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주묘서는 천천히 걸어왔고 탁자 위에 차려진 잘 익은 떡과 교자를 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작은새언니가 교자를 빚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저보고 가서 도우라고 하셨어요. 작은새언니도 참, 이것저것 만들면서 저희를 부르지 않다니요.”
그러자 엽연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가씨는 생신 축하연에 참석하러 가지 않았나요?”
그 말에 주묘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엽연채는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원래 각자 알아서 놀기로 하지 않았던가? 저쪽은 생신 축하연에 참석하고 이쪽은 교자를 빚으며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런데 주묘서는 기어코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말을 꺼냈다. 좀 즐겁고 유쾌하게 대화할 수는 없단 말인가?
진지항은 이 짧은 대화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주묘서를 힐끗 쳐다봤다. 주묘서는 지난번 묘씨의 생신 축하연 때보다 더욱 차림새에 신경을 쓴 모습이었고 한층 예뻐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품도 더 분명하고 또렷하게 드러났다.
엽연채가 만든 교자를 얻어먹으러 온 것이면서 입을 열자마자 쓸데없는 소리를 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걸 보니 주묘서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지항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자신이 작년에 구혼했을 때 그녀가 저를 거절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제 말은…….”
주묘서는 그녀의 대꾸에 무안한 나머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셋째 마님, 저희가 아까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마님은 저희를 부르러 오지 않으셨잖아요. 아가씨께서는 그저 농담을 하신 것뿐이에요. 셋째 마님이 교자와 떡을 만들고 있다는 걸 마님께서 알게 되셨으니 한번 맛보고 싶으신 겁니다.”
보다 못한 녹지가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어머님과 큰아가씨에게 보내 드릴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엽연채가 말했다.
“추길아, 가서 작은 찬합을 몇 개 가져오너라.”
직접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고 게다가 이렇게 많이 만들었으니 당연히 진씨 등이 먹을 몫도 준비해 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또 꼬투리를 잡힐 테니 말이다.
추길은 엽연채의 분부를 듣더니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오판화五瓣花가 조각된 검은색 작은 목재 찬합 네 개를 꺼내왔다.
엽연채는 각 찬합에 교자와 소롱포, 조이산약고를 다섯 개씩 넣었다. 사람들은 조그만 찬합에 담긴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솜씨를 맛볼 것이다.
진지항은 음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찬합에 음식을 담으니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교자와 산약고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자신들이 좀 먹으면 탁자 위의 음식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진지항은 엽영교 생각이 또다시 났다. 이 음식은 모두 엽영교가 고생해서 만든 것이었다. 소를 준비하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교자 만두피를 밀며 한나절 이상을 분주히 움직였는데 그녀는 하나도 먹지 못했다. 반면, 얼굴도 비치지 않은 사람들은 절반이나 맛보게 됐으니 진지항은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이 찬합 네 개는 각각 어머님과 큰아주버님, 둘째 아주버님, 둘째 아가씨에게 보내거라.”
추길은 엽연채의 분부에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작은 찬합들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주묘서는 얼른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전 여기서 먹을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저도 모르게 진지항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진지항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자 주묘서는 마음이 답답했다.
‘쳐다보지도 않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너무 부끄러워서 그런 걸까?’
“형님, 사양 말고 드시죠.”
주운환은 진지항에게 권하면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하하. 그래.”
진지항이 웃으며 대답했다.
주운환은 조이산약고 하나를 집어 엽연채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먹어 봐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맛있네요.”
주운환은 미소를 짓더니 교자 하나를 집어 먹었다.
주묘서는 그 모습을 보더니 또 진지항을 슬쩍 훔쳐봤다. 자신이 자리에 앉았는데도 그가 눈길 한번 주지 않으니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저렇게 용기가 없어서야!’
주묘서는 자신이 자리에 앉으면 진지항은 부끄러워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냉담하기만 했고 저를 마치 공기처럼 대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게 소롱포죠? 먹어 봐야겠어요!”
주묘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진지항을 쳐다봤다.
소롱포는 마침 진지항 앞에 놓여 있었다. 주묘서는 자신이 이 말을 꺼내 주운환이나 엽연채가 물색없이 자신에게 소롱포를 집어 줄까 봐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엽연채와 주운환은 아랑곳 않고 자기 음식만 먹을 뿐, 그녀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지항도 공용 젓가락을 들더니 교자 하나를 집어 빈 접시 위에 올릴 뿐이었다. 마치 주묘서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주묘서의 표정이 굳었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못 들은 걸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던 주묘서는 진지항을 쳐다보며 말했다.
