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그 시각, 추씨 가문.
엽연채는 온씨가 지내는 곁뜰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염소수염을 기른 맞은편의 오십 대 의원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펴 보시게.”
의원이 말했다.
“연채야, 어서.”
온씨가 그녀를 재촉했다.
엽연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는 찻상에 놓인 작은 받침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추길이 얼른 엽연채의 새하얀 손목 위에 얇고 가벼운 백색 손수건을 덮어 주었다.
의원은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손목을 누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고는 온씨를 쳐다봤다. 온씨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심장이 쿵쿵 뛰고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의원님, 어떻습니까?”
‘설마 심각한 큰 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걸까? 평생…….’
온씨는 그런 생각을 하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엽연채는 차마 두 사람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다른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몸은 멀쩡합니다.”
의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주 건강합니다. 한 번에 열 명 낳는 것도 문제없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고 작고 아리따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화끈거렸다.
‘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 있담…….’
“아…….”
온씨도 깜짝 놀랐고 난감해하는 엽연채를 보니 자신이 다 겸연쩍어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의원님 말씀은 우리 연채의 몸 상태가 아주 좋다는 거죠? 불임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혼인한 지 일 년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도 없어요.”
“이 늙은이를 못 믿으시겠으면 다른 뛰어난 의원을 부르셔도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의원님을 못 믿는 게 아니에요.”
온씨는 깜짝 놀랐다. 이 관 의원은 도성에서 유명한 의원으로, 그가 가장 정통한 분야는 바로 출산이었다. 왕진을 청하는 데만 오백 전錢이 들었다. 들리는 이야기론 십 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그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는 모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런 문제는… 사내 쪽도 진찰을 받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온씨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아이가 없는 많은 부부들에서 사내 쪽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위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관 의원이 말했다.
“사위는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어요.”
온씨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사위가 오면 다시 의원님에게 왕진을 청할게요.”
“예.”
관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내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사내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창피하다는 이유로 의원을 보러 올 엄두를 못 냈다.
“그럼 약을 좀 먹어 몸 관리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온씨가 또 말했다.
“약을 함부로 먹으면 안 됩니다. 몸에 문제가 없으니 약은 먹지 마시죠. 평소에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 됩니다.”
관 의원은 그리 말하며 이미 약상자를 들어 올렸고 채 마마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문밖으로 배웅해 주었다.
얼굴이 홍시가 된 엽연채가 타박하듯 말했다.
“어머니, 일부러 별장에서 돌아오신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요?”
“아니면 뭐? 네 말투를 보니 설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온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건 확실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대사大事였다. 하지만 속으로 찔리는 부분이 있는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몸에 문제가 없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구나.”
온씨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이어 미간을 또 찌푸렸다.
“시간을 봐서 운환이도 불러오너라.”
“네, 네.”
엽연채는 적당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전 이만 집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렴.”
온씨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적어도 딸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추길은 온씨를 보다가 다시 엽연채를 쳐다봤다. 두 부부가 첫날밤조차 보내지 않았으니 아이가 태어나면 되레 놀랄 일이었다.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입을 벌리다가 결국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마차를 타고 정국백부로 돌아온 엽연채는 수화문에서 때마침 말을 타고 귀가하는 주운환을 보았다.
주운환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여양의 손에 쥐여 주고는 엽연채에게 말을 붙였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추씨 가문 저택에서 어머니를 뵙고 왔어요.”
오늘 만났던 의원이 떠오르자 엽연채는 아리따운 두 눈으로 슬며시 그를 힐끔하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머님께서 일찍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은 옆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아 어머니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긴말하지 않았다.
“아 참, 저번에 우리 고모 혼사에 신경 좀 써 달라고 했었는데, 윤곽은 좀 잡혔어요?”
엽연채가 화제를 돌리자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인품과 학식도 훌륭합니다.”
“정말요?”
엽연채는 기뻐했다.
“내일 집으로 데려올 테니 소저도 고모님을 불러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지 한번 보죠.”
주운환의 제안에 엽연채는 크게 반색했다.
“좋아요. 추길아, 넌 엽씨 가문으로 가서 내일… 내가 직접 조이산약고枣泥山藥糕를 만들 것이니 고모에게 꼭 드시러 와야 한다고 전하거라.”
엽연채와 주운환의 일로 걱정이 한가득하던 추길은 엽연채의 말이 떨어지자 하는 수 없이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문을 나섰다.
* * *
엽씨 가문.
엽영교는 방금 막 안녕당에서 나왔는데, 옥패가 추길을 데리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먼저 알은체했다.
“어? 오늘 집에 돌아왔는데 무슨 일인 게냐? 내가 거기에 무슨 물건이라도 놓고 왔니?”
“아닙니다.”
추길이 말했다.
