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화
“말이 되는 이야기야?”
추랑의 제안에 엽영교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흰 다 큰 사내라 힘이 훨씬 세잖아. 우리에게 팔이 한 쌍 더 생긴다고 해도 너희를 이기지는 못할 건데.”
“그럼 편을 다르게 먹으면 되죠. 저랑 고모가 한편이 되고 형님과 연채가 한편이 돼요. 이렇게 해서 어느 쪽이 더 많이 뽑는지 봅시다. 지는 편이 죽순 껍질을 까는 걸로 하고요.”
“그래. 그렇게 하자!”
엽영교는 추랑의 말을 듣고는 쪼르르 달려갔다.
“연채야, 우리 내기하자. 지는 사람이 한 달 동안 진규루陳桂樓에서 간식을 사 주는 거다.”
“네.”
엽연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엽영교는 의욕 없는 그녀를 보더니 돌아와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이래서야 이미 너희가 진 거 같잖아?”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땅에 쭈그리고 앉아 죽순 하나를 움켜잡고 뽑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못 캔다.”
추경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낫을 이용해 죽순을 벤 다음 비틀어 뽑아내니 큼직한 죽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낫을 들어야겠네요.”
“넌 없어도 돼. 내가 다 자를 테니 너는 뒤에서 비틀어 뽑으렴.”
“알겠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경은 흥미가 없는 게 분명한데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엽연채가 귀여워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따라오렴.”
추경은 앞에서 죽순을 잘랐고 엽연채는 쭈그리고 앉아 그 죽순들을 비틀어 뽑았다. 그런데 잡고 있던 죽순이 생각보다 확 뽑히자 그녀는 뒤로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 등 뒤에 뭔가가 부딪혔다. 그녀는 당연히 대나무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뜻밖에도 주운환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합니까?”
주운환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죽순을 손에 들고 땅에 앉아 있는 그녀는 이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노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런, 넘어진 겁니까?”
주운환은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웃음기 어린 두 눈동자는 햇빛을 받으며 일렁이는 물결처럼 반짝거렸고 붉은 입술은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채였다.
엽연채는 왠지 모르게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성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거든요.”
“아니기는요. 봅시다. 넘어져서…….”
그는 그리 말하며 몸을 굽혔다.
“꺅! 이게 무슨!”
하늘과 땅이 뱅글뱅글 돌더니 엽연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는 주운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앞에 있던 추경과 엽영교가 비명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보니 주운환이 엽연채를 안고 있었다.
추경은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고 이어 안색이 확 변했다.
“연채야…….”
엽영교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연채야, 무슨 일이야?”
“넘어졌습니다.”
대신 대답하는 주운환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와 달리 엽연채는 어찌나 부끄럽고 분한지, 그를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넘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면 지금 이 모습이 너무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겠는가?
“그럼…….”
엽영교가 두 사람에게 얼른 돌아가서 쉬라고 말하려는 찰나, 주운환은 이미 엽연채를 안고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주운환은 엽연채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화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마차 안에 앉힌 다음 마차 밖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어젯밤엔 어디 갔었어요?”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요. 머릿속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 버렸습니다.”
화가 난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날 안지 말아요.”
“안 넘어지면요.”
“난 한 번도 넘어진 적 없거든요.”
엽연채는 버럭 화를 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죽순을 그의 머리로 던졌다. 하나 주운환은 단번에 죽순을 잡았고, 엽연채는 잔뜩 성이 나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연채야.”
이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온씨였다.
“어머니.”
엽연채가 발을 올려 보니 온씨와 엽영교가 걸어오고 있었다.
온씨는 주운환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엥? 운환이는 도성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느냐? 어째서 또 돌아온 것이냐?”
“아침에 도성으로 돌아가 공무를 처리한 다음 아내를 데리고 가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온씨는 청아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을 보고 또 엽연채를 데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왔다는 그의 말을 듣더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딸은 혼인한 지 일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이 소식이 없었다. 또 엽이채와 비교를 해 보니 사위가 딸을 싫어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엽연채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안 되겠다. 집에 돌아가면 좋은 의원을 찾아 연채를 진찰해 봐야겠어. 정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조기에 치료해야지.’
온씨는 마차에 앉아 곧 떠나려 하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원래는 엽연채에게 이곳에서 함께 며칠 더 머무르자고 할 생각이었다. 주변 경관은 수려하고 아늑했으며, 모녀가 다정하게 한곳에서 지내며 속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린 부부가 집에 가려는 모습을 보니 온씨는 두 사람이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너희들은 어서 돌아가 보려무나. 난 들어가서 네 큰이모에게 너희들이 간다고 전하는 김에 추길이에게 짐을 정리하라고 해야겠구나.”