“진 공자, 소롱포 하나만 집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진지항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공수를 하고 말했다.
“소저, 남녀 사이에는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않는 법인데 어찌 제게 소저께 음식을 집어 드리라 하시는 겁니까? 이 탁자가 넓지도 않은데 소저는 팔이 유난히 짧으신가 봅니다?”
그가 이렇게 면박을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주묘서는 얼굴이 순간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때 엽연채가 손을 뻗어 소롱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엽연채도 여인이고 저쪽에 앉아 있는데도 어려움 없이 집었으니, 이러면 자신이 뭐가 된단 말인가.
주묘서는 자신의 체면이 또 깎였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화가 난 그녀는 당장이라도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던지고 이곳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묘서 뒤에 서 있던 녹지는 낯빛이 확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주묘서의 체면을 조금도 살려 주지 않다니! 그녀는 생각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 공자님께서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저희 큰아가씨가 동안후부 생신 축하연에서 다른 손님과 부딪히시는 바람에 손이 부어서 지금도 통증을 느끼고 계세요.”
“맞아요!”
주묘서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리되었는데 녹지 넌 이곳에 서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상전에게 음식을 집어 주는 건 네 일이 아니더냐?”
주운환은 냉소를 짓더니 녹지를 쳐다보며 훈계했다.
“넌 네 상전이 저런 말을 꺼낼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외간 사내에게 음식을 집어 달라고 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네 상전의 평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냐?”
주묘서는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이 말은 자신이 염치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녹지도 안색이 확 변했다.
“제…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큰아가씨는 성격이 솔직하신 분이라 소롱포가 마침 진 공자님 앞에 놓여 있어 순간적으로 진 공자님을 부르신 것뿐입니다.”
녹지는 얼른 앞으로 한 발 다가가 공용 젓가락을 들고서는 주묘서에게 소롱포를 하나 집어 주었다.
주묘서는 부끄럽고 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소롱포를 집어 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가 버리면 그들이 한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주묘서는 꾹꾹 참으며 소롱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고 입 안에 들어 있는 소롱포는 신맛과 떫은맛, 쓴맛 등이 한데 섞인 터라 더더욱 괴롭게 느껴졌다.
주묘서는 또 참지 못하고 진지항을 곁눈질로 봤는데 그는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런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주운환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그는 한마디도 거들어 주지 않았다.
진지항은 공용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우선 교자 하나를 집어 한쪽에 놓인 접시 위에 올려놓았고 또 산약고 하나와 소롱포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또 교자 두 개를 집어 들었다.
“형님, 먹지도 않으시면서 왜 이렇게 많이 집어서 한쪽에 두시는 거예요?”
주운환은 주섬주섬 음식을 챙기는 그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진지항은 순간 멍해졌고 방금 전 자신이 주묘서에게 말했던 남녀 사이엔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얼굴이 살짝 화끈거려 웃으며 말했다.
“음식이… 정말 너무 맛있어서 몇 개 가지고 가려고 그런 건데 우스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나.”
“우스울 게 뭐가 있어요. 진 공자,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세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종류마다 두 개씩 먹었더니 전 배가 부르네요.”
주운환은 난처해하는 진지항의 모습을 쳐다보며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추길을 불렀다.
“추길아, 형님에게 작은 찬합을 하나 가져다드리거라.”
“예.”
추길은 대답을 하더니 돌아서서 찬합을 가지러 갔다.
“저기…….”
진지항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음식을 먹으면서 가지고 가기까지 하면 너무 염치없는 것 아니겠는가.
“따끈따끈할 때 찬합에 담아야죠. 먹다 남은 걸 담으면 보기 좋지 않을 거예요.”
엽연채가 얼른 그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조그만 찬합을 가지고 돌아온 추길이 진지항 옆으로 가서 그를 도와 교자와 떡을 찬합 안에 넣었다.
진지항은 조그만 찬합 안에 담긴 음식을 보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 젓가락을 들더니 동그랗고 예쁜 산약고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네요.”
그리 말하며 교자와 소롱포도 입에 넣었다. 모두 평소에도 먹는 것들이지만 오늘 직접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서인지 맛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주묘서는 젓가락을 들고선 맞은편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진지항을 쳐다봤다. 그가 자신을 아예 상대도 안 해 주자 주묘서는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몇 개씩 더 집어 먹고 나니 탁자 위의 교자 등이 깔끔히 사라졌다.
진지항은 텅 비어 버린 쟁반과 접시를 쳐다보다가 다시 한쪽에 놓인 작은 찬합을 쳐다보더니 자신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빼놓지 않았다면 이 작은 찬합에 든 음식마저 모두 먹었을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