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자, 이제 식사들 하자꾸나.”
온사월의 말에 추경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보았다.
“연채야, 이 별장을 빌려줘서 정말 고맙다. 자, 많이 먹으렴.”
그리 말하며 공용 젓가락을 들더니 마늘종이 들어간 돼지 콩팥 볶음을 집어 엽연채의 밥그릇 위에 올려 주었다.
엽연채가 그걸 먹으려 하는데 갑자기 젓가락 한 쌍이 그녀의 젓가락을 눌렀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주운환이 수려한 얼굴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군……?”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주운환이 젓가락을 놔주더니 밥그릇 위에 있는 마늘종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또 하나를 냉큼 집어 먹더니 마지막으로 마늘종 두 개와 돼지 콩팥을 함께 집어 입 안으로 쏙 넣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거 마늘종이에요.”
그녀는 주운환이 마늘종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네. 아주 맛이 좋습니다.”
주운환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더 먹겠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아, 운환이가 마늘종을 좋아했구나. 많이 먹으렴.”
온사월은 다정하게 말하며 공용 젓가락을 들더니 마늘종을 한가득 집어 주운환의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엽연채는 주운환의 밥그릇에 수북이 쌓인 마늘종을 보더니 또 입을 샐쭉거리며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주운환은 젓가락을 들더니 밥그릇 위에 있는 마늘종을 하나하나 먹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딱 봐도 괴로운데 아닌 척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다 괴로울 지경이었다.
추경은 자신이 엽연채에게 집어 준 음식을 주운환이 먹는 모습을 보더니 싸늘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방금 전 온씨가 자신을 칭찬했던 말을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내가 장원 급제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고관대작이 될 수는 없더라도 연채에게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준다면 막내이모님도 분명 승낙하시지 않을까?’
식사를 마친 일행은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종은 커다란 원탁을 정원에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위에 과일과 간식거리, 엽연채와 엽영교가 가져온 술 두 단지를 올려놓았다.
일행은 그곳에서 이각쯤 함께 한담을 나누었다. 배 속에 그득했던 음식이 점점 소화되던 차에 채 마마가 걸어와 방이 다 준비됐다고 알렸다.
“방 청소를 다 마쳤습니다. 마님, 방 배정은 어떻게 하실 건지요?”
온씨가 무어라 하려고 하는데 추경이 한발 빨랐다.
“전 매부와 이야기가 잘 통해 오늘 저녁 한방에서 잤으면 합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부부이니 당연히 한방으로 배정될 텐데, 추경은 엽연채가 주운환과 잠자리를 가질까 걱정이 되어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주운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어쩐지, 쉴 새 없이 자신에게 말을 붙인다 싶었다.
주운환도 당연히 엽연채를 어떻게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순결을 지키려는 추경의 모습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얘도 참. 이야기가 잘 통하면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거라!”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추경을 저지했다. 한 번도 딸아이가 남편과 한자리에서 잠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엽이채는 아이를 낳고 이제 몸이 원상태로 회복했다는데 엽연채의 배는 여전히 홀쭉하니 온씨는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이 어린 부부를 방 안에 가둬 놓고 밖으로 못 나오게 하고 싶었다.
“그래. 이야기는 내일 다시 나누거라.”
온사월도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이에 엽연채는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을 굴리더니 엽영교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전 오늘 밤은 고모랑 자고 싶어요.”
“난 너랑 안 잘 거거든!”
엽영교는 그녀를 쏘아보며 딱 잘라 거절했다.
“넌 매번 이불을 걷어차잖아. 내 이불도 걷어차고 말이야.”
엽연채는 상황이 곤란해지자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기서 이렇게 훼방을 놓을 줄이야!
구석에 서 있던 추길은 엽연채가 마침내 주운환과 한방에서 자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 나들이를 오길 정말 잘했구나!’
하지만 추경의 잘생긴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탁자 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서과원에서 주운환과 함께 지내는 그 오랜 기간 엽연채는 순결을 지켜 왔다. 그러니 오늘 한방에서 잔다고 한들 뭐 어떻겠는가? 알아서 선을 지킬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온사월이 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가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 별장은 네 것이니 당연히 너희 부부가 안방에서 자야지.”
“그렇죠.”
온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곁채의 각자 방으로 흩어졌고, 엽영교도 옥패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마차를 타고 왔으니 누구라도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추랑은 뒤쪽 대나무숲에 가서 술을 봐야 한다며 추경을 끌고 갔다.
밤이 깊어지자 봄추위가 몰려와 바람이 쌀쌀하게 불었다.
안방으로 향한 추길은 이부자리를 펴 주고 있었다. 세수와 양치질을 마친 엽연채는 내의 차림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녀는 푸르스름한 회색 외투를 내의 위에 걸쳤고 새까만 머리칼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엽연채가 방 안을 둘러보니 있는 것이라고는 원탁과 둥근 걸상, 화장대와 의자가 전부였고 긴 탑상조차 없었다. 그에 미간을 찌푸리며 추길에게 물었다.
