨와 백 이낭이 일상원에 도착하자 녹엽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마님……. 제가 궁명헌에 가 봤더니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어디 가신 건지 모르겠네요.”

진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가 보거라.”

그런데 오후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지나도 엽연채는 돌아오지 않았다. 등청登廳한 주운환 역시 이 시각이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 어두워진 진씨는 난죽거를 지키는 여양에게 녹지를 보내 주운환이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지 알아오라고 분부했다.

이윽고 녹지가 돌아오더니 새파래진 얼굴로 고했다.

“여양이 말하길, 도련님은 요 이틀 동안 당직을 맡으셔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모레가 되어야 돌아오실 수 있다고요.”

진씨의 낯빛이 확 변했다.

“그럼 엽씨는?”

“셋째 마님은 친척 집에 방문하셨는지 그곳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온다고 합니다. 내일 저녁 무렵이 되어야 돌아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진씨와 백 이낭은 순간 멍해졌고 진씨는 표정이 더욱 굳었다.

“걘 우리 주씨 가문을 대체 뭘로 보는 것이냐? 우리 가문을 무슨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닭장 정도로 본다는 말이냐? 밖에서 자고 싶으면 밖에서 자도 된다는 말이냐?”

“여양이… 셋째 마님이 백야께 그리해도 되냐고 여쭤봤고 백야께서 그리하라고 허락하셨답니다.”

녹지는 낯빛이 조금 창백해졌고 진씨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마침 주 백야가 뒤에서 허허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한 뒤로 주 백야는 사람이 아주 밝고 쾌활해졌고 더 이상 예전처럼 우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셋째 아가가 외박을 한다는 데 어째서 동의하신 겁니까?”

진씨가 정색을 하며 따졌다.

“동의 못 할 게 뭐가 있소?”

주 백야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탑상에 앉지 않고 서서 대꾸했다.

“셋째 아가가 말하길 무슨 친척인가 벗인가 하는 사람이 회임을 했는데 몸이 조금 좋지 않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가서 곁에 있어 주라고 했소.”

진씨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어떤 벗이요? 어떤 친척이요?”

주 백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왜 셋째 아가를 단속하려는 거요?”

“그 애는 제 며느리입니다! 공연히 외박을 한다고 하는데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 그 애가 셋째를 놔두고 다른 사내와 정분이라도 날까 봐 걱정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벗의 집에서 하룻밤 묵는 게, 어찌 셋째를 놔두고……! 당신도 사찰이나 도관에서 자주 묵지 않았소. 그럼 그건 어찌 되는 것이오?”

“무슨 뜻입니까?”

주 백야가 성난 목소리를 내자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만하시오!”

주 백야는 두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당신이 남한테 뭐라 하는 건 되고 남이 당신에게 뭐라 하는 건 안 된다는 말이오? 그만하시오. 괜히 입씨름해 뭐 하겠소.”

주 백야는 한숨을 쉬더니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갔다.

진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탑상에 도로 앉더니 백 이낭을 쳐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둘 다 집에 없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진씨 가문에서 승낙하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이냐?”

백 이낭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게…….”

“어머니!”

이때, 병풍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씨와 백 이낭은 깜짝 놀라 병풍 뒤에서 나오는 주묘서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진씨는 주묘서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했다. 주묘서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방금 전에 안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가… 어머니와 백 이낭의 대화를 듣게 됐어요.”

원래는 모른 척하려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주묘서가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제 혼사 문제에 왜 그 사람들 도움이 필요해요? 꼭 그 사람들에게 직접 가 달라고 부탁을 해야 돼요?”

“묘서야…….”

주묘서가 애원하듯 묻자 진씨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 진씨 가문에서 응하지 않는 거예요? 저도 명색이 주씨 가문 적장녀이고 제 오라버니는 장원 급제자예요. 그 탐화보다 몸값이 두 단계나 높다고요. 그런데 그쪽에서 절 싫어한다는 말이에요? 어머니와 백 이낭이 이렇게 말하면… 제 값어치를 확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없다고요!”

