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주운환은 진지항이 탄 마차를 이끌고 서쪽 측문으로 들어갔고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주운환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다음 고삐를 여한에게 건넸고 진지항은 그제야 꾸물거리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진지항이 탄 마차의 말을 몬 하인 명여는 그의 곁으로 걸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여긴… 그 주씨 가문 아가씨댁이 아닙니까? 장원 급제를 한 주 공자께서… 그 아가씨와 한 가족이었네요!”
그리 말하는 하인은 낯빛이 창백했다.
이때, 주운환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뭘 그리 속닥거려요?”
진지항은 시원스럽고 솔직한 사람이라 그가 제일 못하는 게 바로 마음속에 어떤 일을 담아 놓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주운환에게 공수한 후 실토했다.
“운환아, 작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너도 들은 바가 있니?”
주운환은 눈치가 빨라 그가 주묘서 일을 언급하는 줄 알고는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럼…….”
진지항은 주운환이 일부러 자신을 집으로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랑 주묘서를 연결해 주려고?’
진지항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시 공수하며 말했다.
“운환아, 우린… 그냥 동료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너와 인척 관계를 맺고 싶진 않아.”
주운환은 픽 웃으며 동의를 표했다.
“네. 형님이 싫다면 당연히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진지항은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난 운환이 네가 호쾌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하고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있었지.”
주운환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고 두 사람은 함께 서과원으로 향했다.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청석길을 걸어가니 여양이 따라오며 이리 고했다.
“도련님, 마님께서 도련님을 위해 떡을 만드셨어요. 궁명헌에 가서 드셔 보세요!”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항을 쳐다봤다.
“형님, 가서 제 내자의 요리 솜씨를 같이 맛보시죠.”
“그래.”
진지항이 응하자 주운환은 고개를 돌려 여양에게 말했다.
“내 차해茶海(차를 끓여 음미하는 다구茶具)를 정원으로 옮겨 놓거라.”
“예!”
여양은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돌아갔다.
주운환과 진지항은 천천히 걸어가 마침내 궁명헌에 도착했다. 진지항이 고개를 들어 보니 벽과 단壇은 조금 허물어져 있고 높직한 문머리엔 다소 낡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커다란 글씨로 ‘궁명헌’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앞쪽엔 우뚝 솟아 있는 네 칸짜리 본채가 보였다. 중간엔 널찍한 정원이 있었으며, 오른쪽으론 구불구불한 회랑이 이어진 곁채가, 왼쪽엔 파초 나무 몇 그루가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엔 돌 탁자와 걸상이 자리했는데, 거기에 두 소저가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엔 진홍색 물체가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로 밀가루처럼 보이는 흰색 가루도 보였는데, 두 여인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들은 퍽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석에는 화로 두 개가 보였는데, 한 화로엔 찜기가, 다른 하나엔 찜솥이 올라 있었다.
진지항은 두 소저 중 엽연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반죽 덩어리처럼 보이는 동그란 흰색 물체를 치대며 맞은편의 소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소저는 그를 등진 채였는데, 담녹색 상의와 옅은 주황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정수리 부분에 양 갈래로 쪽을 졌는데, 금빛 찬란한 복숭아꽃 머리꽂이를 뒤쪽에 꽂고 실로 뜬 선홍색 술을 달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날렵한 허리가 그 사이로 보일락 말락 했다.
“아, 부군, 오셨군요.”
엽연채는 주운환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어 진지항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어, 이분은…….”
진씨 가문과 엽씨 가문은 전부터 교분이 있었다. 그런데 진씨 가문은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이 많지 않았고, 이번 대에는 진지항뿐이었다.
다만 진지항은 엽씨 가문 연회에 참석하면 늘 사내들 틈에 껴서 놀았기에, 그가 엽씨 가문 안식구들과 접촉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엽연채는 진지항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가만히 진지항을 훑어보니 그는 스물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크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영민하고 청렴결백해 보이는 인상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이쪽은 제 동료인 진지항 형님입니다. 말하고 보니 부인의 친정과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군요.”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진지항을 소개했다.
이에 엽연채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뻣뻣이 굳어 버렸다. 자신은 그럭저럭 괜찮은 진사를 찾아 달라고 했는데 주운환도 참, 아예 탐화를 끌고 온 것이었다.
“아이고, 생각났네. 운환이의 내자가 엽 대소저였군요.”
진지항은 미소를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이때 엽영교도 고개를 돌렸는데 진지항은 그녀를 보더니 살짝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 소저께서는…….”
