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08화 (308/858)

제308화

“주 수찬, 받으시지요.”

주운환은 의아해했지만 표정의 변화 없이 공손하게 그 물건들을 받으며 감사를 표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정선제는 주운환이 고개를 숙인 채 쟁반을 두 손으로 받아드는 공손한 모습을 보이자 아주 흡족해했다.

“됐으니 이만 물러가 보거라!”

“그럼 소신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나이다.”

주운환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난 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주운환이 밖으로 나가자 정선제는 그제야 마음을 푹 놓고 침상 위로 미끄러지듯 누웠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채결이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 아이… 보면 볼수록 운하를 닮았구나.”

정선제는 기쁨과 위안이 어린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저 아이가 운하의 환생 같지 않으냐?”

채결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게… 세상 모든 것은 다 윤회하는 법이니… 운하 공주 마마께서는 늘 폐하께 효심을 다하고 예의가 발랐습니다.”

정선제는 그 말을 듣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아이도 효심이 지극하고 예의가 바르더구나.”

채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께서 그리 생각하시면 그런 거지요.’

“그래, 이제 너도 그만 밖으로 나가 보거라. 짐은 좀 쉬어야겠다.”

정선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르자 채결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주운환은 손에 물건을 한가득 들고 한림원으로 돌아갔다. 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장원학사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게 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셨습니다.”

주운환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으나 조범수와 진지항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난번에 초 편수가 강독을 하러 갔을 땐 황제 폐하께서 아무것도 하사하지 않으셨는데.”

“맞아요!”

조범수의 말에 진지항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기쁘고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역시 우리 장원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 말에 장원학사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방금 전 채결이 왔을 때 일부러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초 편수를 추천하면서 체면이 구겨졌는데 이제 황제가 주운환에게 하사품까지 내렸으니 또다시 체면이 구겨지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확!

장원학사 필 씨는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어 볼일이 있는 척, 코를 매만지면서 갑甲 집무실을 나섰다.

주운환은 짙푸른 벼루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옥여의를 품 안에 넣었다.

주운환이 상서방에 가서 강독을 한 뒤 하사품을 받았다는 소식은 바로 한림원에 싹 퍼졌다.

* * *

을乙 집무실. 이곳에는 총 다섯 명의 편수가 있었는데, 한림翰林(한림원에 소속된 관리)들은 작은 목소리로 장원은 역시 장원이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 편수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 그의 얼굴은 더욱 화끈거렸고 붓을 쥐고 있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이전에 세 번이나 상서방에 갔지만 황제는 그저 무덤덤하게 손을 저으며 물러가 보라고 했을 뿐, 하사품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 보니 초 편수가 펼쳐 둔 흰 종이에 먹물이 잘못 묻고 말았다. 멍하니 있던 그는 얼른 먹물 자국이 묻은 선지를 구겨 뭉치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다시 쓰려고 했으나 그때 퇴청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어제 엽학문이 대리시로 잡혀갔으니, 엽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아침이 밝자마자 묘씨를 보러 엽씨 가문으로 갔다.

안녕당. 묘씨와 나씨는 창백한 얼굴로 탑상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 부군이 알아보러 갔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허서가 벌인 일이라는 게 이미 명백히 밝혀졌다고 해요. 다만 한 번 더 심문을 해야 해서 할아버지께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시는 거래요.”

엽연채의 말에 묘씨는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돈께서도 인편에 소식을 전달하셨는데, 별일 없을 거라고 하셨다. 이틀 후면 풀려날 거라고 했단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엽연채와 엽영교는 엽씨 가문을 떠났다. 엽씨 가문에서 나온 두 사람은 곧장 추씨 가문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추씨 가문.

추경과 추랑은 뒤쪽에 있는 화원에서 새로 만든 술을 시음하고 있었다. 대숲엔 새로 만든 대나무주가 담긴 단지가 한가득 있었고, 땅 위엔 누렇게 시든 죽엽이 수북했다. 하인들에게 나뭇잎을 치우지 말라고 일러두었기에 쌓인 죽엽에 술 단지들이 절반쯤 묻혀 있었다.

추경은 한 단지를 연 다음, 대나무 국자를 들고 와 조그만 술 사발에 한 국자 따랐다.

“형님, 어떤가요?”

추경이 한 모금 마셔 보자 추랑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구나.”

추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는데 멀리서 한 어멈이 크게 소리를 쳤다.

“도련님들, 사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추경은 기쁜 마음에 곧장 돌아서서 화원을 떠났다.

두 형제가 온씨가 지내는 처소에 도착하자 아직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추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씨 자매는 탑상에 자리했고, 엽연채는 온씨 옆에 놓인 수돈에 앉아 그녀에게 찰싹 붙어 이야기꽃을 피웠으며, 엽영교는 엽연채 옆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추씨 형제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라버니.”