“아가씨께서 내일 떡을 만들 것이니 영교 아가씨께 꼭 오시라고 전하라 하셨어요.”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그 게으름뱅이가 며칠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도 피곤하지도 않나 보네. 그래, 내일 맛보러 가마.”
* * *
한림원.
녹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진지항은 표지가 파란색인 전조前朝의 실록으로 아래에 놓인 누르스름한 선지宣紙를 가리고 있었다. 그는 몰래 잡다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진지항은 깜짝 놀라 얼른 그 전조 실록으로 아래에 놓인 선지를 가렸다.
“에헴!”
헛기침 소리의 주인공은 장원학사 필 씨였다. 진지항은 실록을 보는 척했는데 뜻밖에도 그가 실록 아래 가려져 있던 선지를 잡아채자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자, 장원학사 대인…….”
“흥!”
장원학사 필 씨는 콧방귀를 뀌더니 선지를 둥글게 뭉친 다음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깔고 질책했다.
“하루 종일 뭘 하고 있는 겐가? 실록의 내용은 잘 맞춰 보았는가? 규정에 따라 정리는 잘했고?”
“다 했습니다.”
진지항이 낮은 목소리로 답하자 장원학사 필 씨는 입을 약간 오므리며 싫은 소리를 한마디 더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자네는 한가하게 놀고 있구먼. 흥.”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조범수는 웃으며 진지항을 힐끔 쳐다봤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구먼.”
“제가 무슨 정신을 딴 데 팔아요? 저희가 이곳에 있는 건 덮어 놓고 공부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매일 사기와 실록들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이에요?”
진지항은 못마땅한 투로 반박했다. 한림원은 인재양성 기관이라 한림들은 편찬과 기록, 전조의 국사와 실록을 수정하는 등의 직무를 수행하며 남는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필 씨가 군소리를 한 것이었다.
이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운환이 들어왔다. 그의 손엔 표지가 노란색인 두꺼운 서책이 들려 있었다.
“운환이가 돌아왔구먼.”
조범수는 주운환을 반기며 물었다.
“황제 폐하를 모시고 강독을 하는 데 힘들진 않은가?”
“힘들지 않습니다. 한쪽에 서 있다가 폐하께서 궁금한 게 있어 물으시면 대답해 드리면 되지요.”
주운환은 자기 자리에 앉았고 조범수는 그를 속으로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상서방에 가는 건 사실 황제의 고문관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황제는 상주서를 보다가 잘 모르거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고문관에게 물어봤다.
이런 요직은 일반적으로 더 높은 품계인 시독侍讀과 시강侍講이 맡는데, 이 두 사람이 시간이 없을 경우에는 이번 과거 시험에 붙은 편수編修들이 불려갔다. 물론 황제가 한림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진사를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할 경우 그 사람을 상서방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 주운환이 바로 황제가 찾는 그 진사인 것이었다.
이미 주운환이 이틀이나 연속으로 불려갔으니 장원학사 필 씨는 아니꼬워 죽으려 했지만, 다른 수가 있으랴. 조범수는 그가 한림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됐으니, 계속 이렇게 가면 삼 년 뒤 조고朝考를 치른 후 한림원의 정식 관리가 되는 건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밖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조범수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에휴, 드디어 퇴청이구먼. 참, 두 사람 지난번에 먹었던 모과 절임을 또 먹으러 가지 않을 텐가?”
그는 그리 말하며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주운환과 진지항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하하하. 농담일세. 나 먼저 가네.”
조범수는 거부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더니 서둘러 가 버렸고, 진지항은 저 늙다리가 분명 지난번 그 무방에서 봤던 가기와 약속을 잡은 거라고 생각했다.
둘이 있게 되자 주운환이 진지항을 쳐다보며 운을 뗐다.
“형님, 동주에서 나는 북매차北寐茶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저희 집에 마침 몇 포가 있습니다. 집에 있는 취옥翠玉잔에 한 잔 타 드릴 테니 한번 드셔 보시지요.”
“오, 좋지!”
진지항은 듣자마자 얼른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함께 동화문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주운환이 바로 말에 오르자 진지항은 그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운환아, 너는 왜 항상 말을 타니?”
“시원하고 상쾌하지 않습니까.”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진지항은 잠깐 말이 없다가 혼자 자신의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이 주씨 가문 저택이 위치한 장승가에 도착하자 진지항은 갑자기 낯빛이 살짝 변했다. 그제야 한 가지 일이 떠오른 것이다.
작년에 자신은 주씨 가문 대소저에게 반해 어머니에게 사람을 통해 구혼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상대방에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그랬는데도 자신은 단념하지 않고 주씨 가문으로 달려가 대소저의 앞을 가로막고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결과는……. 지금 생각하니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지항은 지금에 와서야 기겁할 만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두 달가량 알고 지낸 이 동료가 바로 그 주 대소저의 오라비라는 사실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진지항은 퍽 난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