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체면상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는 진씨를 대신해 백 이낭이 입을 열었다.
“요즘 일이 정말 잇달아 생겨 이제서야 시간이 나 이렇게 뵈러 왔습니다.”
온씨는 백 이낭이 진씨의 심복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웃는 낯으로 답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자 진씨가 말했다.
“안사돈과 바깥사돈이 그렇게 되실 줄 어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진씨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가 엽승덕을 언급하자 신경이 거슬린 온씨는 얼른 웃으며 이야기를 무마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보니 안사돈이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온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씨의 말에 호응해 줬다. 이렇게 안부의 말을 모두 건네고 나니 갑자기 분위기가 좀 어색해졌다. 더욱이 진씨는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몰라 백 이낭을 힐끗 쳐다봤다.
잠시 표정이 굳었던 백 이낭이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작년에 사돈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신 혼사 말이죠. 저희가 잘 생각해 봤습니다.”
온씨는 그 말을 듣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혼사라니요?”
백 이낭도 면목이 없었지만 그래도 꺼내야 하는 말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했다.
“무슨 혼사겠습니까? 묘서 아가씨와 진씨 가문의 혼사죠.”
“그게 무슨…….”
온씨는 어이가 없어 진씨를 쳐다봤다.
“그때 사돈께서 적당하지 않다며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진씨는 표정을 굳히더니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내며 말했다.
“사돈. 그건 아니죠. 제가 언제 적당하지 않다며 거절했습니까? 적당하지 않은 게 아니라…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온씨는 입꼬리를 씰룩거렸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그때 진씨는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지 딱 잘라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그 상황을 미루어 보면 제아무리 얼간이라도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진씨는 그때 진씨 가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온씨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당시에는 진씨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 진지항이 탐화가 됐으니 후회가 되어 말을 바꾸는 것이었다.
‘지금 뭘 하고 싶어 찾아온 걸까? 설마 나보고 다시 진씨 가문에 가서 혼사를 꺼내라고 하고 싶은 걸까?’
온씨는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이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화가 나 얼굴이 다 새파래진 온씨가 말했다.
“아, 맞습니다…….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사돈께서도 아시겠지만 그쪽에서 저에게 혼사를 주선해 달라고 했으니 어쨌든 전 돌아가서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때 전 사돈께서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전해 드렸습니다.”
진씨는 온씨가 자신에게 이렇게 대꾸하자 표정이 확 어두워졌으나 꿋꿋하게 말을 받았다.
“아, 사돈께서 말을 전했다고 하시는데 그럼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온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진 부인께서는 알겠다며 더는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때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다들 모를 리가 없었다. 진씨가 진씨 가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하니 진씨 가문은 바로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진씨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그럼 그쪽에서는 아직 저희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군요.”
백 이낭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거들었다.
온씨는 그 말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채 마마는 헛웃음을 짓더니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럼 사돈 부인께서는 어찌하시고 싶은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어찌하고 싶다니?”
진씨의 표정이 조금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먼저 이 혼사를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말을 바꾸려니 스스로도 이미 낯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채 마마의 표정이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보이자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이다.
“하하, 사돈 부인께서도 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백 이낭은 얼른 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이 혼사에 대해 저희가 잘 생각해 봤는데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수고스럽겠지만 사돈 부인께서 진씨 가문에 가셔서 말을 전해 주시지요.”
백 이낭의 말에 온씨는 화가 나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진씨가 엽연채의 시어머니라는 점이 걸려 노기를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씨 가문은 당연히 이 혼사를 원치 않을 터였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가서 말을 전하고 거절당하면 진씨는 나중에 분명 일부러 제대로 중재를 하지 않았다며 트집을 잡으며 엽연채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진씨의 부탁을 거절해도 또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었다.
온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전엔 제가 두 분을 오해했네요. 전… 그때 사돈이 혼사를 거절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진씨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여러 번 자신의 부탁에 응하지 않자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말실수를 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이러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일 저와 사돈이 함께 진씨 가문을 찾아가 정확히 뜻을 전달하는 거죠. 어떠세요?”
“그건…….”
온씨의 제안에 진씨는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뻔뻔하게 그곳에 갈 수 있겠는가?
“혼사는 중매하는 사람이 먼저 가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죠.”