추경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기다리던 연채가 왔구나. 요 며칠 막내이모님이 매일같이 네 생각만 하고 계셨다.”

“어머니, 그럼 사람을 보내 절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아니다, 네가 집안에서 잘 지내고 평안하게 있어야 내가 마음이 놓인다.”

온씨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자신이 이혼하기 무섭게 사람들은 이쪽이 딸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고 떠들어 댔다. 그러니 엽연채가 매일 이곳에 드나들면 시어머니는 분명 기분 언짢아할 것이다.

추경이 엽연채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다시 입을 뗐다.

“참, 연채야.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오라버니,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세요. 부탁이라고 어렵게 이야기할 게 뭐가 있어요?”

엽연채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를 나무라듯 대꾸했다.

추경은 그녀의 살가운 표정을 보고 또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뛰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옆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우리가 지금 대나무주를 개량하고 있는데, 이 술은 대나무가 많은 곳에 묻어 놔야 발효가 잘된단다. 우리 뒤쪽 화원에 있는 대나무 몇 그루로는 부족해서 말이야. 지난번에 갔던 네 별장에…….”

“아, 알겠어요.”

엽연채는 히히 웃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제 별장에 다른 건 없어도 대나무는 많잖아요. 오라버니가 생각하시는 게 이거 맞죠?”

“그래.”

추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좀 빌렸으면 해. 개량이 잘되면 우리도 정성으로 돌아가 땅을 좀 사서 술을 빚으려고 한단다.”

“그렇게 해요. 그런데 오라버니, 저한테도 한 단지만 남겨 주세요.”

“당연하지. 연채야, 이렇게 새로 만든 대나무주는 단지를 옮길 때 가장 맛있거든. 우리가 내일 네 별장으로 술을 옮길 거니까 너도 와서 맛보렴.”

“네.”

추경의 제안에 엽연채는 얼른 좋다고 대답했다.

“이왕 가는 거 별장에서 놀다 가면 어떠니? 연채 너도 이모님을 모시고 오랜만에 나들이하는 거지.”

“좋은 생각이에요.”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동조했다.

“그러고 보면 마침 나들이하기 딱 좋을 때네요. 봄은 금세 지나가니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온씨의 팔짱을 꼈다.

“어머니, 어떠세요?”

“그래. 가자꾸나.”

온씨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추경은 엽연채와 함께 바깥나들이를 할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

* * *

엽연채와 엽영교는 추씨 가문에 얼마간 더 앉아 있다가 함께 정국백부로 돌아왔다.

엽연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추길이 함께 침실로 향해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엽연채는 살짝 땀에 젖은 옷을 벗은 뒤 매화가 수놓인 앞섶이 교차하는 형태의 옅은 남색 상의를 새로 입었는데, 갑자기 어리둥절해하더니 고개를 기울여 침상 곁에 놓인 다층 진열창을 살펴봤다.

“아가씨, 뭘 보시는 거예요?”

추길이 그녀를 도와 반대편 소매에 팔을 끼워 주며 물었다.

엽연채는 옷을 여미면서 침상 머리맡에 놓인 다층 진열장 앞으로 걸어갔다. 진열장 위쪽엔 백옥으로 만든 반들반들한 작은 십이지신 장식품이 있었다. 그녀가 귀중하게 여기는 장식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십이지신 조각품 중간에 혈옥여의 한 쌍이 놓여 있었다. 우아한 몸체에서 산뜻한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와 침실 전체가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주운환이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에 미소가 번졌다.

“공자께서는 어디 계시니?”

“이 시간이면 퇴청하셨을 겁니다.”

추길은 그녀가 주운환 이야기를 꺼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엽연채는 치마까지 마저 갈아입고는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난죽거로 들어서니 비질을 하고 있던 여양이 엽연채를 보고 먼저 인사했다.

“마님.”

작은 서재에서 서책을 보고 있던 주운환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창가에 몸을 기대어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주운환은 그녀를 보자 기분이 산뜻해져 밝은 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일 별장에 가려고 하는데 공자께서도 갈래요?”

엽연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묻자 주운환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서책을 집어 들며 거절했다.

“관아에 가 봐야 합니다.”

엽연채는 ‘아’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어머니랑 큰이모 가족들하고 같이 다녀올게요.”

“그러십시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십시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다가 순간 굳어 버렸다. 방금 큰이모 가족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추경도 간다는 말인가?

“아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주운환이 갑자기 말을 바꾸자 엽연채는 미간을 찡그리며 의아해했다.

“관아에 가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주운환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보탰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면 퇴청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마침 모레 휴가를 신청해 두었지요. 내일 제가 퇴청한 후에 같이 갔다가 모레 밤에 돌아오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엽연채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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