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진지항은 공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환아, 제수씨, 그리고 소저. 시간이 늦었으니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안 그러면 또 어머니께서 잔소리를 하실 겁니다.”
“네, 형님.”
주운환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명헌을 나온 진지항은 여종에게 길을 안내받아 일상원으로 가서 진씨에게 인사를 드린 후 그곳을 떠났다. 주운환은 진지항을 수화문까지 데려다준 후에야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진지항이 떠난 방향을 쳐다보며 진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빨리 가 버리다니. 게다가… 묘서는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게냐?”
그리 말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주렴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더니 어두운 표정의 주묘서가 녹지와 함께 앞뒤로 서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잖아도 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다. 어째서 그 애랑 같이 오지 않은 것이냐?”
진씨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주묘서는 화가 나 가슴이 벌렁거렸고 좀 전의 일을 생각하니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런……? 얘야, 어찌 그러느냐?”
진씨는 주묘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녹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찌 된 것이냐?”
“그게…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녹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니?”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네가 본 대로 전부 말해 보거라.”
녹지는 우물쭈물하더니 방금 전 궁명헌에서 있었던 일을 진씨에게 말해 줬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진 공자님이 아가씨에게 예의를 차리느라 그러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공자님에게 소롱포를 집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거절하셨어요. 보아하니…….”
진씨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도 이런 시절을 다 겪어 본 사람이니 어떤 일들은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진지항은 자신의 딸에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저… 마님, 그럼 탐화는 계속 염두에 두실 건가요?”
녹지는 조심스럽게 진씨를 쳐다봤다.
진씨는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받은 냉대와 헛걸음했던 일을 떠올리자 진지항마저 놓쳐 버리면 정말로 좋은 신랑감은 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진지항이 탄 마차가 문을 나서서 금세 장승가에 도착했다. 진지항은 그 검은색 작은 목재 찬합을 든 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시종에게 일렀다.
“엽씨 가문으로 가자꾸나.”
“어떤 엽씨 가문 말씀이세요?”
마차를 몰던 시종 명여는 어리둥절했다.
“어느 엽씨 가문이겠느냐? 당연히 정안후부였던 엽씨 가문이지.”
진지항이 말했다.
전에는 다들 정안후부라고 불렀지만, 이젠 작위를 빼앗겼으니 엽씨 가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거긴 왜 가시려고요?”
명여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 머리를 돌리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찬합을 엽 소저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예?”
명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진지항을 쳐다봤다.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분은 출가도 안 한 아가씨세요. 다 큰 사내인 도련님이 그분에게 물건을 전달하다니요? 남녀 사이에 사사로이 물건을 주고받으면 안 되는 거 모르십니까?”
“이놈아!”
진지항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순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허튼소리 말거라. 이건 내 물건도 아니다. 교자와 떡은 운환이와 그의 내자가 만든 것이다. 게다가 가장 힘쓴 사람은 바로 엽 소저이고! 이 찬합은 주씨 가문 것이고 이 음식은 원래부터 그 소저의 몫이었다. 소저가 가져가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그저 대신 전달해 주는 것이다. 알겠느냐?”
명여는 그가 이리 돌려 말하니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여전히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명여는 마차를 몰고 도성 북쪽을 벗어났다.
마차는 이각쯤 지나 엽씨 가문 동쪽 측문에 도착했다. 문 입구엔 하인 두 명이 나무 걸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마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지키던 하인 중 하나가 신분을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명여가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진지항이 발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우린 엽씨 가문 셋째 소저에게 물건을 전달하러 왔다!”
그러자 물어본 하인이 배시시 웃으며 이리 대꾸했다.
“어느 셋째 아가씨를 말씀하시는지요? 저희 가문엔 셋째 아가씨가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영교 아가씨이고 다른 한 분은 미채 아가씨입니다.”
“영교 소저다.”
진지항은 그리 말하며 작은 찬합을 명여에게 건넸고 명여는 다시 이 찬합을 하인에게 건넸다.
진지항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영교 소저가 주씨 가문에서 우리와 함께 음식을 만들었는데 일이 있어 먼저 가셨다. 이건 소저의 몫이다.”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 그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큰아가씨를 대신해 영교 아가씨께 물건을 전달해 주시는 거군요.”
오늘 엽영교는 외출해 주씨 가문에 갔었고 한 시진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진지항은 하인이 찬합을 받아 드는 모습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속으로 세심하지 못한 엽연채를 나무랐다. 가장 힘쓴 사람은 분명 엽영교인데 떡을 다 먹어 버리고 엽영교 몫은 남겨주지 않다니. 그래도 지금 엽영교에게 그녀의 몫을 전달했으니 엽영교는 자연히 엽연채가 신경을 썼다고 생각할 것이다.
