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주묘서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예쁘긴 예쁜지라 어떤 부인이 그녀를 칭찬하자 강심설의 부모가 ‘어떤 복 있는 사내가 이렇게 고운 소저를 데려갈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고, 이에 부인 둘이 말을 이었으나 그들은 가세가 평범했다.
승은공부承恩公府와 황후의 친정인 영국후부榮國侯府 사람들도 자리에 있었는데, 두 집안의 세자는 아직 정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두 집안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같이… 사람 보는 눈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주묘서도 분해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일상원으로 걸어갔다. 방으로 들어가 탑상에 앉자 어린 여종이 앞으로 다가와 진씨에게 아뢰었다.
“마님, 셋째 도련님이 동료를 데리고 오셨는데 그 동료가… 탐화인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탐화라고? 그자는…….”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주묘서는 이리 외치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셋째 그 애가 어떻게 그 진 공자와 알고 지낸다는 말이냐?”
“어머님, 장원과 탐화는 모두 일갑에 든 사람들입니다. 함께 한림원에 들어가 같은 집무실에서 근무하지요.”
강심설이 알려 주자 진씨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방금 여종이 말하길 두 사람이 동료라고 했다.
“뭘 하려고 데려왔다는 말이냐? 설마 묘서와 그 진 공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애가 모른단 말이냐? 설마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해 주려는 걸까?”
“그럴 리가요.”
강심설이 냉소를 지었다.
진씨도 주운환이 그렇게 호의를 베풀지는 않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은 분명 좋은 배우자를 고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상대는 물려받을 작위가 있어야 하며 황제의 친척이면 가장 좋고, 아니더라도 실무를 맡은 사람이어야 했다. 또 청렴결백하고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세심하게 따지며 고르고 또 고르다 보니 자신의 마음에 든 권신이나 권력가들은 모두 주묘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진씨는 탐화를 놓쳐 버린 일이 점점 더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주운환이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고 하니 진씨가 설레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이건 인연일지도 모른다.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는가.
“녹지 너는 가서 셋째에게 그자를 데려오라고 하거라.”
진씨의 분부에 녹지의 표정이 굳었다. 왜 이런 난감한 일이 자신에게 떨어지느냔 말이다!
그러나 여종인 그녀가 어찌 감히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물러났다.
녹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궁명헌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가니 파초 나무 아래에 놓인 돌 탁자 주위로 몇 사람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운환 부부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함께 있었는데, 손님은 좀 평범하지만 그래도 맑고 환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녹지는 그 사람이 탐화임을 짐작하고는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녀는 엽연채 등이 교자와 소롱포를 만들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하인을 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스스로 고생을 한단 말인가?’
엽연채 일행도 이미 녹지를 본 후였다.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손을 멈추지 않고 조그만 반죽 덩이를 하나 집으며 말했다.
“녹지야, 무슨 일이냐?”
녹지가 예를 올린 후 말했다.
“도련님, 마님. 그리고 여기 계신 공자님. 저…….”
녹지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런 일은 당연히 진지항 앞에서 대놓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운환에게 말했다.
“도련님, 제가… 도련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잠깐 밖으로 나와 주세요.”
그러나 주운환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할 말이 있으면 이곳에서 하거라. 왜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냐?”
그 말에 녹지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알겠다.”
주운환은 다시 대답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그는 몇 걸음 안 가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한 버드나무 밑에 멈춰 섰다.
녹지는 냉랭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고는 주운환의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녹지가 주운환 앞에서 살짝 겁먹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 도련님께 말씀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도련님께서 진 공자님을 모셔오시라고요.”
주운환은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물었다.
“진 공자를 찾는 거면 왜 방금 전에 직접 진 공자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냐?”
“그게…….”
녹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무래도… 마님은 웃어른이시니… 조금 후에 오게 하시죠.”
“됐다, 내가 지금 가서 모셔가마.”
말을 마친 주운환은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련님!”
녹지는 낯빛이 확 변했다. 아직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자마자 그를 부르려 한단 말인가? 녹지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그만큼 빠르지 못했다.
녹지가 안으로 들어서니 주운환은 이미 진지항과 엽연채 곁에 서 있었다. 그가 진지항에게 일렀다.
“형님, 저희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는데 형님께 잠깐 왔다 가라고 하십니다.”
