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저희 어머니도 돌아오셨다고요?”
엽연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큰이모와 오라버니들은요?”
엽영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네 큰이모와 오라버니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대나무주를 지켜봐야 하는 거 아니었어?”
“잠시만요. 집으로 돌아가신다고요?”
“응.”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일이 많잖니. 난 요 며칠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분이 아주 좋아졌지만, 집안은 어수선하니 어머니 혼자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겠어.”
엽영교는 그리 말하며 옥패에게 짐 정리를 하라고 했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엽영교는 떠날 채비를 마쳤고 엽연채는 그녀와 함께 문을 나섰다. 엽연채는 추씨 가문에 가서 온씨를 만났고 엽영교는 엽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 * *
엽영교가 안녕당으로 들어가자 묘씨는 보따리를 들고 돌아온 그녀를 보더니 얼떨떨한 투로 물었다.
“연채네 집에서 머문 지 며칠 안 되지 않았느냐? 어째서 벌써 돌아온 것이냐?”
“어머니, 제가 거기서 지내는 게 편하겠어요?”
엽영교는 그녀를 흘겨보며 반문했다.
“연채랑 놀 수 있다는 생각만 하고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있으면 연채 부부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한 거죠.
이채 좀 보세요. 걔는 아기를 낳은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는데 연채는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잖아요. 어제 별장에서 보니 큰새언니가 애가 타서 두 아이를 한방에 집어넣더라고요. 그제야 저도 그 부분이 생각났어요.”
그 말에 묘씨는 깜짝 놀랐다.
“나도 참 무신경했구나. 그 맹씨 가문 부인이 어찌나 사람을 업신여기던지 사람들 앞에서 널 모욕했단다. 난 그냥 집안 하인들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까 봐 염려되어 널 그곳에 보냈지, 연채 부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다행히 요 며칠 동안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더구나……. 다들 네 아버지 이야기만 했단다.”
사실 묘씨가 엽영교를 그곳에서 지내게 한 건 엽연채의 세를 이용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엽영교와 엽연채의 사이가 좋다는 걸 보여 주면 아무래도 혼담을 꺼내기가 좀 더 수월해질 터였다.
엽영교의 혼사를 생각하니 묘씨는 흰머리가 더 늘어날 지경이었다. 이때, 여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오늘 나리께서 드실 약선藥饍(약재를 섞은 자양 강장 식품)은 어떻게 만들까요?”
“어제랑 똑같이 만들면 된다.”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께서 어디 편찮으세요?”
엽영교가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물었다.
“그렇단다!”
묘씨는 그리 말하며 눈 흰자위를 번득였다.
“약선을 드셔야 할 정도로요?”
“그럴 필요는 없지.”
엽영교의 물음에 묘씨는 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것도 아니란다. 그저 대리시 안에 며칠 갇혀 있던 게야. 어제 집으로 모셔온 다음에 의원을 불렀는데 의원이 문제 될 것 없다며 별일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도 네 아버지는 침상에 드러눕더니 약선을 먹어야겠다고 하시더구나.”
엽영교는 입꼬리를 샐쭉거리더니 그가 왜 그리하는지 대략 짐작했다.
이 형편없는 아버지는 다 늙은 노인이지만 그래도 전에는 후야이자 관료였다. 그런데 사돈에게 대리시로 끌려갔으니 한마디로 개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드러누워 약선을 먹으며 몹시 억울하고 무고한 척을 해야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일 터였다.
“어쨌든 네 아버지이니 가서 좀 들여다보거라! 안 그러면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다! 지금 바깥 서재에서 몸조리를 하고 계신다.”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묘씨와 함께 안녕당을 나섰다. 청석판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중문重門 밖으로 나가 왼쪽으로 도니 엽학문의 서재가 나왔다.
두 사람이 걸어 들어가니 커다란 배나무 탁자가 보였다. 그 오른쪽이 바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가까이 가니 커다란 발보상이 보였고 그 위에 엽학문이 똑바로 누워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고 나이 든 얼굴은 누렇게 떠 있으며 그런대로 살집이 있는 편이었던 두 볼도 움푹 패어 있었다. 보아하니 족히 여섯 근斤은 빠진 듯했다.
엽영교는 그 모습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어쨌든 자신의 아버지인지라 이렇게 허약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또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리.”
묘씨가 그를 불렀다. 그제야 엽학문은 눈을 뜨더니 엽영교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영교가 돌아왔구나?”
“아버지, 괜찮으신 거죠?”
엽영교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엽학문은 엽영교 뒤를 흘깃하더니 한 사람이 더 보이지 않자 대뜸 성을 냈다.
“연채 그 녀석은 하루 종일 한가해서 따분해 죽을 지경일 텐데, 할애비를 보러 오지도 않는구나.”
그 말에 엽영교와 묘씨는 입꼬리를 삐죽거렸고 엽영교는 기가 차 조소했다.
“아버지가 바라시던 거잖아요. 전에 연채에게 별일 없으면 오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허를 찔린 엽학문은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마님.”
이때, 밖에 있던 전 마마가 안으로 들어와 묘씨를 찾았다.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안녕당에 계세요.”
묘씨는 지난번에 자신이 부탁했던 일을 떠올리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이채가 왔구나. 어서 가 보자꾸나.”