“이 별장은 누가 꾸몄기에 긴 탁자도 없어?”
“요즘 유행이랑 거리가 멀어서요. 그런 걸 들여놓지 않는 집이 많습니다.”
“그래?”
추길의 대꾸에 엽연채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공자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잘 모르겠어요…….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추길은 그리 말하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략 이각쯤 지나자 찬 기운이 서린 옅은 밤안개에 살짝 몸이 젖은 추길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표정이 잔뜩 굳은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자를 못 찾았습니다…….”
“됐으니 그만 자자!”
엽연채는 잠깐 어리둥절했으나 그리 말하며 하품을 했다.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야심한 시각인데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분명 다른 곳에서 자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외투를 벗고 침상 위에 누웠다.
“하지만…….”
추길은 실망감이 몰려왔다. 흔치 않은 기회인데 공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뭐?”
엽연채는 그녀를 쏘아봤다.
“너도 얼른 가서 자렴. 아니면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자든가.”
추길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엽연채에게 주운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밖에서 그를 찾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리 말할 수 있겠는가?
엽연채와 함께 자는 것도 당연히 내키지 않았다. 주운환이 조금 후에 돌아왔는데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보고 그냥 가 버리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럼 전 나가 보겠습니다.”
추길은 오늘 채 마마와 함께 가장 끝에 있는 동쪽 곁채에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등불을 끈 뒤 돌아서서 밖으로 나와 방문을 닫았다. 그러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침상 머리맡에 있는 등은 꺼졌지만 근처에 있는 등잔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등잔엔 해당춘수도海棠春睡圖 문양이 들어간 옅은 회색 등갓이 씌워져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빛이 꽤 어두워서 사람이 물체는 볼 수 있으나 눈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 밝기였다.
엽연채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에게 냉랭한 모습을 보였던 주운환을 떠올리자 좀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고, 너무 피곤해서인지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엽연채가 드디어 눈을 뜨고 침상에 누워 있는데 잠시 후 추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놋쇠 대야와 세수 용품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엽연채 혼자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공자께서는 결국 어젯밤에 안 돌아오셨구나!’
추길의 마음속에 실망감이 몰려왔다.
‘정말 이혼하시려는 걸까?’
“물 좀 다오.”
엽연채는 잠에서 막 깨어났기에 눈이 게슴츠레했다. 추길이 얼른 물을 가져오자 엽연채는 세수를 한 뒤 흰색 바탕에 매화가 수놓아진 배자로 갈아입고 대청으로 갔다.
온씨와 엽영교 등은 이미 와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고 원탁 위엔 소가 든 만두와 부용고芙蓉糕 등의 간식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온씨는 엽연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야, 왔구나. 음, 근데 어째 사위는 보이지 않는구나?”
“그게……. 급한 일이 있어 도성으로 돌아갔어요.”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리 핑계를 댔다.
“아. 그랬구나. 공무로 여간 바쁜 게 아닌가 보구나.”
온씨는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서 아침 식사 하거라.”
“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원탁으로 걸어가 온씨 곁에 앉았고 채 마마는 그녀에게 송화단 죽을 한 그릇 떠 줬다.
추경은 엽연채가 주운환과 함께 오지 않는 모습을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주운환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그는 안방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걸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간밤에 제가 술을 보러 갔는데 죽순 끝이 튀어나와 있더라고요. 어젯밤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으니 이제 뽑아도 될 거예요. 조금 후에 죽순을 뽑으러 가요.”
“재미있겠네요. 같이 가요.”
엽영교는 까르르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너희끼리 가거라. 나이 든 우리는 끼지 않으련다.”
온씨가 말했다.
죽순을 뽑을 생각을 하니 엽영교는 신이 나 단숨에 밥공기를 비우고는 엽연채를 끌고 뒤쪽에 있는 커다란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연채야, 밤잠을 설쳤니?”
엽영교가 엽연채의 낯빛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
“음…….”
엽연채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적당히 둘러댔다.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 자겠어요.”
별장을 둘러싼 커다란 대나무들 아래 큰 술 단지들이 하나하나 놓여 있었다. 옮겨 놓은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벌써 떨어진 대나무 잎으로 단지가 반쯤 덮인 채였다. 옅은 술 냄새가 상쾌한 대나무 향기와 섞여 대나무 숲 전체가 살짝 취기가 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와……! 정말 많다!”
엽영교가 웃는 낯으로 감탄했다.
엽연채도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죽순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뾰족한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얗고 통통한 죽순들이 ‘어서 와서 나를 뽑아줘!’ 하며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우리 시합해요! 누가 제일 많이 뽑는지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