명여가 말채찍을 휘갈기자 마차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문을 지키던 하인은 후원으로 향해 옥패에게 찬합을 건네며 진지항이 했던 말도 전달한 후 자리를 떴다.
옥패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찬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엽영교는 소청의 조그만 원탁 옆에 앉아 있었다. 원탁 위엔 찐 교자와 산약고 한 접시가 차려져 있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솥에서 꺼낸 것들이었다.
“어서 오너라. 지금 안 먹으면 식는다.”
엽영교는 생글생글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여기도 있습니다.”
옥패가 작은 찬합을 들고 다가와 열어 보니 안에는 교자 다섯 개와 산약고, 소롱포가 들어 있었다.
“어찌 된 것이냐?”
“문을 지키는 하인이 말하길 오늘 아가씨께서 주씨 가문에서 음식을 만드셨는데 일이 있어서 먼저 오시는 바람에 아가씨 몫을 보내온 거라고 합니다.”
“내 몫이라고? 내 몫은 이미 달라고 했는데?”
엽영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진지항과 주운환이 일상원으로 갔을 때 자신은 마음이 영 불편하여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엽연채가 찬합을 들고 오더니, 집에 돌아가서 쪄 먹으라며 익히지 않은 교자와 떡을 두 상자나 싸 주었다.
“누가 전달하러 왔니? 그쪽에서 다 못 먹어서 보낸 걸까?”
엽영교는 사실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다 못 먹을 수가 있겠는가?
주씨 가문에 엽연채와 주운환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진씨 등 다른 가족들까지 생각한다면 나눠 주기에도 충분치 않은 양이었다. 설령 그들에게 나눠 주지 않았더라도 혜연과 추길이 있으니 일부러 이쪽에 더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 지키는 하인이 말하길 마차 한 대가 왔고 말을 전한 사람은 젊은 사내라고 했습니다.”
옥패는 눈알을 굴리더니 ‘풉’ 하고 웃었다.
엽영교는 다시 생각을 해 보더니 이내 그가 진지항임을 알게 되었다. 또 주씨 가문에서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붙어 버렸던 난감한 일이 떠오르자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 몫은 이미 있는데 일부러 또 가져왔구나……. 정말 어벙한 사람이야.”
* * *
진지항이 떠난 후 진씨는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녹지가 어두운 얼굴로 탑상 위에 앉아 있는 진씨에게 말을 건넸다.
“셋째 도련님과 탐화인 진 공자님은 동료이고 또 엽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친분이 있잖습니까. 셋째 마님을 진씨 가문으로 보내 중간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나 진씨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엽씨 그 망할 것은 앙칼지고 매몰차서 아마 그리하겠다고 능청을 떨어 놓고 뒤에서는 허튼수작을 부릴 게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망할 것을 보낼 바에야 차라리 온씨를 찾아가는 게 낫지.”
사실 진씨는 그러잖아도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온씨를 찾아갈 요량이었다. 그녀에게 진씨 가문에 가서 혼사 이야기를 다시 꺼내 달라고 부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좋은 생각이세요.”
녹지는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온씨 부인은 만만한 사람이라 다루기가 훨씬 쉽죠. 아직 날이 밝으니 얼른 가서 온씨 부인에게 서찰을 건네고 오겠습니다.”
“서찰은 무슨. 그랬다가는 밤새 내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지 궁리를 할 게다. 온씨가 미처 손쓸 새가 없게 해야 한다.”
진씨는 잠시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백 이낭을 데려가야겠구나.”
* * *
이튿날 이른 아침, 진씨는 백 이낭과 녹지를 데리고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 일행은 장명가에 있는 추씨 가문으로 향했다.
온씨는 곁채에서 어머니의 식사를 돕고 있었는데 밖에 있던 염교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주씨 가문 부인과 백 이낭이 왔습니다.”
“뭐라?”
밥그릇을 들고 있던 온씨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어린 여종에게 밥그릇을 건넨 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며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왔단 말이냐?”
“어쩌면 마님을 뵈러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큰아씨의 부군께서 장원 급제를 하셔서 주씨 가문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마님께도 당연히 아첨을 해야겠죠.”
온씨는 채 마마의 말을 웃으며 받았다.
“아첨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느냐. 안사돈이 연채에게 잘 대해 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대꾸하긴 했어도 어쨌든 기분은 좋아졌다.
온씨가 기다란 회랑을 따라 걸어가 응접실에 도착하니, 진씨와 백 이낭은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었고 옆에 놓인 찻상 위엔 백자 찻잔이 놓여 있었다.
진씨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고 싶었지만 체면상 그럴 수는 없어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사돈.”
“사돈, 백 이낭. 자리에 앉으세요.”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온씨는 상석에 앉지 않고 배나무 찻상을 사이에 두고 다른 권의에 앉았다. 그러자 여종이 얼른 온씨에게도 차와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