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18화 (318/858)

제318화

“아유, 진 공자.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옆에 있던 강심설이 미소를 지으며 착석을 권했다.

“그래. 어서 앉으시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진지항은 진씨의 말에 공손히 답하고는 물결무늬가 들어간 암녹색 앞자락을 걷어 올리며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주운환도 천천히 그의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니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진지항이 스스로 찾아왔다면 그래도 좀 괜찮은데 공교롭게도 녹지가 일을 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진씨는 사람을 불러놓고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면이 서지 않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 주 백야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내끼리 아무래도 나눌 이야깃거리가 더 많았을 테니 말이다.

진씨는 주 백야를 생각하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우리 셋째가 나이가 어린데 무슨 대운을 만난 건지 요행으로 장원 급제를 했네. 평소에 자네의 도움을 많이 받겠구먼.”

주 백야는 평소 셋째 이 천한 놈이 관직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걱정하며 말을 많이 했다.

“부인,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진지항이 말했다.

“운환이가 장원 급제를 한 건 본인의 재능과 학식 덕분입니다. 부인께서 모르시는 듯한데, 일갑에 든 사람들은 대부분 성적이 비슷해 장원과 방안, 탐화를 나눌 때 대부분의 경우 용모를 봅니다. 과거에도 항상 가장 젊고 잘생긴 사람이 탐화가 되었지요.

이번에 일갑에 든 사람들 중엔 운환이가 가장 잘생기고 가장 어렸습니다. 그런데도 장원으로 낙점되었지요. 황제 폐하께서 운환이의 재능이 저희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용모로만 고르면 운환이에겐 너무 억울한 처사라고 하셨죠. 운환이는 장원이 되기에 조금의 손색도 없습니다.”

진씨는 말문이 막혀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주운환을 꾹꾹 짓밟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다른 이가 주운환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될 줄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문인들은 다들 서로를 깔보고 업신여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진지항이란 인간은 어떻게 반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서 탄복하는 모습까지 보이니 말이다.

진씨는 너무 거북하고 불편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셋째가 어리니 평소 자네의 도움을 많이 받겠구먼.”

진지항은 공손하고 겸손한 얼굴로 말했다.

“도움은 제가 받고 있습니다.”

진씨는 순간 무슨 말을 더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그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엔 무슨 일을 하는가?”

“국사를 수정하고 전조의 실록을 집필하며 전례典禮와 관련된 원고의 초안을 잡습니다.”

진지항의 대꾸에 진씨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두 사람은 침묵했다. 분위기는 극도로 어색했다. 더는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어 진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를 부른 건 셋째를 챙겨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이었네. 녹지야, 가서 준비해 놓은 선물을 가져오너라.”

녹지는 대답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준비해 둔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녹지는 진지항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녹지가 문방사우가 든 상자를 챙겨 돌아왔다.

진지항은 선물을 받아 들고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부인.”

“어머니, 저희는 하던 일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운환이 말했다.

“그래. 가 보거라.”

진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응했다.

진지항은 공수한 뒤 주운환과 함께 문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일상원 밖으로 나오자 주운환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난처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진지항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우린 동료이니 앞으로 두 집안은 자연히 왕래를 하게 될 거다. 그러니 내가 너희 춘부장椿府丈(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과 자당을 뵙는 건 당연한 일이지.”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과원으로 향했다.

진씨는 화가 잔뜩 난 채로 탑상에 앉아 있었고 병풍 밖으로 나온 주묘서도 안색이 아주 엉망이었다. 그녀는 탑상 한쪽에 털썩 주저앉더니 입을 삐죽 내밀고는 몹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씨가 성난 목소리로 녹지를 다그쳤다.

“녹지 너는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보내자마자 바로 이렇게 사람을 불러와?”

“전…….”

녹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제가 들어갔을 때 두 분은 교자를 빚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셋째 도련님을 밖으로 불러내 따로 말씀드렸는데, 진 공자님을 일상원으로 모시려 한다니까 도련님이 바로 들어가서 그분을 불러내신 겁니다. 그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셋째 도련님이 일부러 저희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은 거네요.”

강심설은 냉소를 지었다.

진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방금 전 진지항의 태도를 생각해 보니 그는 어색해하지도 않고 우쭐거리지도 않았다. 아주 깍듯하게만 행동하는 그에게서 어떠한 감흥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마치 두 집안 사이에 한 번도 혼사를 논한 적이 없다는 듯 말이다.

그 반응 때문에 진씨는 더욱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정이 되지 않았다. 하나 어찌 됐든 간에 이 사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잠깐. 그 아이들이 뭘 하고 있었다고 했느냐?”

“두 분은 정원에서 교자를 빚으며 놀고 계셨습니다. 정원에 조그만 화로도 놔두고 말이죠.”

녹지의 대답에 진씨는 두 눈을 반짝이며 주묘서를 쳐다봤다.

“묘서 너는 가서 그 아이들과 교자를 빚거라.”

“제… 제가 왜 그곳에 가야 돼요.”

주묘서는 표정을 굳히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낯짝이 두껍다 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선 그녀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왜 안 간다는 말이냐?”