“지난번에 제가 가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지금은 상황이 좀 특별하지 않습니까. 진씨 가문에서 저에게 주씨 가문으로 가서 혼담을 꺼내 달라고 했고 주씨 가문에선 생각해 보겠다고 했죠. 그런데 진씨 가문에선…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온씨는 ‘다른 의미’가 무슨 뜻인지는 감히 먼저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진씨가 득달같이 달려들 것 아닌가.
“게다가 전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고 머리도 나빠 두뇌 회전이 느립니다. 그래서 늘 오해를 사죠. 이미 한번 사돈을 오해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다시 갈 수는 있지만… 일을 그르치게 되어도 사돈께서는 제 탓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진씨는 낯빛이 확 변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온씨는 분명 지금 한 말을 이용해 이쪽의 입을 틀어막을 것이다.
진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일 함께 가시죠.”
“이리 결정된 겁니다. 제가 지금 진씨 가문에 서찰을 보내겠습니다.”
온씨가 허허허 웃으며 말을 받자 진씨도 어느 정도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침엔 저희 집안에 일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온씨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한쪽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채 마마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진씨와 백 이낭은 그곳을 떠났다.
두 사람을 수화문까지 배웅한 온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수화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저렇게 후안무치한 사람은 내 본 적이 없다. 내일 진씨 가문에 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감도 안 잡히는구나. 진 부인은 분명 이 혼사를 원치 않을 테니 사돈에게 망신을 줄 게다. 스스로 거북한 상황을 자초하는 게지.”
채 마마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도 사돈 부인은 창피함을 아는 분이고 어리숙해 보였습니다. 그보다는 그 백 이낭이 제가 봤을 땐 아주 교활하고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대담하게 찾아온 걸 보니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해요.”
“뭐라?”
온씨는 깜짝 놀랐다.
“또 무슨 꿍꿍이속이 있단 말이냐?”
“소인이 지금 걱정되는 건 그 꿍꿍이속에 큰아씨와 부군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겁니다.”
채 마마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마님, 걱정 마십시오. 방금 전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 때 제가 염교를 주씨 가문으로 보내 큰아씨께 이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온씨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백 이낭이 아무리 머리를 잘 굴린다 해도 자네를 능가할 순 없을 걸세.”
* * *
한편, 주씨 가문 마차는 장명가를 나와 도성 북쪽을 향해 달렸다.
진씨는 어두운 얼굴로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내일 진씨 가문에 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겠구나.”
진 부인이 면전에서 거절하면 자신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부인,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가 따로 대책을 마련해 놓지 않았습니까?”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진씨를 달랬다.
“내일 미시면 셋째 도련님은 이미 퇴청하셨을 거예요. 그러니 저흰 셋째 도련님과 셋째 마님을 불러 함께 가는 겁니다. 도련님은 이번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하셨고 요즘 계속 상서방에 가신다고 하니 진 공자님보다 더 체면이 서죠.
가서 저흰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꺼내는 겁니다. 작년에 거절했던 게 아니라 계속 생각해 보고 있었다고 말이죠. 진씨 가문에서도 작년에 명확히 답을 주지 않았으니 그쪽에서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이었다고 말하면 됩니다.
이때 셋째 도련님이 자리에 계시면 그분들도 도저히 그 앞에서 싫은 내색은 하지 못할 거예요. 그럼 자연스레 응하게 되는 거죠.”
진씨는 ‘흥’ 콧방귀를 뀌었지만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면서도 이 일에도 주운환의 세를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또 속이 뒤틀렸다.
백 이낭은 진씨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주운환의 세를 이용하는 이상 그를 존중하고 추켜세워 줘야 하는데 진씨는 그러지 않았다. 그를 이용해 이득을 보려 하면서도 또 그의 체면을 깎으려고 했다.
백 이낭은 주묘화의 혼사가 진씨 손에 달려 있지만 않아도 이런 구질구질한 일에 끼어들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주묘서가 먼저 시집을 가고 또 좋은 곳에 가야 진씨는 비로소 주묘화의 혼담을 꺼낼 것이다.
백 이낭은 여러모로 생각을 하며 담녹색 발을 걷어 올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주씨 가문을 향해 앞으로 달려가는 말을 쳐다봤다.
그들은 이미 작은 마차 한 대가 먼저 주씨 가문 서쪽 측문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