“난 쉬고 있으니 이따가 이곳으로 올 필요 없다고 전하시오.”
엽학문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엽연채 요것은 정말로 코빼기도 안 비친다 이건가!’
엽학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장씨 가문으로 손녀를 시집보냈지만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했고, 이번엔 장찬 그 늙은이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또 모를까, 하필이면 사돈한테 그 꼴을 당했으니 개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 손녀, 그 쓸모없는 녀석은 장씨 가문에 귀한 적손을 낳아 주고도 할아버지의 체면을 한번 봐달라고 말도 못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학문은 정말이지 부아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엽영교는 그 분통 터져 하는 꼴을 보다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저도 모르게 작년 중추절 일이 떠올랐다. 당시 엽학문은 엽이채를 편애했고, 엽연채를 쏘아보며 별일 없으면 친정에 오지 말라는 소리까지 했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그러니 사람은 살면서 너무 파렴치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엽영교도 더 머무르지 않고 묘씨를 쫓아갔다. 안녕당에 도착하니 아직 문안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손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덩굴 문양이 들어간 갈색 배자를 입은 엽이채는 권의에 앉아 있었고 손씨는 한쪽에 앉아 엽이채의 아이를 얼렀다. 멀리서 그 아이가 옹알옹알하는 귀여운 소리가 들렸다.
“이채가 왔구나.”
묘씨가 손씨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보 좀 보거라. 정말 튼실하구나. 팔뚝이 꼭 연근 같아.”
엽이채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청자기 찻잔을 들고 있었다. 만월연 이후로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살이 오르지 않았고 얼굴은 더욱 까칠해 보였다.
“이채야, 어찌 된 거니? 잠을 잘 못 잔 거니?”
엽영교는 엽이채 맞은편에 놓인 권의에 앉더니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아기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 주면 안 된다. 아이는 유모에게 맡기고 너도 푹 쉬어야지.”
묘씨가 미소를 지으며 딸의 말을 거들었다. 엽이채는 말문이 막혔고 그녀의 눈빛엔 순간 분노와 불쾌함이 어리었다. 자신은 아이를 대부분 유모에게 맡겼고 아이도 유모를 아주 잘 따라 평소에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잤다.
그러나 그럼에도 엽이채는 여전히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했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시시때때로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만 생각하면 번민과 후회가 밀려왔다.
주운환은 분명 비천한 서자였고 그녀가 원치 않아 엽연채에게 떠넘긴 사내였다. 그리고 그녀가 시집을 간 사내는 분명 3품 고관인 대리시경의 적장손이었다. 게다가 본인도 천재라 불리는 소년 수재였다. 그때 그녀는 스스로 정말 잘나간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라고 우쭐거렸었다.
그런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장박원은 시험에서 낙방한 반면, 주운환 이 비천한 서자는 승승장구했다. 단번에 장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눈부시게 반짝반짝 빛나며 상대의 기세를 꺾고 있었다. 그야말로 역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비교당한 장박원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엽이채는 망신살이 뻗쳐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지만 막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장원 급제자를 언급하고 그 부인을 이야기할 때마다 질투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엽이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엽영교를 쳐다보았다. 엽영교는 신세를 망친 것과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관직이 삭탈되고 집안의 작위도 빼앗겨 그녀는 몸값이 확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맹흠과의 일도 일어났었다. 정말 가여운 신세였다.
딱한 처지의 엽영교를 보고 있자니 엽이채는 그제야 평정심을 얼마간 되찾았다.
“참, 이채야. 지난번에 네게 부탁했던 일은 소식이 있느냐?”
묘씨가 탑상 위에 앉으며 화제를 돌렸다.
“네, 할머니. 소식이 있어 이렇게 온 겁니다.”
엽이채의 대꾸에 묘씨는 더욱 진심 어린 미소를 짓더니 저도 모르게 엽영교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자 엽영교는 왠지 긴장이 되어 등을 반듯하게 펴고 물었다.
“어머니, 무슨 일인데요?”
질문하긴 했어도 사실 속으로는 대강 짐작이 갔다.
“아유, 무슨 일이겠어요? 당연히 아가씨 혼사 이야기죠.”
아기를 안고 있는 손씨가 미소를 지었다.
“영교야, 방으로 가 있거라.”
묘씨는 미소를 지으며 엽영교를 쳐다봤다. 이런 일을 어떻게 딸 앞에서 상의할 수 있겠는가?
엽영교는 표정을 굳혔다. 자신의 혼인을 논한다니 당연히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법도를 알고 있었다. 당사자 앞에서 혼사를 논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엽영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하는 수 없이 손수건을 움켜쥐고 병풍 뒤에 있는 장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뒷문을 통해 떠나는 대신 병풍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엿들었다.
묘씨는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고 엽이채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냐?”
엽이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장흥후부長興侯府 다섯째 공자입니다.”
묘씨는 후부의 자제라는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흥후부라. 우리 가문과는 잘 모르는 사이란다.”
사실 장흥후부는 예전의 엽씨 가문만도 못한 가문이었다. 집안의 주인만이 5품 한직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관직에 취임조차 못 했다. 그러나 엽씨 가문이 이 지경이 됐으니 묘씨도 까다롭게 따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