진씨가 말했다.

“그때 그 아이가 직접 나서서 구혼을 하지 않았니. 그 애가 널 마음에 들어 했어. 그런데 우리가 거절을 했으니 그 애는 지금 우리 집에 와서 몹시도 부끄러웠을 게다. 그래서 방금 전에 그렇게 깍듯하게 행동했던 게지. 좀 전에 네가 그 아이 앞에 있었다면 분명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게다.”

“흥.”

주묘서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청혼을 거절했더니 그 사람은 저희 집 문 앞까지 쫓아와 제 앞을 가로막았었죠.”

그러고는 조금 우쭐거리는 말투로 이리 말했다.

“그러니 지금 네가 가면 그 아이는 분명 너에게 매달릴 게다.”

진씨가 말했다. 그녀는 주묘서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듣자 마음이 좀 흥분됐다.

주묘서는 으스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민스러워했다.

“어머니… 전 그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해요.”

“그 애는 탐화다!”

진씨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비록 7품 한림이지만 3년 후 조고朝考를 치르면 시독이나 시강으로 직급이 오를 것이다. 늘 황제 폐하 곁에 있는 자리란다. 설령 한림원에 머물지 않더라도 육부六部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애는 아직 젊고 탐화라는 이력이 있으니 전도양양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묘서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외모가 너무 평범했다. 자신은 양왕처럼 매력 넘치는 사내나 태자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내를 좋아했다. 게다가 태자는 신분도 고귀하니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공주부의 하소군왕은 양왕처럼 특출난 외모를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도 남다른 외모를 가진 잘생긴 사내였다. 게다가 왕의 작위를 가지고 있고 황실의 혈통이며 황제의 외손자이니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진지항은 탐화가 되기는 했지만 외모가 너무 평범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들은 계속 혼처를 구해 봤으나 구할 때마다 이전만 못했고, 모든 조건을 종합해 봤을 때 그래도 진지항이 가장 괜찮았다. 가세와 재능, 학문 부분에서 확실히 괜찮은 편이었고 탐화에게 시집을 간다면 사람들의 부러움도 살 것이다.

진지항이 예전에 저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자신을 만나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는 생각이 들자 주묘서는 또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그럼 그 사람으로 고르죠! 지금 가 볼게요.”

“녹지야, 네가 함께 가거라.”

진씨가 말했다.

“어머니, 잠시만요.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요.”

녹지는 주묘서를 보더니 바로 그녀의 뒤를 쫓아 문을 나섰다.

주운환과 진지항이 궁명헌으로 돌아와 보니 교자와 소롱포는 이미 찜솥 안에 들어가 있었다.

엽연채는 돌 탁자 옆에 앉아 있었고 혜연과 추길도 이미 돌아와 솥 옆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진지항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빨리 빚었어요?”

“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전 두 분이 떠난 후에 혜연이와 추길이도 돌아왔어요. 두 아이가 교자와 소롱포를 아주 잘 빚어서 금세 다 만들었죠.”

진지항과 주운환은 돌 의자에 앉았고 진지항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어째 제수씨의 고모께서는 안 보이시네요?”

“아, 공자께서 나가신 후에 고모는 머리가 좀 어지러운데 이곳에선 잠자리가 불편하다며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지항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방금 전 붙어 있었던 두 사람의 긴 머리카락이 떠올라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확실히 참 어색하긴 했다.

“아가씨, 조이산약고가 다 되었습니다.”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자와 소롱포도요.”

추길은 갈고리로 찜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고 혜연도 가서 그녀를 도와줬다.

잠시 후, 돌 탁자 위엔 맛있는 교자와 조이산약고, 소롱포가 가득 차려졌다.

“한나절 이상 분주히 움직이고 고생한 덕에 마침내 먹게 됐네요.”

엽연채는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며 권했다.

“진 공자,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진지항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자신이 왜 사양을 하겠는가? 이 밀반죽 덩어리들은 직접 주무르고 치댄 것이었다. 자신도 한몫했으니 당연히 맛봐야 했다.

그러자 엽영교가 하얗고 가녀린 손목으로 밀반죽 덩어리를 치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서 제일 힘쓴 사람은 그녀였다. 그런데 하나도 먹지 않고 먼저 가 버리다니.

“작은새언니.”

이때 누군가의 달달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보니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주묘서였다.

주묘서는 흐릿한 꽃문양이 들어간 노란색 상의와 수홍색 유군을 입고 있었다. 치맛자락엔 흰색 말리화茉莉花(재스민) 문양이 수놓여 있었고 허리춤엔 노란색 술이 달린 구럭 몇 개를 감고 있었다. 우아함 속에 화려함이 느껴지는 차림이었다.

또 원보계元寶髻 머리엔 홍옥이 상감된 나비 모양 순금 화전과 성글게 짠 꽃 모양 천 장신구를 꽂고 있었다. 원래도 아름다운데 이렇게 공들여 치장하니 보는 이의 호감을 절로 불러일으킬 만큼 더없이 곱고 아리따웠다.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큰아가씨가 오셨네요.”

진지항은 주묘서의 목소리를 듣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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