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09화 (309/858)

제309화

대리시에 갇힌 엽학문과 허서의 판결 결과가 나왔다. 엽학문에게는 방임죄로 태형 열 대의 처벌이 내려졌지만, 은화 오백 냥을 벌금으로 내면 형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묘씨는 얼른 은화 오백 냥을 내고 엽학문을 집으로 데려왔다.

허서에게는 거짓을 고하고 호부시랑을 매수한 죄로 태형 스무 대와 1개월 감금이라는 처벌이 내려졌다.

그 소식을 들은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더는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시가 지나자 주운환이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엽연채, 엽영교와 함께 출발해 교외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사월이라 주위엔 꽃내음이 가득했고, 흩날리는 꽃잎들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번잡한 도성에서 벗어나 속세의 소음과 멀어지니 아름다운 풍경과 싱그러운 초록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엽연채와 엽영교는 발을 걷어 올렸고, 주운환은 밖에서 말을 타고 가며 주변을 감상했다. 초록빛이 넘실거리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니 최근 응성 패배로 무거웠던 그의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런데 5리쯤 더 갔을 때 갑자기 근처에서 고함과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가 나는데?”

엽영교가 말했다.

“나팔 소리 같은데… 무슨 일일까요?”

엽연채도 미간을 찌푸리며 궁금해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밖에서 마차를 몰던 경인이 말했다.

“응성을 지키던 풍 대장군님이 참살을 당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풍 노장군님이 서노군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려 오늘 응성으로 출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멍해진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청수한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응성이 공격받아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아님 풍씨 가문이 언급됐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과거 주씨 가문이 응성을 지키지 못해 집안이 몰락한 일이 떠올라 속상해진 걸까?’

“부군.”

엽연채가 그를 불렀다.

상념에 잠겼던 주운환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가 마차 창문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그녀는 맑게 빛나는 새하얀 얼굴로, 둥글고 커다란 두 눈으로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주운환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져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읏.”

엽연채는 주운환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조그만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그의 손을 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그녀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엽영교는 그들의 갑작스러운 애정행각에 어안이 벙벙해져 반대편 창문 밖을 바라보는 척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 일행은 마침내 엽연채의 별장에 도착했다.

추씨 가문 술은 새벽안개가 깔려 있을 때 떠야 해서 추씨 가문 사람들은 꼭두새벽부터 나들이 길에 올랐고, 온씨도 자연히 그들을 따라 이곳에 먼저 와 있었다.

엽연채의 마차가 수화문 밖에 멈춰 서자 여종 하나가 서둘러 들어가 엽연채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추경과 추랑은 정원 뒤쪽에 있는 대나무숲에서 술 단지를 배치하고 있었다. 술 단지 오륙십 개가 어느새 대나무숲에 빽빽이 자리했다.

밖에서 엽연채의 도착을 알리는 여종의 목소리가 들리자 추경은 기뻐하며 하던 일을 멈추고 추랑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던 추경은 수화문에 도착하자마자 표정을 확 굳혔다.

‘어째서 저자가 같이 왔단 말인가?’

말에서 내린 주운환은 그를 보더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형님.”

“장원 급제자가 왔구나.”

추경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듣자 하니 한림원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조정에 들어간 지 겨우 한 달 남짓 되었는데 어떻게 놀러 나올 시간을 냈는가?”

“제 부군이 낮에 퇴청한 뒤 서둘러서 왔어요. 내일 저녁에 다시 돌아가 봐야 해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주운환 곁에 섰다. 그러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추경의 눈에 들어왔다. 청수하면서도 화려한 외모의 사내, 장미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일순 멍하던 추경은 이내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으나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유지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추경의 말에 모두 수화문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와 주운환, 엽영교가 앞에서 걸어가고 추랑과 추경은 한 발 뒤처지나 싶더니 추랑이 추경을 끌고 한편의 복숭아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형님, 주 공자가 장원 급제를 했어요. 이젠 한림까지 되었으니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갈 겁니다. 연채 친할아버지처럼 공부만 할 줄 알고 대인 관계엔 서툰 사람이라 해도 4품 관원은 되니, 우리 가문은 비교도 안 돼요.”

예전의 주운환은 그저 서자에 불과했으니 추랑은 형이 그와 겨뤄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주운환이 앞길이 창창한 장원 급제자가 되었으니 엽연채가 무엇 하러 그 잘난 남편을 버리고 상인 가문의 자제에게 재가를 하겠는가?

“연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추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전에 주운환이 초라한 처지였을 때도 연채는 주운환을 선택했다. 하니 연채는 명리名利(명예와 이익)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게다.”

“하지만… 주 공자가 연채를 많이 챙기는 것 같은데요.”

“그만 이야기하자.”