“네.”
엽연채가 대답하자, 온씨는 엽영교를 데리고 함께 수화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 별장은 엽연채가 가지고 있는 별장 중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별장이었다. 하여 엽연채는 바깥바람을 쐴 때 보통 이곳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는 엽연채가 입을 사계절 의복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세면도구도 모두 갖춘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 올 때도 추길이 커다란 보따리만 하나 챙겼는데, 그것이 가져온 짐 전부였다.
추길은 주운환을 보더니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역시 집이 좋죠. 잠자리가 바뀌었더니 제대로 못 잤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마차에 올라 엽연채 곁에 앉았다.
마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별장을 나와 대로를 지나가자 길 양쪽으로 갖가지 색깔의 야생화가 활짝 피어 있었고 짙푸른 들풀이 무성해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마차 양쪽에 달린 주렴이 걷혀 있어 상쾌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엽연채는 창문에 기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쭉 피고 말을 타고 가는 주운환의 뒷모습을 보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차는 한 시진 넘게 달려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궁명헌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혜연은 엽연채와 추길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 옷을 얼른 내려놓고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아가씨, 마님을 모시고 별장에서 며칠 더 있다가 오시는 거 아니셨어요?”
“아, 갑자기 공자께 끌려 왔어.”
추길이 웃으며 대신 대답하자 혜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엽연채에게 물었다.
“그럼 식사는 하셨어요? 제가 지금 가서 준비시킬게요.”
“그래.”
엽연채는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나한상 위에 엎드렸다.
혜연은 일각이 지나 돌아왔다. 눈을 감고선 쉬고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참, 장 대인께서 사람을 보내 선물을 좀 보내셨습니다. 아가씨께 고맙다고 하셨어요.”
“장 대인?”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장찬이 요리를 체포한 일 때문에 인사를 해 온 것이다.
침실로 들어간 혜연은 상자 두 개를 들고 나왔다. 하나는 구름 문양이 조각된 기다란 녹나무 상자였고 다른 하나는 길이가 십 촌寸(일 촌은 약 3cm임) 정도 되는 큰 상자였다.
엽연채가 열어 보니 녹나무 상자 안에는 형태가 온전하게 보존된 야생 산삼이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값어치가 상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상자 안에는 캐낸 지 얼마 안 된 듯한 비취 원석이 들어 있었다. 물처럼 맑고 투명한 광택이 도는 비취였는데, 절단면이 매끄럽고 색깔은 순수하고 산뜻했다. 빛깔과 광택이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혜연과 추길은 모두 물건 보는 눈이 있었기에,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보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와, 정말 귀한 거네요. 게다가 이렇게 큰 원석이라니. 아가씨께서 무슨 일을 하셨기에 그분께서 이렇게 귀한 선물을 보내신 거예요?”
“그게…….”
엽연채는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했다. 혜연에게 말해 주는 건 괜찮지만, 추길은 성미가 급하고 입이 가벼운 아이라 숨겨야만 했다.
“분명 공자께서 장원 급제하셨는데 장박원은 시험에 떨어졌으니 이런 걸 선물하면서 공자님과 아가씨에게 환심을 사려는 거겠죠.”
이때 추길이 기쁜 목소리를 냈다. 그 말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이 알아서 상상력을 발휘해 자문자답했으니 핑계를 대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큰 원석이면 여러 가지 머리 장신구를 만들기에 충분하겠어요.”
“팔찌 몇 개랑 옥패玉佩나 옥패玉牌 몇 개를 만들 거야.”
“왜 머리 장신구를 만들지 않으시고요? 보세요, 아가씨. 이 비취가 얼마나 맑고 산뜻해요. 비취 보요나 잠簪으로 만들면 정말 고울 거예요.”
추길이 계속 설득했으나 엽연채는 얼굴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윽, 난 정수리에 새파랗게 번쩍거리는 걸 얹고 다니기 싫어.”
그 말에 추길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팔찌나 옥패를 만드는 수밖에 없겠네요.”
엽연채는 비취 원석의 절반을 집어 들었다. 이미 어떤 형태의 옥패를 만들지 머릿속으로 구상을 마친 후였다. 그녀는 오후 내내 옥패의 도안을 그렸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엽연채와 여종 둘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온 엽영교 모습이 보였다.
“고모, 일찍 돌아오셨네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래.”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 어머니도 돌아오셨어. 이따 난 집으로 돌아갈 건데 너도 이 김에 가서 네 어머니를 뵈렴.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