진지항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과 주묘서가 혼사를 논했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실례를 했구나.”
처음 남의 집에 방문을 하게 되면 당연히 웃어른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방금 전 집에 왔을 때 주운환이 진씨와 주 백야 모두 집에 안 계신다고 했고 게다가 즉흥적으로 오게 된 것이라 웃어른을 찾아가 인사를 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님, 가시죠.”
주운환은 그리 말하고는 진지항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녹지는 문 입구에 서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주운환이 이미 말을 꺼냈는데 진지항에게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진씨가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영특한 녹지는 진씨의 뜻을 알고 있었다. 진씨는 주운환이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어머니가 귀가했다고 언급하며 진지항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게 하길 바랐다.
그런데 지금 진씨가 진지항을 만나자고 청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리되면 진씨의 체통이 깎이는 것 아니겠는가? 녹지는 난처함에 소매를 꽉 쥐며 진지항과 주운환을 데리고 일상원으로 향했다.
한편, 진지항이 걸어가면서 보니 서과원 쪽은 스산하고 황폐한 느낌이 가득했고 곳곳엔 잡초가 무성했다. 근처에 있는 뜰도 퍽 허름했는데 남쪽으로 오니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곳곳엔 정교하고 아름다운 정자와 누각이 자리하고 있었고 걷는 내내 가지런히 다듬어진 화초와 관목이 보였다.
진지항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주운환이 서자라 낮은 대우를 받았던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제 주운환은 장원 급제를 했고 주씨 가문 사람들은 그 덕분에 도성 귀족들의 틈바구니로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진씨와 주묘서가 세도가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도 주운환 덕분이었다.
이 집안 안주인이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주변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사람을 시켜 주운환의 처소를 보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진씨는 주운환을 이용해 이득을 보면서도 그를 짓밟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진지항이 고개를 들어 보니 담벼락이 새하얗게 칠해진 뜰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담과 검푸른 기와, 붉은 칠을 한 대문과 수환獸環에선 정교하면서도 호방한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두 사람은 녹지를 따라 문안으로 들어갔다.
본채 낭하에 놓인 걸상에 앉아 있던 어린 여종은 저 멀리 주운환이 낯선 사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활짝 핀 꽃 문양이 들어간 방한용 문발을 걷어 올렸다.
“셋째 도련님과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에 있는 진씨와 주묘서, 강심설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뭐라 했느냐? 어째서 지금 온 것이냐?”
진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녹지 이 망할 것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것이야?”
시간을 얼마 두고 진지항이 알아서 웃어른을 뵈러 오는 모습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위엄이 서는데, 지금 녹지가 가자마자 바로 진지항을 불러온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대놓고 그를 부른 셈이 아닌가.
주묘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작년에 구혼한 진지항이 문 앞에서 자기 앞을 가로막아 섰을 때가 떠오른 것이다. 당시 그에게 자신은 태자부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거들먹거렸으니, 낯짝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묘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비를 맞는 난초가 그려진 커다란 병풍 뒤로 들어갔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아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운환과 진지항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앞으로 다가갔고 주운환이 진씨에게 공수하고 말했다.
“어머니.”
“소생 진지항, 부인께 인사를 올립니다.”
진지항은 예의를 깍듯이 갖춰 읍했다.
진씨가 고개를 들어 보니 가슴 부분에 커다란 자원앙紫鴛鴦 문양이 수놓아진 암녹색 관복을 입고 있는 젊은 사내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아주 잘생겼다고 볼 수는 없는 얼굴이지만 용모가 단정해 밝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원앙새 문양이 수놓인 암녹색 관복은 그에게 위엄을 불어넣어 주었다.
진씨는 그가 마음에 들어 한층 마음이 동했다. 이런 사윗감은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당慈堂(남의 어머니를 높이는 말)께서는 요즘도 잘 지내시는가?”
꼭 그녀가 진 부인과 잘 아는 사이인 듯한 말투였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평안하십니다.”
진지항은 깍듯이 대답했다.
진씨는 그저 얼굴에 미소를 띨 뿐,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또 진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면 진지항이 돌아가서 분명 얼마나 친한 사이냐고 물어볼 텐데 진 부인이 본 적도 없다고 대답하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