추경은 재차 고갯짓을 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에 우리도 듣지 않았느냐? 이혼을 제안한 건 연채의 부군이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그자가 연채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연채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아이와 혼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어쨌든 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됐든 간에 그 둘이 이혼한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은 엽연채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 그녀가 자연스레 이쪽을 선택하게 할 심산이었다. 자신은 주운환만큼 재능이 넘치는 사내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가자.”

앞장서는 추경 뒤에서 추랑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바닷물을 먹어 봐야 짠 줄 아나! 됐다. 자기 내키는 대로 하라지 뭐!’

이내 널찍한 정원이 나왔다. 앞쪽으론 세 칸의 커다란 본채가 있고 동서 양쪽으로는 각각 다섯 칸의 곁채가 있었다.

온씨는 온사월과 본채의 낭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딸네를 보더니 놀라고 또 기뻐하며 얼른 밑으로 내려갔다.

“연채야, 다들 왔구나.”

온씨는 당연히 주운환을 특히 반겼다.

“어떻게 운환이도 왔구나?”

“그래? 조정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느냐?”

온사월은 장사를 하는 상인이긴 하지만, 벼슬살이를 하는 게 녹록치 않은 줄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신참 관리들은 더욱 신중하고 성실하게 행동해야 했다.

“마침 내일 휴가라 이곳에 와서 하루 놀다 가려고 왔습니다.”

주운환이 말했다.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방 안으로 들어갔고 온사월은 주운환을 따라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작년 이후로 주운환을 처음 본지라 춘시는 어땠는지 전시는 어땠는지 등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자신의 아들 둘도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니 자연히 그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주운환은 온사월의 질문에 착실히 답하면서도 시선은 내내 엽연채에게 두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던 그녀는 엽영교를 끌어당기더니 온씨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며 밖으로 향했다.

주운환이 눈알을 굴려 보니 추경이 방 안에 없었다. 그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고 머릿속은 온통 엽연채가 추경과 함께 노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다음 순간, 응성이 함락되면 자신은 분명 그 기회를 잡아 그곳으로 달려갈 텐데, 그럼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주운환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며 온사월과 과거 시험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엽연채 일행은 오시午時가 되어서야 출발한 터였다. 마차를 한 시진 타고 와서 방 안에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더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각각 조그만 옥 단지에 담긴 술을 들고 즐거운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보세요. 저희가 술을 한 단지씩 떠 왔어요.”

엽영교의 말에 온사월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 술은 지금 시험 중이라 단지마다 맛이 조금 다를 게다.”

그러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둘째 오라버니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다시 단지를 밀봉하기 전에 맛을 본 다음, 각자 가장 좋아하는 걸 골라 저녁 식사 때 마시려고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주운환을 쳐다봤는데 그는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부군, 이 대나무주 맛이 송무주와 비슷하거든요. 아마 이 술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러나 주운환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네.”

엽연채는 그가 자신에게 냉랭한 얼굴을 보이자 마음이 조금 울적해져 입을 삐죽이며 옥 단지를 안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일각쯤 지나자 여종이 밥상이 다 차려졌다고 모두를 불렀다.

엽연채는 온씨 옆에 바짝 붙어 앉았고, 온씨는 엽영교를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힘으로써 주운환이 엽연채 옆에 앉도록 했다.

사람들이 모두 착석하자 온씨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오늘 요리도 경이가 한 거예요?”

“네 기대하는 모습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느냐?”

온사월은 실소하더니 추경에게 눈을 흘겼다.

“전에 집에 있을 땐 음식을 한 번 할까 말까 했는데, 도성에 와 막내이모와 할머니와 함께 지내니 늘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구나.”

그러자 온씨가 온사월을 툭 치며 말했다.

“경이가 참 효자예요. 제가 경이 외할머니 덕 좀 보는 거죠.”

추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께는 어릴 적에 많이 만들어 드렸는걸요? 막내이모와 외할머니는 십 년 만에 뵈었으니 당연히 두 분을 위해 자주 만들어 드려야죠.”

“경이는 정말로 보기 드문 남편감이에요. 술도 직접 빚고 장사도 할 줄 알고 거기다 요리도 잘하고 효성도 지극하잖아요. 인물도 훤하니 제가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경이에게 시집보냈을 거예요.”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치켜세웠다.

“했던 말을 또 하는구나.”

온사월은 이리 대꾸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칭찬하자 내심 기분이 좋았다. 추경도 온씨가 자신을 사위로 삼고 싶다는 말을 다시금 하자 입꼬리에 미소가 번지며 마음 역시 따스해졌다.

반면, 주운환은 긴 속눈썹을 살짝 아래로 드리우며 냉랭한 눈빛을 감추었다.

온씨는 엽영교를 힐끗 쳐다봤다. 이 시누이는 모든 면에서 괜찮은 사람이라 추경에게 시집가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엽학문이 떠오르고 또 자신의 언니가 두 번이나 소란을 피웠던 일이 떠오르자 온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엽씨 가문과 추씨 가문은 물과 기름의 관계라 괜히 얽히면 원한만 더 쌓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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