엽영교도 순간 멍해지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주운환은 그들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엽연채 옆으로 걸어가 물었다.
“두 사람 왜 저러는 겁니까?”
“아…….”
엽연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났어요. 재작년 저희 할머니 생신 축하연 때… 묘 공자가 「백수운百水雲」을 연주했는데 진 공자가 다른 공자가 연주했을 때보다 별로라고 말하셨거든요. 고모가 화가 나서 진 공자와 말다툼을 했었어요.”
주운환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주운환은 도리어 두 사람을 반드시 이어 주겠다는 결의에 찬 눈빛을 번득였다.
“그래도 전 형님이 제 고모부가 됐으면 좋겠군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반문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도 되게 해야 한다!
진지항은 엽영교를 보더니 조금 난감해했다. 당시 그녀가 말이 안 통하는 사나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묘기화가 그렇게 죽으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엽영교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 하고 있었습니까?”
주운환은 탁자 위에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조이산약고를 만들고 있었죠! 교자도 빚고요.”
엽연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려 엽영교를 끌어당겼다.
“고모, 우리 어서 마저 만들어요.”
주운환은 진지항을 보며 말했다.
“형님, 우리도 만듭시다.”
“어?”
진지항은 어리둥절했다. 자신들은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었는가? 그런데 어째서 교자를 빚자고 한단 말인가?
그러나 주운환은 멍한 그를 두고 혼자 걸어가더니 한쪽에 놓인 대야에서 손을 씻고 엽연채 옆에 앉았다. 진지항은 혼자 얼빠진 모습으로 서 있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 얼른 그들 곁으로 걸어갔다. 가 보니 엽연채와 엽영교는 경단을 굴리며 산약고를 만들고 있었다.
주운환이 놀랍다는 투로 물었다.
“이런 것도 만들 줄 압니까?”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온 귀한 아가씨들이니 신기해할 만도 했다.
“조금 할 줄 알아요. 어릴 때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었거든요. 자수도 구럭 뜨기도 다 지겨웠죠. 그러다 채 마마가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걸 우연히 봤는데, 고모가 저를 끌어당기며 직접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지 뭐예요? 만드는 법을 배워야 음식을 입 안에 넣었을 때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하시면서요.”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나니 확실히 더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니?”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맞아요!”
엽연채는 혀를 내밀며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전 아직도 잘 못 만들어요.”
진지항은 엽영교의 말을 들으며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진씨 가문의 가정교육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뭔가를 이루고 싶으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며 덮어 놓고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좋은 관리가 되고 싶으면 백성들의 가난과 어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자신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함께 지내 봤고 농사도 지어 봤다. 또 도시에서 점원이 된 적도 있었다.
다른 가족들 역시 분주히 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고 어머니 역시 음식 만들기를 즐겼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대부분의 규수들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귀한 여인들이라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엽영교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한편, 엽연채는 작게 떼어 놓은 산약고 반죽을 치대어 고르게 편 다음 대추소를 넣어 하나하나 빚었는데, 그 모양이 정말로 볼품없었다. 산약고들이 가지런히 그녀 앞에 놓여 있는데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비루한 모습이었다.
주운환은 산약고를 쳐다보며 ‘풉’ 웃었다.
“왜 웃어요?”
엽연채가 그를 쏘아봤다.
“정말 귀엽군요.”
주운환의 대꾸에 엽연채는 부끄럽고 약이 올랐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해 톡 쏘았다.
“부군이야말로 귀여우시죠.”
그러자 주운환의 잘생긴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빚은 떡이 못생겼다는 말인가?
엽연채는 그의 표정을 보더니 ‘픽’ 비웃었다. 역시 자신이 만든 떡이 형편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작은 반죽부터 차례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그저께 부군이고 요건 어제의 부군이며 얜 오늘의 부군이에요.”
주운환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가 빚어 놓은 들쭉날쭉한 산약고 경단을 집어 들더니 살살 비벼 하나하나 모양을 예쁘게 만든 다음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이 부부가 만든 떡은 여전히 조악했다. 이와 정반대로 엽영교 앞에 일렬로 늘어선 떡들은 하나하나 동그랗고 일정한 크기였다.
진지항은 두 모양새를 비교하며 매우 놀라워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엽영교는 시선을 아래로 드리운 채 민첩하게 손을 움직였다. 게다가 조그만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밀가루가 조금 묻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아리따워 보였다.
이 엽씨 가문 소저가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으나 오늘 이렇게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욱더 자색이 출중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