주묘서는 화가 나 왈칵 눈물을 쏟더니 뒤돌아서 뛰쳐나갔다.

진씨는 주묘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주운환의 적모이고 주묘서는 주운환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런데 혼삿말을 꺼내는 게 무어 그렇게 어렵겠는가?

그런데 내일 가서 주운환 이 빌어먹을 놈을 여러 번 언급하자니,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진씨는 다시 백 이낭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자네도 가야겠네.”

백 이낭은 이미 예상했던 터라 허허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물론 속으론 진씨를 경멸했다. 늘 이랬다. 진씨는 고결하고 고고한 척하며 추잡하고 더러운 짓은 전부 백 이낭에게 떠넘겼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진씨는 또 궁명헌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아무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오후 미시가 되자 진씨는 별수 없이 백 이낭과 둘이 추씨 가문으로 갔다.

온씨는 진씨와 백 이낭 두 사람만 보이고 엽연채 부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자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들은 함께 진씨 가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마차가 진씨 가문에 도착했고 마부가 초대장을 건네자 문지기는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차가 수화문에서 멈춰 서자 온씨와 진씨가 마차에서 내렸고, 의복을 잘 갖춰 입은 중년 여인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부인, 오셨군요.”

“그렇네.”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맞이한 여인은 진 부인의 심복인 우 마마였다.

“아, 여기 두 분은 주씨 가문 부인들이시죠.”

우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했다. 어제 온씨가 서찰을 보내 진씨와 함께 방문할 거라고 미리 통보를 했었다.

“세 분, 이쪽으로 오시죠.”

온씨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진씨, 백 이낭과 함께 우 마마를 따라갔다.

진씨는 가는 내내 주위 환경을 관찰했다. 곳곳에 정자와 누각이 서 있고 구불구불한 오솔길과 석가산이 보였다. 주씨 가문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아주 세련되고 깔끔하게 가꿔져 있어 고아한 운치가 물씬 풍겼다. 이에 그녀는 과거에 진씨 가문이 후작 작위를 받았음을 떠올리더니 가산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진씨 부자는 모두 진사 출신이 되었다. 한 집안에 진사가 둘이 나왔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결한 학자 가문이 된 것이었다. 그러자 진씨는 이 혼사가 더욱더 만족스러웠고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진씨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들은 우 마마의 안내를 받아 대청에 도착했다. 대청에는 ‘정수유심靜水流深’이라고 쓰인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었는데 굵고 힘 있는 필체에서 깊이와 중후함이 느껴졌다.

얼굴이 살짝 동그스름한 사십 대 초반의 부인이 상석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전지 문양이 들어간 담황색 배자 차림의 부인은 온씨 일행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온 부인 오셨군요! 여기 두 분은… 주씨 가문 부인들이시죠.”

진씨는 진 부인이 자신들을 주씨 가문 부인들이라고 부르는데도 그저 웃고 말았다. 백 이낭을 이낭이라고 밝히기가 곤란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분의 사람들은 외출할 때 함께 밖에 데리고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인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온씨와 진씨, 백 이낭이 하좌에 놓인 의자에 앉자 여종이 차를 내왔다.

“온 부인,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진 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온씨를 쳐다봤다.

엽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분은 선조들의 친분이었고, 현재 그들 대에선 엽학문만이 진사 출신이자 낭중인 진 노야를 높이 평가했다. 낭중이 5품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업무를 맡는 실직實職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엽학문은 연회가 있을 때마다 진 노야를 초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진 부인과 온씨는 교분이 두텁지 않았다. 지난번에 온씨가 중매를 맡게 된 것도 진지항이 먼저 주묘서를 마음에 들어 했고 또 온씨가 우연히 주씨 가문과 사돈이라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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